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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김연주는 겨우 숨을 돌리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피곤하구나. 나 한 달은 여기 눌러앉아 있을 테니 별짓 말고 조용히 지내.” 배승호는 알겠다고 짤막이 대답한 뒤 성시현에게 전화를 돌려 말을 잘 듣는 도우미 몇 명을 그날 밤 바로 불러들였다. 배승호가 침실 앞에 섰을 때, 임재준이 안에서 나오는 중이었다. 임재준의 직업은 의사로 성격은 다른 친구들에 비해 부드러운 편이었다. “나는 먼저 간다. 채하 씨 몸은 시간이 좀 걸려야 회복돼. 조만간 병원 와서 정밀검사 한번 해.” “응.” 임재준은 더 말을 잇고 싶었지만, 배승호의 기색이 좋지 않아 그대로 떠났다. 배승호는 문손잡이에 손끝을 얹고 몇 초나 망설이다가 조용히 문을 밀어 열었다. 희미한 조명 아래 온채하는 눈을 감고 누워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순한 얼굴이었다. 그는 침대 곁으로 가지 않고 두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한참을 바라봤다. 불에 덴 듯 상기된 볼, 꿈결에 살짝 떨리는 속눈썹... 끔찍한 악몽이라도 꾸는 듯했다. 배승호는 반 시간 가까이 서 있고 나서야 등을 돌려 조명을 껐고, 그날 밤은 침대가 아닌 창가 소파에서 밤을 보냈다. 온채하는 꿈속에서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목말라... 승호야, 나 물 좀...” 희미한 중얼임이 끝나자 누군가 차가운 물을 입에 부어 주었다. 화끈거리던 속이 조금 가라앉자 그녀는 안도한 듯 숨을 내쉬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반사적으로 옆자리를 확인했지만 침구는 평평했다. 3년 동안 이미 익숙해진 행동이었다. 협탁에는 빈 컵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시계를 보니 여섯 시 반이 다 됐다. ‘대표님 픽업 시간 늦겠는데.’ 온채하는 서둘러 씻고 내려가다 거실에서 신문을 읽고 있는 김연주를 마주쳤다. “할머니, 아직 안 가셨어요?” 김연주는 잠자리에 예민해서 밖에서 밤을 보내는 것을 그다지 즐기지 않았다. 그러니 아직도 이곳에 있는 게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말에 김연주는 가슴을 쥐며 화를 냈다. “내가 어제 얼마나 놀란 줄 알아? 채하야, 너 어제 집에 오자마자 기절했어. 이제 몸 좀 챙겨, 오늘 아침은 꼭 든든히 먹어.” “죄송해요, 할머니. 저 출근해야 해요. 이미 늦었어요.” “어느 회사야? 승호 시켜서 사장한테 전화 넣어 휴가 내.” 온채하는 시선을 떨구며 현관으로 향했다. “괜찮아요, 대표님이 저한테 잘해 주세요.” “채하야! 너 아침도 안 먹고...!” 김연주는 배승호를 째려봤다. “왜 가만히 있어? 애를 데려다주기라도 해야 할 거 아니니!” 온채하는 이미 구두를 신고 있었다. 표정은 얌전했지만 배승호 쪽은 쳐다보지 않았다. “정말 괜찮아요, 할머니. 대표님 차를 몰고 가서 대표님을 모셔야 해요.” 김연주는 초조해졌다. 몸도 약한데 아침도 안 먹고 쓰러지면 어쩌나 싶었다. 그녀는 옆에 있는 배승호를 거의 걷어차다시피 차며 말했다. “어디서 일하는지 알아봐! 세상 물정 모르면 당하고 다닐 거 아니야. 예전에는 애가 그렇게 잘 웃었는데 요새는 영 우울해 보여. 혹시 누가 괴롭히는 거 아닐지 걱정돼 죽겠어.” 주변 모두가 온채하가 웃지 않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배승호는 알 수 없는 짜증이 올라와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나 오늘 검사 한 번 받아 보세요. 어쩌면 제가 아니라 채하가 친손주일지도 모르잖아요.” 김연주는 또 가슴을 부여잡았다. “이 입 좀 봐라. 네가 이러는데 채하가 웃음이 나오겠니?” 배승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침도 거부했다. “네, 다 제 잘못이죠. 제가 채하를 억지로 굶겼어요. 집에 쌓인 명품, 매달 새로 들여오는 옷과 가방, 수십억짜리 보석까지... 저는 한 번도 아껴 본 적 없어요. 그런데도 도우미 둘을 못 부린 건 채하 능력 부족일 뿐이에요.” 그는 소매를 정리하며 상다리가 휘는 아침상을 힐끗 보았다. “할머니는 식사하세요. 저는 회사 갑니다.” 김연주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오늘 밤에는 온채하의 본심을 꼭 들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차에 오른 배승호는 안쪽에 몸을 파묻었다. 눈 밑에는 어둡게 다크서클이 드리워 있었다. 성시현이 엑셀을 밟으며 속으로 밤새 한숨도 못 잔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잠시 눈을 감고 있던 배승호가 입을 열었다. “송원 별채 연못 다시 손보게 해. 지금 연못 마음에 안 든대.” “알겠습니다, 대표님.” “별채 쪽 요구 사항은 전부 맞춰. 내가 전화 안 받아도 바로 진행해.” 그는 가끔 일 때문에 신호가 안 잡히는 곳에도 가기 때문에 미리 언질을 둬야 했다. “네, 잠시 후 시공팀 보내겠습니다.” 배승호는 고개만 끄덕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온채하가 조재우의 자택 앞에 도착했을 때는 약속 시간에서 20분 늦은 6시 50분이었다. 넥타이까지 갖춘 조재우는 짜증을 드러냈다. “늦으면 늦는다고 연락해야지. 오늘 해외 미팅이라도 있었으면 책임질 수 있어?” “죄송합니다, 대표님.” 조재우는 짜증이 밀려왔지만 어젯밤 계약이 떠올랐는지 그냥 투덜거리며 차에 올랐다. “다음에는 봐주는 거 없어. 네 자리는 대타 천지야.” 온채하는 차를 뒤로 빼려다가 저택 안에서 걸어 나오는 여자를 보고 조용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조재우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그 여자는 온채하를 보자마자 표정이 싹 변했다. “조재우, 저 여자 뭐야?” “새로 뽑은 내 비서야.” 여자는 비웃음이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이렇게 젊고 예쁜 애를 뽑아 놓고, 이제는 연기도 안 하겠다는 거네?”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리던 여자는 성큼 다가와 열린 창문 틈으로 온채하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으려고 했다. “망할 년! 당장 내려!” 온채하는 고개를 재빨리 돌려 피해 낸 뒤, 뒤쪽 조재우에게 조용히 물었다. “대표님, 바로 출발할까요?” 조재우의 얼굴에 짜증 기가 스쳤다. “출발해.” 온채하는 차를 후진시켜 방향을 틀고 그대로 주택을 빠져나왔다. 룸미러 속에서 여자는 머리카락을 쥐고 길 한복판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온채하는 더 묻지 않았다. 회사에 도착한 뒤 그녀가 맡은 일은 서류 정리뿐이었다. 별다른 기술을 배울 수 없었고, 남은 업무라고는 조재우의 술자리에 동행하는 것뿐이었다. 점심 무렵, 조재우가 두툼한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온 비서, 이 서류 배성 그룹에 좀 전해줘. 예전에 같이 일하던 친구 둘도 이번 투자에 참여해서 사인받아야 해.” “알겠습니다, 대표님.” 온채하는 서류를 챙겨 배성 그룹 본사로 향했다. 처음 오는 곳이라 1층 안내 데스크에서 해당 임원이 있는 층을 물었다. 접수 직원은 눈썹을 찌푸렸다. “먼저 장 대표님께 전화로 예약해 주시겠어요? 최상층은 전용 카드가 있어야 엘리베이터가 작동합니다. 허가 없이는 제가 카드 승인을 눌러 드릴 수 없어요.” 온채하가 뭔가 말하려던 바로 그때, 회전문을 밀고 진여울이 들어왔다. 그녀는 반가운 듯 다가오며 손을 흔들었다. “온채하? 너 승호 보러 왔어?” 온채하가 최상층 출입 권한이 없다는 걸 알아챘는지 진여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접수 직원이 바로 물었다. “진여울 씨, 이분을 아세요?” “알긴 아는데 별로 친하지는 않아요. 그럼 저는 승호 만나러 위로 올라갈게요.” “네, 진여울 씨. 좋은 하루 보내세요.” 진여울은 가볍게 웃으며 카드를 꺼내 1층 게이트를 통과하고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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