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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정신병 진단서

나는 천천히 시선을 거두었다. 차가 출발하자 주성훈의 모습이 점점 멀어졌다. 그런데도 나는 자꾸만 그가 탄 차를 다시 바라보게 됐다. 그는 이미 돌아서 차에 올라탔고 우리가 갈 곳은 서로 반대 방향이었다. 주성훈의 차는 어느새 골목 끝으로 사라졌다. 어쩐지 가벼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마음을 딴 데로 돌리기 위해 나는 조수석에 앉은 청년을 바라보며 미소 띤 얼굴로 말을 걸었다. “제가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청년은 바른 자세로 앉은 채, 정중히 대답했다. “전 주경민이라고 합니다. 그냥 경민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그의 피부는 살짝 구릿빛이고 표정은 굳어 있었으며 말투는 딱딱하고 진지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성이 주씨네. 어쩐지 아저씨가 경민이라고 부르던 말투도 꽤 다정했어. 아무래도 꽤 가까운 사람 같네.’ 그런 사람을 나를 따라붙게 했다는 건, 주성훈이 나를 상당히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나는 다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몇 살이에요? 전 스물둘이에요.” 그러자 주경민이 짧게 대답했다. “스물다섯입니다.” ‘나보다 세 살 많구나.’ “그럼 경민 오빠라고 불러도 되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는 대화가 그리 이어지지 않았다. 주경민은 원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고 나도 괜히 실수할까 조심스러워 입을 다물었다. 30분 후, 나는 집에 들러 짐을 챙겼다. 아침에 있었던 일이 경고가 되었는지 집안의 도우미들은 비교적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물론 난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이 집은 머지않아 내 손에 들어올 것이고 그때쯤이면 이 사람들은 하나도 남겨두지 않을 테니까. 짐을 챙긴 뒤, 주경민은 나를 공항까지 데려다줬다. 체크인을 마친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그를 향해 말했다. “저 이제 들어가야 해요.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주경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역시나 말이 없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번거롭겠지만 아저씨께 전해주세요. 정말 감사했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보답한다고요.” 이번엔 주경민이 입을 열었다. “그건 직접 셋째 도련님한테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도련님?’ 나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할게요.” 생각해 보니 주경민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고마운 마음은 직접 전해야 진심이 전달되니까. 나는 보안 검색대를 지나갔고 주경민도 공항을 떠났다. 비행기 탑승까지는 아직 1시간 정도 남아 있었기에 나는 대기실에 앉아 휴대폰으로 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임상의학 자료 몇 편을 확인하려는 목적으로. 그때, 기숙사 친구 고민아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우리 의대에서 유일한 여학생이었다. 기숙사도 여자 인원이 모자라 예대 소속이었던 고민아와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4년 동안, 수업이 없는 시간엔 거의 붙어 다녔고 그녀는 내 가장 친한 친구였다. 곧 수화기 너머로 고민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진아, 너 왜 자퇴했어?!” 나는 그 말을 듣고 순간 얼어붙었다. 자퇴? 나는 지금 당장 학교로 돌아가서 논문을 마무리해 양 선생님께 제출하려던 참이었는데 자퇴라니 이게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내가 아무 대답도 안 하자 고민아는 더욱 초조해졌다. “너 혹시 너희 엄마 일 아직 정리 못 해서 그런 거야? 그렇다고 자퇴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엄마 일은 나는 양 선생님과 고민아 말고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마저도 ‘엄마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고민만 늘어놓게 만들까 봐. 나는 혼란스러웠다. “나, 지금 학교로 돌아가려던 참이야. 자퇴라니? 나 그런 거 한 적 없어.” 그러자 고민아는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럼 진짜 이상하네. 아까 기숙사 사감 선생님이 나 자퇴해서 새 학생 들어온다고 하더라니까? 학교에서 왜 멋대로 너 자퇴시켜? 당장 담당 교수님한테 물어봐!” 나는 얼른 양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양 선생님의 첫마디는 어딘가 놀란 듯한 목소리였다. “은진아, 괜찮은 거니?” 나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선생님도 무슨 나쁜 소문이라도 들은 걸까?’ “교수님, 방금 기숙사 친구에게서 들었어요. 저 퇴학당했다는 게 사실이에요?” 나는 다급하게 물었다. 양 선생님의 목소리는 어디선가 혼란함과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 “너희 아버지가 학교에 사람을 보냈더구나. 너희 어머니 일 때문에 충격을 크게 받아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겼다면서 병원에서 받은 정신질환 진단서를 들고 와서는 네 퇴학 절차를 마쳤다고 했어.” 양 선생님은 한숨을 쉬며 조심스레 물었다. “은진아, 정말 괜찮은 거니?” 나는 핸드폰을 쥔 손이 저릿저릿 아파지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정신병 진단서?’ 소석진은 나를 미쳤다고 말하며 학교에서조차 없애려 한 것이다. 그야말로 기습 ‘공격’이었다. 그와 강민지가 왜 이런 짓을 꾸몄는지는 분명하다. 그건 바로 돈 때문이었다. 내가 정신질환자로 판정되면 소석진은 내 법적 보호자가 되어 내 명의로 된 모든 자산을 손쉽게 빼앗을 수 있다. 외할아버지가 남긴 유언장도 쓸모없는 종잇조각으로 전락할 테고 소석진은 다시금 외할아버지의 재산을 제멋대로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을 손에 넣게 되는 것이다. 믿기지 않았다. 소석진은 내 친아버지였다. 그런 사람이 나의 앞날을, 인생을, 내 존재 자체를 뿌리째 잘라버리려 하다니. 의대를 합격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내가 수많은 밤을 새우며 공부한 모든 것이 지금 한순간에 무너졌다. 이내 양 선생님이 말을 이어갔다. “나도 처음엔 수상하다 싶어서 직접 너한테 연락해 보려고 했는데 학교 고위 간부 쪽에서 이미 위에서 결정된 일이라며 더는 건드리지 말라는 식으로 말했어. 누가 손을 쓴 거 같더라.” 양 선생님은 말을 아꼈지만 나는 그 의미를 충분히 알아들었다. 소석진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나는 문득 주성훈이 해줬던 말을 떠올렸다. “네 아버지가 풀려날 수 있었던 건 심씨 가문이 보증을 서줬기 때문이야.” 이번에도 역시 심씨 가문 쪽에서 압력을 넣은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심씨 가문 사람들을 전혀 몰랐다. 대체 왜 그들이 소석진을 도와주는 건지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그보다 더 급한 건, 이 상황을 어떻게 돌파하느냐였다. 이제 와 학교에 돌아가도 학교 측에서 날 받아줄 리 없었다. 소석진과 강민지가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친 뒤였다. 나는 양 선생님께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이 멍했고 말을 꺼낼 힘조차 없었다. 전화를 끊은 나는 멍하니 몸을 일으켰다. 공항 대기실은 여전히 북적였다. 연인들이 웃고 떠들며 내 옆을 스쳐갔고 아이들이 내 캐리어를 장난감 삼아 뛰어다녔다. 그런데도 나는 얼음물에 빠진 듯 몸속 깊은 곳까지 싸늘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절대 쓰러져선 안 된다는 걸. 소석진과 강민지는 아직 죗값을 치르지 않았으니 내가 이렇게 무너질 순 없었다. 나는 억지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고 해결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더 뻔뻔하게 날 짓밟을 것이 뻔했다. 나는 곧장 택시를 타고 도시 동쪽에 있는 신세계 아파트로 향했다. 엄마가 생전에 몇 채의 부동산을 사두었는데 그중 한 곳이 이 바로 이곳이었다. 아직 새 아파트인 이곳은 작년 말에 리모델링만 마친 상태였다. 엄마는 6개월쯤 환기시킨 뒤, 집을 매물로 내놓으려고 했기에 지금까지도 비어 있었다. 이곳이 지금의 내 유일한 은신처였다. 짐을 놓고 나는 소파에 앉아 앞으로의 계획을 곰곰이 생각했다. 만약 소석진이 강제로 날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 한다면 그 순간 내 인생은 진짜 끝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고 도망쳐버리는 건 더 안 된다. 도망치는 건 패배를 인정하는 것일 뿐이니까. 하지만 이 순간 깨달았다. 나는 도무지 도움을 청할 사람조차 없다는 사실을. 단 한 사람, 주성훈을 빼고 말이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도 그가 날 구해준 참이었다. 지금 또다시 연락한다면 민폐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망설여졌다. 나는 깊이 숨을 들이켰다. 소석진과 강민지는 이미 석방되었을까? 만약 그들이 나를 덫에 걸기 위해 내가 스스로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면 어쩌지? 그럼 내가 다가가는 순간, 끝장일 수도 있다. 나는 소파에 앉아 깊은 고민에 빠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배가 너무 고파 쥐가 날 지경이었다. 어느덧 해가 완전히 지고 도시는 어둠과 함께 활기를 되찾았다. 나는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살짝 젖혔다. 화림의 밤은 유난히 화려했다. 네온사인이 반짝이고 거리에는 야시장이 줄지어 섰고 사람들은 맥주를 마시며 떠들고 웃었다. 누군가에겐 오늘도 따뜻한 하루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친아버지 손에 의해 벼랑 끝으로 몰렸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뭔가 먹으려고 나가려던 찰나, 문득 문 쪽에서 ‘찰칵’ 소리가 났다. 누군가 문을 열고 있는 것이다. 나는 불안함에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도둑인가?’ 신세계 아파트는 카드 키 없이는 층 진입 자체가 불가능한 곳이라 보통은 안전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고민 끝에 관리실에 연락할까 싶던 찰나,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문 앞에 서 있는 건 강민지였다. ‘벌써 출소한 거야?’ 그녀 뒤에는 덩치가 산만 한 건장한 남자들 열댓 명이 위협적으로 집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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