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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마지막 희망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조용히 말했다. “아저씨, 와주셨군요.” 주성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차에서 기다리고 있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서다가 문득 뭔가 떠올랐다. “집 안에 CCTV 있어요. 방금 저 두 사람이 한 짓, 전부 녹화됐을 거예요.” 그건 내가 일부러 남겨둔 증거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진작 반격했을 것이다. 주성훈은 나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짧게 말했다. “그래.” 그 말이 떨어지자 여자 보디가드 한 명이 나를 부축해 차로 데려갔다. 차 안에는 이미 의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큰 부상을 입은 건 아니었다. 뺨을 몇 대 맞은 정도였지만 의사는 매우 꼼꼼하게 나를 진찰하고 약도 발라주었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선아는 여전히 의식을 잃은 상태였고 강우빈은 경호원에게 제압당해 아까의 기세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차가 도착했다. 이번에는 뚱뚱한 국장이 직접 부하들을 이끌고 왔다. 주성훈이 뭔가 귀에 속삭이자 국장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굽실거렸다. 곧 이선아와 강우빈은 수갑이 채워진 채 경찰차에 실려 갔다. 그제야 주성훈이 내 쪽으로 걸어왔다. 마침 의사가 내 얼굴에 약을 다 바른 참이었다. 그는 몸을 숙여 차에 올라타고는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얼굴이 이렇게까지 심하게 부었어?” 내 양쪽 뺨은 부어오르고 약까지 발라져 있어 분명히 보기 흉했을 것이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주성훈에게 이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아 나는 고개를 조금 숙이며 말했다. “저 사실 일부러 맞은 거예요.” 그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곧 말없이 고개를 돌리며 담담히 말했다. “걱정 마. 저 모자는 최소 10년은 꼼짝 못 할 거야.” 나는 순간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주성훈을 바라봤다. 정말 10년이라면 내가 오늘 아침 당한 고통도 헛되지 않은 셈이다. 그는 덤덤하게 말했다. “고의적인 살인미수로 고소하면 돼. 내가 변호사단에 소송을 맡길 거야.” 나는 황급히 대답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그렇게 또 한 번, 주성훈에게 도움을 받았다. “가자. 경찰서에 진술하러 가야지.” 운전기사는 바로 시동을 걸었다. 그때 문득, 강우빈이 아직 만 16세가 안 된다는 것이 떠올랐다. 내 걱정 어린 말을 들은 주성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만 14세가 넘었으면 충분해.” 나는 잠시 멍해졌다가 곧 형법 내용을 떠올렸다. 고의적 살인미수의 경우 14세 이상이면 처벌이 가능하다는 조항이 있었다. ‘내가 괜히 걱정했구나.’ 역시 주성훈은 모든 걸 미리 계산하고 있는 것이 뻔했다. 나는 그를 힐끔 바라봤다. 조수석 옆에서 바라본 주성훈의 옆모습은 단단한 선을 지녔고 높은 콧대와 깊은 눈매가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나는 시선을 거두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아저씨, 오늘 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아저씨 아니었으면...” 주성훈은 나를 잠시 바라보다 말했다.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그의 시선이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순간,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 나는 일부러 반격하지 않고 자신을 위험에 빠뜨려 이 모자의 범죄 증거를 확보한 것이었다. 내가 제도에서 몇 년 동안 격투기를 배운 건 헛되지 않았었다. 그러니 강우빈과 이선아 정도는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저 이선아가 문을 박차고 들어올 그 순간, 주성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가 이렇게 빨리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직접 연락했기 때문이다. 주성훈이 예전에 내게 줬던 검은색 금장 카드는 무심코 지갑에 넣어 두었지만 그의 번호는 내 휴대폰 첫 번째 연락처이자 비상 연락처로 저장해뒀다. 이선아가 나를 폭행한 장면, 강우빈이 몇 번이나 칼로 나를 찌르려 한 장면 전부 감시카메라에 찍혀 있었다. 그들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젠 발뺌할 수 없다. 난 주성훈에게 격투기를 배운 적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한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내가 강우빈 모자를 상대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혹시 이미 나에 대해 조사했었던 건 아닐까?’ 주씨 가문의 권력, 그리고 그의 능력을 생각하면 내 정보를 알아내는 건 일도 아닐 테니까. 경찰서에 도착했을 때, 이선아는 이미 의식을 되찾은 상태였고 경찰들과 거칠게 언성을 높이며 억울하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공격 대상을 나로 돌리며 소리쳤다. “너 당장 우리 풀어달라고 해! 안 그러면 우리 사위 오면 너 진짜 끝장이야!” 경찰서 안에서도 저렇게 떠들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한 배짱이다. 나는 옆에 서 있던 뚱뚱한 국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여자, 저 지금 협박하는 거 들으셨죠? 바로 고소할 수 있나요?” 국장은 즉시 부하에게 소리쳤다. “전부 기록해! 지금 이 말 다 증거니까!” 그러고는 황급히 내 옆에 서 있는 주성훈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주성훈의 표정은 무덤덤했고 감정이 전혀 읽히지 않았다. 이선아는 경찰을 살짝 두려워하는 눈치였지만 끝까지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몰라! 우리 딸하고 사위 데려와! 변호사도 부를 거야!” 하지만 소석진과 강민지는 아직 구치소에 구금 중이었다. 그녀의 소리는 허공에 메아리칠 뿐이었다. 결국 이선아도 조용히 진술서를 작성하게 되었다. 반면 강우빈은 내내 끔찍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지금이라도 나를 찢어 죽일 것처럼. 그러나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CCTV가 찍은 영상은 그들의 범죄를 낱낱이 증명하고 있었다. 게다가 주성훈의 변호사팀까지 개입한 이상 강우빈은 분명 처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선아를 내가 밀쳐 쓰러뜨린 일 역시 정당방위였다. 그 역시 변호사들이 잘 정리해 줄 것이다. 진술을 마친 후, 국장은 조심스럽게 주성훈에게 말했다. “이번 사건 제가 책임지고 처리하겠습니다.” 주성훈은 그를 흘끗 보며 말했다. “공적으로 처리하십시오.” 그러자 국장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고 무언가 계산하고 있는 듯했다. 주성훈은 한마디 덧붙였다. “변호사들이 끝까지 지켜볼 겁니다.” 그러자 국장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적으로 협조하겠습니다!” 주성훈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곧 나를 향해 말했다. “가자.” “네.” 나는 얌전히 대답하며 주성훈의 뒤를 따라 경찰서를 나섰다. 밖은 이미 햇살이 쨍쨍 내리쬐고 있었고 따스하고 눈 부신 빛이 대지를 가득 덮고 있었다. 주성훈은 앞서 걷고 있었고 그의 등은 햇살에 감싸여 더욱 크고 단단해 보였다. 그 순간 나는 잠시 멍해졌다. 불과 며칠 사이 나는 두 번이나 경찰서를 오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두 번 모두 주성훈이 나를 구해줬다. 이 세상에서 내 유일한 혈육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런 내 삶에 들어온 주성훈은 어느새 나의 마지막 희망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주성훈이 이 모든 걸 하는 건, 그저 엄마 때문이라는 걸. 나란 존재는 그에게 단지 오래전 지인의 딸일 뿐이다. 내가 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순간, 주성훈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난 이제 가봐야 해.” 나는 황급히 대답했다. “네. 바쁘신데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잠시 망설인 듯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아버지, 지금 제도의 심씨 가문이 보석 보증인으로 들어갔다. 아마 며칠 안에 나올 거야.” 나는 예상치 못한 말에 깜짝 놀랐다. 소석진이 어떻게 심씨 가문 사람을 끌어들인 거지? 심씨 가문은 비록 주씨 가문만큼은 아니지만 제도 내에서도 오래된 명문가로 꽤 영향력이 있는 집안이다. 게다가 그 집안의 주인은 매우 올곧고 원칙적인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그런 인물이 어떻게 소석진의 보석을 보증해 준단 말인가? 그때, 주성훈이 조용히 말했다. “네가 말했잖아. 직접 복수하겠다고. 그래서 나도 막지 않았어.”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 정말 감사해요.” 사실 소석진과 강민지가 곧 풀려날 거라는 건 나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이 직접 나를 해친 건 아니었으니까 며칠 구류 정도면 충분했을 것이다. 나는 다시 주성훈을 바라보았다. 이른 아침부터 이렇게 발 벋고 도와주고 내게 일일이 설명까지 해준 그의 배려에 감사하면서도 가슴 어딘가가 묘하게 뭉클했다. 곧 주성훈이 말했다. “가자. 네가 제도로 돌아갈 때까지 사람을 붙일 거야.” 나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여기서도 이미 너무 많은 도움 받았어요.” 하지만 그는 내 말을 듣지 않았고 뒤에 서 있던 건장한 청년을 향해 말했다. “이 사람, 잘 보호해.” 청년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나는 다시 말리려 했지만 주성훈이 말을 이었다. “얘도 너랑 같이 집으로 가서 짐 정리할 거야.” 소씨 저택에 있는 도우미들은 모두 강민지의 사람이었다. 나 역시 그곳에 가는 게 조금 꺼림칙했기에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는 주성훈에게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는 손짓으로 청년에게 나를 차에 태우라는 신호를 보냈다. 차창 너머로 햇살 아래 서 있는 주성훈의 모습이 보였다. 긴 팔다리, 정제된 수트 핏과 또렷한 이목구비 위로 한 줄기 빛이 그를 감싸는 듯했다. 그 순간, 주성훈은 마치 내 삶에 내리쬔 유일한 빛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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