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온채하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별장에 도착했을 때, 안에서는 이미 파티가 무르익고 있었다. 정문에 서 있던 이는 그녀가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듯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온채하 씨, 여기는 어떻게 오셨어요? 다들 벌써 식사까지 마쳤는데...”
남편의 생일 파티인데도 서류상 아내인 온채하가 빠졌다. 업계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누구 하나 알려준 사람이 없었다.
온채하는 경비원에게 옅은 미소를 보이고 막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안에서 흘러나오는 대화를 들었다.
“여울 씨, 이번에는 무슨 선물 준비했어요? 승호 형이 아까부터 그 선물 가방만 바라보면서 얼마나 기대했는데요.”
“내가 그랬어?”
“그럼요. 거의 가방에 구멍이 뚫리겠더라니까요. 여울 씨가 귀국한 김에 온채하랑은 빨리 이혼해요. 안 그래도 다들 불편해하고 있었어요.”
“맞아요. 어차피 그 여자는 약을 먹여서 형 침대에 오른 거잖아요. 형이 그때 마음 약해져서 지켜주지만 않았어도, 그 여자는 이미 소문 싹 퍼지고 사회적으로 매장됐을 거예요.”
홀 중앙, 남자는 반듯한 슈트를 입고 셔츠 단추 두 개를 풀어 놓았다. 날카로운 뼈대와 깊은 이목구비, 높은 콧대와 얇은 입술은 화려한 독나비처럼 선명했다. 살짝 치켜 올라간 길고 가느다란 눈꼬리는 근접 불가의 냉담한 오만을 풍겼다.
“서두를 필요 없어.”
“형, 벌써 3년이나 지났어요. 그 여자 때문에 여울 씨 친언니가 식물인간 된 거 잊었어요? 할머니가 나서서 감싸지만 않았어도, 그 여자는 우리 손에 죽었어요.”
배승호는 길고 고운 손가락으로 라이터를 빙글거리다 문가의 그림자를 곁눈질로 확인했다. 그제야 모두 온채하가 어느새 문 앞에 서 있었던 걸 알아챘다.
“누가 부른 거야?”
누군가 낮게 물었지만 현장은 조용했다. 그녀가 멋대로 찾아왔다는 뜻이었다.
온채하는 속눈썹을 살짝 내리깔았다. 고요하고 서늘한 얼굴, 손바닥만 한 달걀형 얼굴에 연한 캐시미어 스웨터를 입고, 앞머리를 부드럽게 귀 뒤로 넘겼다.
이 모습만 보면 그런 뻔뻔한 짓을 할 거라 생각할 사람은 없겠지만, 지난 일은 분명히 그녀가 저질렀다.
온채하는 선물 상자를 들고 홀 중앙의 배승호를 바라보았다. 가슴 한복판이 철사로 죄어 오는 듯 아팠다.
온채하가 배승호의 곁으로 천천히 걸어갈 때, 그는 아직 받지도 않은 선물을 바라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무심히 비웃었다.
“누가 오라고 했어?”
주변에서 터져 나온 웃음소리가 그녀의 자존심을 산산이 부쉈다. 그러자 배승호의 곁에 앉아 있던 진여울이 그를 째려보다 온채하를 끌어 앉혔다.
“그래도 네 아내인데 당연히 선물 주러 와야지. 채하야, 얼른 앉아. 승호 성격이 원래 좀 그래. 네가 이해해 줘.”
온채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아내인 자신이 전 약혼자의 중재로 겨우 자리를 얻은 꼴이니 말이다. 누구 하나 그녀를 반겨 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왔다. 18살 때 그는 28번째 생일을 함께 보내자고 약속했으니까.
온채하는 바로 배승호의 옆으로 가 진여울을 밀어냈다. 진여울의 얼굴이 잠시 굳더니 곧 물었다.
“오빠한테 무슨 선물 준비했어?”
호기심 많은 누군가 포장을 열었다. 손뜨개 머플러, 라벨도 없는 수제품이었다.
진여울이 웃음을 터뜨렸다.
“와, 우리 통했네. 나도 머플러 준비했거든.”
두 머플러가 나란히 놓였다. 둘 다 손뜨개라 솜씨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그때 누군가 테이블을 건드리며 열린 와인병이 넘어졌고, 술이 두 머플러로 흘러갔다.
배승호는 재빨리 한쪽을 집어 들었다. 다른 한쪽은 술에 흠뻑 젖어 알코올 냄새가 진동했다. 그가 든 건 진여울의 것이었다.
두 달이나 걸려 짠 머플러가 술에 잠기는 걸 보며 온채하의 얼굴이 순간 새하얘졌다. 심장이 먹먹하고도 저릿했다.
진여울이 한숨을 쉬며 온채하와 팔짱을 끼고 달랬다.
“채하야, 너 화난 거 아니지? 괜찮아, 이거 집에 가서 빨면 쓸 수 있어.”
온채하는 대꾸하지 않고 배승호를 바라봤다. 그는 속눈썹을 내려 눈빛을 감췄다.
현장 분위기가 미묘하게 변했다. 온채하가 전염병이라도 달고 온 듯, 사람들은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탁자 위에 버려진 머플러를 바라봤다. 마치 자신을 보는 것처럼...
사람들이 다 나가고, 그녀는 떠나려는 배승호를 불러 세웠다.
“배승호, 생일 축하해.”
배승호는 못 들은 척했다. 주변에 둘러선 이들은 모두 그의 업계 친구들이었다.
그는 21살 때 배씨 가문에 돌아왔고, 그때는 이미 자수성가한 신흥 재벌이 되어 있었다. 그의 곁에 있던 건 19살의 온채하였다.
7년이 지나 신흥 재벌은 권력의 중심에 있는 거물이 됐지만, 두 사람 사이의 정은 이미 사라진 다음이었다. 함께 버텼던 무명 시절이 마치 전생과 같이 멀게 느껴졌다.
배승호는 부하 직원에게 진여울을 집에 바래다주라고 했다. 진여울은 그의 어깨를 톡 건드리며 속삭였다.
“둘이 얘기 잘해. 또 싸우지 말고.”
누군가 웃음을 흘렸다.
“여울 씨는 너무 착해서 탈이에요.”
“제가 착한 게 아니라, 그때는 채하도 철이 없었잖아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예요.”
“그럴 리가요. 남 인생 망쳐 놓고 뻔뻔하게 여울 씨 자리까지 빼앗아 갔는데, 무슨 낯으로 여기까지 왔대요.”
불쾌한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온채하는 핏기 없는 얼굴로 앉아 있었다. 몸속 모든 피가 식어 가는 듯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젖은 머플러를 움켜쥐고 배승호를 바라봤다.
“배승호.”
힘이 빠진 목소리는 여린 기운을 타고 흘렀다.
배승호는 재킷을 팔에 걸친 채 넥타이를 느슨히 풀었다. 그녀는 보지도 않고 성가신 듯 미간을 찌푸렸다.
“또 뭐 하려고?”
온채하는 미소를 지었다.
“우리 이혼하자, 배승호.”
배승호의 눈에 놀라움이 스치고 금세 싸늘한 음영이 내려앉았다.
“새로운 수작이야? 약 먹이고 나를 침대로 끌어들일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고상한 척 이혼? 온채하, 너 이러는 거 피곤하지도 않아?
“미안해. 3년이나 괴로웠을 거야. 하지만 이번에는 진심이야.”
배승호의 눈가에 서린 냉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는 그녀를 확 끌어당겨 턱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녀가 아파 얼굴을 찡그리자 그제야 답답함이 조금 풀린 듯했다.
“이제 와서? 지난 3년 동안은 뭐하고 이제야 이혼이 하고 싶어졌어? 좋아, 이혼하겠다 이거지. 위자료는 한 푼도 받을 생각하지 마.”
“알아서 빈손으로 나갈게.”
그녀의 눈동자는 맑았고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다.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듯 말이다.
배승호가 배씨 가문으로 돌아온 뒤, 그의 곁에 있던 온채하는 배씨 가문의 양녀로 받아들여졌다.
사람들은 모두 알았다. 배씨 가문에서 어렵사리 찾은 둘째 아들이 평범한 여자와 결혼하는 걸 원치 않아, 차라리 양녀 신분을 주며 입막음했다는 걸 말이다.
배승호는 그녀의 서늘한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돌아섰다.
“좋아. 빈손으로 나가. 그 선택 후회하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