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밖에서는 언제부터인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산 중턱에 자리한 별장은 교외에 있어서 택시를 잡기 힘들었다.
다른 이들은 이미 차를 몰아 떠났고, 온채하는 택시로 왔기에 마지막으로 대문 앞에 남아 빗줄기를 바라봤다.
검은 롤스로이스가 빗속을 가르며 다가와 그녀의 앞에 멈췄다. 창문이 내려가자 배승호의 비서 성시현이 얼굴을 내밀었다.
“사모님, 타세요.”
온채하는 그대로 서 있었다. 창문 틈 너머 뒤쪽 좌석에 누가 있는지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차 안에서 배승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냥 출발해. 저 여자는 알아서 진정하게 내버려둬.”
성시현은 난처한 표정을 숨긴 채 온채하에게는 눈길 한 번 더 주지 않고 차를 몰아 사라졌다. 차가 멀어지자 차가운 빗방울이 바람에 실려 얼굴을 스쳤고, 한기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18살의 배승호는 28번째 생일을 그녀와 함께 보내고 싶어 했지만, 28살의 그는 그녀를 지독히 미워했다.
지난 3년 동안 그는 한 번도 그녀에게 손을 대지 않았고, 집에도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말했다, 그녀는 재벌가 며느리 중 가장 불쌍한 여자라고. 화려한 새장만 남은 채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 눈에 그녀는 진아린을 식물인간으로 만들고 진여울의 약혼자를 빼앗은 악녀,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12살부터 19살까지, 가장 밑바닥에 있던 그가 빛을 내기까지 그녀가 곁을 지켰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람들은 배씨 가문이 그녀에게 양녀 신분을 주었는데도 만족하지 못하고, 7년의 동행을 핑계 삼아 평생 배승호를 옭아매려 한다고 비웃었다.
또다시 7년이 흘러, 그녀가 그의 곁에 있었던 시간은 어느새 14년이 되었다.
온채하는 앱 화면을 내려다봤지만 여전히 택시는 잡히지 않았다.
운성 빌리지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 2시. 치맛자락은 흠뻑 젖어 발목에 달라붙었고, 늦가을 공기에 입술까지 파르르 떨렸다.
현관 불은 아직 켜져 있었다. 신발을 갈아 신다가 눈길을 들자, 거실 소파에서 서류를 검토 중인 배승호가 보였다.
뚜렷한 이목구비는 아무리 봐도 감탄을 자아냈고, 분위기는 손 닿을 수 없는 설산처럼 위태롭게 빛났다.
온채하는 그가 자신을 기다렸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3년 전 두 사람은 완전히 등을 돌렸다. 그녀도 더 이상 소녀가 아닌 거울 속의 낯선 자신을 바라보며 지난 세월을 되돌릴 수 없음을 깨달았다.
온채하는 술에 젖은 머플러를 현관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안방에는 그녀의 물건이 많았지만 말끔히 정돈되어 있었다. 배승호가 집에 들른 횟수가 손에 꼽히니, 사람들은 그녀를 과부라며 비웃었다.
온채하는 작은 캐리어에 자주 입는 옷만 몇 벌 챙겼다. 벽면을 가득 채운 명품 가방과 보석 상자는 손도 대지 않았다. 배승호가 그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배승호는 온채하를 돈만 밝히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벽면 한가득 채운 명품을 만지지도 못하게 하는 건 일종의 고문이었다.
온채하는 캐리어를 끌고 내려와 서명해 둔 이혼합의서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나는 이미 사인했어.”
지난 3년 동안 두 사람은 얼굴만 맞대면 싸웠다. 사실 그녀가 일방적으로 무심함을 원망하며 난리를 쳤고, 그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지켜봤다.
배승호의 시선이 노트북에서 캐리어로 옮겨졌다. 순간 목구멍이 유황을 삼킨 듯 뜨겁게 타오르는 듯했다.
그가 냉소를 흘렸다. 말투에는 칼끝 같은 조롱이 허공을 베었다.
“짐이 고작 이거밖에 없어? 나중에 또 들러서 조금씩 챙길 생각이지? 온채하, 네가 어떻게 이 자리에 앉았는지 잊었어? 나랑 여울이 약혼식 날에 약을 먹여서 같이 잤던 것만 아니었어도 나는 너랑 결혼 안 했어.”
“미안해, 내 잘못이야.”
그녀는 캐리어 손잡이를 힘껏 쥐었다. 치맛단은 젖어 있고 몸도 휘청거렸다. 손끝이 하얘질 때까지 버티다 겨우 묻듯 말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나를 안 사랑하게 된 거야?”
이는 온채하가 지난 3년 동안 수도 없이 생각했던 문제였다.
좁은 월세방에서 서로 껴안고 웅크려 있던 시절, 그는 평생 온채하만 사랑하겠다고 했다. 배씨 가문으로 돌아간 뒤 누군가는 그녀에게 말했다. 적당히 돈 받고 떠나라, 그 집안은 너 같은 며느리를 받아주지 않을 거라고 말이다.
그녀는 듣지 않았다. 배승호의 약속을 믿으며 그가 멋지게 자신을 맞이하기를 기다렸지만, 돌아온 건 그와 진여울의 약혼 소식,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통보였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그녀는 항상 궁금했다.
“네가 그 정도 수준이 안되니까.”
배승호의 말은 망치처럼 머리를 후려쳤다. 심장은 구멍이 숭숭 뚫린 듯 피가 줄줄 새는 느낌이었다.
사랑할 때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여자라더니, 사랑이 식하자 수준이 안된다고 했다.
천한 신분으로 재벌 2세들 앞에서 사랑을 지키려고 했던 온채하는 그들의 눈에 우스운 광대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자신을 기사라 여겼고, 그의 약혼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믿었다.
3년 동안 스스로를 속였으니, 이제는 깨어날 때도 되었다. 온채하는 캐리어를 끌고 현관으로 향하며 말했다.
“거기 사인하고, 내일 점심 법원 앞에서 보자.”
말은 마친 온채하는 신발을 갈아신고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 그동안 폐 많이 끼쳤어.”
배승호는 손에 쥔 서류를 찢어버릴 듯 움켜쥐다가 힘없이 놓았다.
“그래, 드디어 해방이네.”
온채하는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저렸다. 끝까지 웃고 싶었지만 도무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문을 열고 나왔다. 문 앞에 서 있던 성시현이 난처한 얼굴로 다가왔다.
“사모님, 대표님이 오늘 일부러 연락을 드리지 않은 건 아닙니다. 대표님이...”
온채하는 말없이 캐리어를 끌고 빗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곳에는 단 1초도 더 남아 있고 싶지 않았다.
몇 걸음 앞으로 내디딘 뒤, 그녀는 휙 돌아서며 문가에 서 있는 성시현에게 물었다.
“배승호가 송원 별채에 둔 사람 누구예요? 알려 줄 수 있어요?”
성시현은 화들짝 놀라더니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녀가 송원 별채를 어떻게 아냐는 반응이었다.
“3년 전부터 거기에 사람이 있었죠?”
“사모님, 죄송합니다. 저는 잘 모릅니다.”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성시현은 배승호가 가장 믿는 사람이니까.
온채하는 빗물을 손등으로 훔치고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말하기 싫으면 그만두세요.”
“사모님...”
온채하는 이미 빗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18살, 그녀는 첫사랑을 그에게 주며 미래를 꿈꿨다.
그리고 26살,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났다. 그를 포기하는 건 살점을 도려내는 일과 같았지만... 이제 더 이상 시달리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