제4화 내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
나는 강민지가 그렇게 순식간에 표정이 바뀌는 게 전혀 놀랍지 않았다.
원래 늘 그랬으니까.
소석진 앞에서는 온순하고 착한 여자, 나와 우리 엄마 앞에서는 악랄하기 짝이 없는 여자.
하지만 내가 절대 참을 수 없는 건, 그녀가 우리 엄마를 모욕하는 거였다.
우리 엄마는 오늘 낮에 막 장례를 치른 상태인데 말이다.
강민지는 여전히 사악한 얼굴로 독한 말을 내뱉었다.
“말해두는데 너 한 푼도 못 가져갈 거야!”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노려봤다.
그러자 강민지가 갑자기 입꼬리를 비틀며 기묘한 웃음을 지었다.
“널 감옥에 보낼 거거든.”
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는 불쑥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내 뒤에 있던 앤티크 꽃병을 넘어뜨리고는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를 듣고 소석진이 제일 먼저 달려 들어왔다.
곧 강민지는 배를 감싸 쥔 채 울부짖었다.
“소은진이 미쳤어요. 나랑 아이를 죽이려 했어요!”
소석진은 아무 생각 없이 나한테 발길질했다.
다행히 내가 재빨리 피한 탓에 그의 발은 내 가슴이 아니라 팔만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예전에 내 뺨을 한 대 때렸을 때도 얼굴이 며칠이나 부어 있었는데 방금 발길질이 제대로 들어갔다면 몇 달은 누워 있어야 했을 거다.
강민지는 엉엉 울면서도 가식적으로 소석진을 말렸다.
“오빠, 화내지 마세요.”
눈물은 홍수가 지듯 줄줄 흘렀고 배를 꼭 움켜쥔 채 금방이라도 기절할 듯한 표정을 지으며 연기를 이어갔다.
소석진은 그런 그녀를 부둥켜안고 얼굴에 걷잡을 수 없는 걱정과 연민을 드러냈다.
그녀가 그럴수록 소석진은 더 나에게 화를 냈다.
그 눈빛은 마치 내가 그의 친딸이 아니라 원수라도 되는 듯, 그의 피를 마시고 살점을 뜯어먹은 듯했다.
나는 냉정하게 지켜봤지만 변명은 하지 않았다.
예상대로 소석진은 날 가만히 내버려두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경고했지? 민지 건드리지 말라고! 너 끝까지 나랑 맞서려는 거냐?”
그는 이를 갈며 말했다.
“오늘 너 혼 좀 내야겠다. 가만히 놔두면 오늘부터 난 네 아버지가 아니다!”
소석진은 강민지를 소파에 앉힌 뒤, 거실 탁자 위의 재떨이를 집어 나에게 던졌다.
물론 나도 맞을 생각이 없었기에 재빨리 피했고 그는 더 흥분해져 나에게 달려들며 뺨을 때렸다.
하지만 그 손이 떨어지기도 전에 도우미 한명 이 제복 입은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그들은 신고를 받고 왔다며 누군가 고의로 살인을 시도했다고 했다.
그 말에 나는 강민지를 한 번 흘겨봤다.
불과 15분 만에 제복 입은 사람들이 도착하다니?
그것도 한밤중에 이렇게 빠른 속도로?
생각할 것도 없이 이미 짜여진 판이었다.
강민지가 나를 감옥에 보낸다던 말은 바로 이런 계획이었던 거다.
소석진도 뜻밖이라는 듯 찌푸리며 물었다.
“누가 신고했지?”
나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훑었다.
‘정말 강민지 계획을 몰랐던 걸까?’
그러나 곧 생각을 바꿨다.
소석진은 늘 체면에 목숨 거는 가식 덩어리니 직접 신고하긴 싫었을 수도 있다.
어차피 우리 집 얘기는 이미 화림에서 유명한 가십거리가 됐지만 그래도 그는 겉으로는 화목한 가정을 연출해야 했다.
왜냐하면 장인 집에 들어와 살면서도 재산을 빼앗아 첩을 두고 사는 사람이란 소문은 치명적이었으니까.
이게 소석진이 엄마와 이혼하지 않았던 이유였다.
물론 더 중요한 건, 이혼하면 아무것도 못 가져가니까.
강민지가 도우미를 힐끗 보자 도우미는 얼른 말했다.
“서재에서 고함이 들려 무슨 일인가 싶어 신고했습니다.”
강민지는 겉으로만 꾸짖는 척했고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저 도우미는 강민지가 데려온 사람이니 두 사람이 도대체 무슨 수를 쓰려는 건지 두고 볼 참이었다.
곧 제복 입은 사람들은 신고가 들어온 이상, 상황을 확인할 권리가 있다며 강하게 나왔다.
강민지는 나를 몇 번 흘겨보더니 머뭇거리며 말했다.
“저희 그냥 장난친 거예요. 그...”
그러자 제복 입은 이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
“신고가 장난입니까?”
소석진은 서둘러 강민지를 감싸며 말했다.
“제 딸이 실수로 제 아내를 밀었는데 제 아내가 임신 중이라서...”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강민지가 배를 움켜쥐며 비명을 질렀다.
“악!”
강민지의 몸 아래로 피가 새어 나오는 것 같더니 이내 소석진의 품에서 몸부림쳤다.
그러자 제복 입은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주고받더니 곧바로 나한테 시선이 돌렸다.
이내 그들은 주저 없이 내 손에 수갑을 채우고 그대로 데려갔고 소석진은 말리지 않았다.
나가기 전, 나는 소명석과 강민지가 서로 눈을 주고받는 것을 보았다.
결국 그는 전부 알고 있었고 둘이 짜고 날 함정에 빠뜨린 거였다.
나는 속으로 비웃으며 제복 입은 사람들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어차피 소석진도 나를 해치려 한다면 나도 기꺼이 그에게 ‘친딸을 학대한 아버지’라는 이름을 덧씌워 줄 생각이었다.
...
도착하자마자 경찰들은 조사도 하지 않고 나를 바로 심문실에 가뒀고 곧 여러 여자가 들어와 나를 몰아붙였다.
강민지를 내가 직접 밀어 넘어뜨렸고 그녀 뱃속의 아이를 해치려 했다는 걸 인정하라며 동기는 내가 강민지의 아이가 소명석 재산을 빼앗을까 두려워서라는 거였다.
나는 당연히 인정할 수 없었다.
한 번이라도 인정하면 곧바로 감옥에 갈 것이 뻔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면 외할아버지가 남겨주신 주식은커녕 엄마가 유산도 지킬 수 없다.
난 생생하게 느껴지는 통증을 꾹 참고 말했다.
“아버지를 만나게 해주세요.”
“당신 아버지는 안 만나겠다고 합니다.”
나는 무심코 눈을 감았다.
얼마 후, 고개를 들었을 때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오려다 제지당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선두에 선 사람은 주성훈 같았다.
‘아저씨가 왜 여기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초여름 더위에도 그는 늘 그렇듯 정장을 입고 넥타이를 맨 모습이었다.
바닥에 엎드린 내 시야에서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신처럼 커 보였다.
곧 주성훈이 다가와 몸을 숙여 나를 안아 올렸다.
뒤에는 그의 보디가드들이 버티고 서 있었고 나는 그의 목에 조심스럽게 팔을 둘렀다.
지금 이 순간, 주성훈만이 내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왜 온 거지? 날 구하러 일부러 온 걸까?’
곧 나는 스스로 그 생각을 부정했다.
이건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주성훈이 내 동향을 실시간으로 주시하고 있지 않는 한 이렇게 제때 올 수 없다.
내가 아무 말도 안 하자 주성훈은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어디 다쳤어?”
여전히 침묵하는 나를 보던 그는 보디가드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 불러.”
곧 의사가 들어와 그를 ‘대표님’이라 부르며 인사했다.
주성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를 옆 벤치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의사가 다가와 내 상처를 살피고 약을 발랐고 나는 멍한 상태로 그 과정을 지켜봤다.
‘의사까지 불렀어? 이게 다 우연일까?’
치료가 끝난 뒤, 나는 짧게 감사 인사를 했다.
“고마워요.”
“이제 괜찮습니다.”
그 말은 내게 위로처럼 다가왔고 나는 비로소 이제 안전하다는 걸 알았다.
비록 방금 몽둥이질을 몇 번 당하긴 했지만 내 몸은 버틸 만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주성훈은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고 오히려 느긋하게 의자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다.
그가 버티고 있으니 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제복 입은 사람들은 눈치를 보며 벽 쪽에 줄지어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몇 분 후, 책임자로 보이는 인물이 급히 뛰어 들어왔다.
주성훈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담담히 물었다.
“무슨 일인지 설명 좀 해주시죠.”
허리를 잔뜩 굽힌 채로 땀을 뻘뻘 흘리는 중년의 뚱뚱한 남자가 헐떡이며 대답했다.
“제가 관리 감독을 제대로 못 했습니다. 반드시 대표님께 이해할 만한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