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결국 마지막까지 곁에 남아 준 건 부모님뿐이었다.
“우리랑 같이 원주로 돌아가자.”
그 걱정어린 말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맥없이 소파에 앉아 있다가 고개를 들자, 체념 속에서도 어딘가 기대를 품고 있는 부모님의 눈빛과 마주쳤다.
부모님은 원주에서 가장 큰 법무법인을 운영하고 계셨고 내가 법조인의 길을 택한 것도 부모님의 영향이 컸다.
대학원을 마친 뒤 부모님께서 운영하시는 법무법인에서 경력을 쌓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지만 석사 과정에서 송연석을 만나면서 나는 모든 계획을 바꾸고 그를 따라 서원시로 내려왔다.
그는 늘 자신이 시골 출신이라는 사실에 자격지심을 느꼈고, 집안 배경 같은 이야기에 유독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래서 나는 그와 함께한 지난 5년 동안 단 한 번도 내 출신을 밝힌 적이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도 나를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은 시골 출신의 평범한 변호사라고 믿고 있었다.
5년 사이, 초짜에 불과하던 나도 어느새 이름을 알리는 변호사로 성장했다.
그와 나는 3년 연속으로 법률사무소 내에서 에이스로 꼽혔고 동료들은 그런 우리를 ‘에이스 부부’라 부르며 부러워하곤 했다.
함께한 삶은 점점 안정돼 갔고 이제쯤은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지만, 끝내 그럴 기회는 오지 않았다.
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와서 뭐 하러 말하겠어...’
“그렇게 할게요. 정리하고 원주로 돌아갈게요.”
그 말에 부모님은 두 손을 꼭 잡은 채, 안도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잘 생각했어. 우리 딸, 엄마 아빠가 바로 비행기표 예매할게. 이젠 더 이상 여기서 마음고생 안 해도 돼.”
부모님을 호텔에 모셔다드린 뒤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언제나 그랬듯 이 집은 싸늘한 적막만이 고여 있었다.
대충 라면 한 그릇을 끓여 먹고 SNS를 켰다가 고유미가 올린 최신 게시물을 보게 됐다.
사진 속 그녀는 몸에 딱 붙는 운동복 차림으로 송연석과 함께 다정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결혼식에서 납치한 선배와 같이 달밤에 운동. 집밥으로 회유 하니 금세 풀림.]
그 글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헛구역질이 나왔다.
‘오늘 밤도 집에 들어오지 않겠지...’
그제야 문득 지금껏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더 이상 참고 견딜 이유가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짐을 챙겨 들고 대표 사무실에 찾아가 사직서를 제출했다.
성과가 좋았던 터라 법률사무소 대표는 계속 붙잡았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송연석이 서류를 들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다 그를 본 순간 나는 그가 목덜미에 선명하게 남은 키스 마크를 발견했다.
게다가 그에게서 싱그러운 복숭아 향이 은은하게 풍기는 것을 보니 어젯밤 불타는 사랑을 나눈 것이 분명했다.
예전의 그는 사랑을 나눌 때마다 다음날 출근에 지장이 생긴다며 몸에 흔적을 남기지 말라고 당부하곤 했다.
그래서 나는 감정이 치밀어 오를 때도 자꾸만 조심스러워졌고, 그 시간이 끝나면 남는 건 구겨진 이불자락뿐이었다.
‘키스 마크가 싫은 게 아니라... 내가 싫었던 거겠지.’
그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대표님이 깊은 한숨부터 내쉬며 말을 꺼냈다.
“연석 씨, 마침 잘 왔어요. 여자친구 좀 말려봐요. 갑자기 사직서 내겠다고 난리라니까요? 혹시 둘이 싸운 거예요?”
“그런 거 아닙니다. 별개의 문제예요.”
내가 먼저 잘라 말했다.
“정말로 그만두겠다는 거예요?”
대표님의 목소리와 함께 그의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그는 입술을 앙다물고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역시... 어제 내가 결혼식을 취소한 것 때문에 시위하는 거야?”
대표님은 나와 송연석 사이에 흐르는 기류를 느꼈는지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문이 닫히는 순간, 그는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와 몰아세우듯 말했다.
“어제 분명히 말했잖아. 유미 씨가 다리를 다쳐서 어쩔 수 없었다고. 이렇게까지 속 좁게 굴어야겠어?”
나는 되도록 담담한 척하며 고개를 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사직서를 낸 건 안식년을 갖고 싶어서야. 요즘 많이 지쳤거든.”
그는 팔짱을 낀 채, 미간을 찌푸리며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쉬고 싶으면 연차 내면 되잖아. 이렇게 갑자기 사직서를 내면 사람들은 괜히 유미 씨 때문인 줄 오해하잖아. 유미 씨가 얼마나 여린지 몰라? 사무실에서 눈치 보게 하려고 작정했어?”
올해 내 연차는 이미 진작 다 써버렸다. 그가 매번 취소했던 결혼식 당일마다 연차를 냈으니 진작에 다 쓰고도 모자랄 지경이었지만, 정작 그는 그런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지금 그가 걱정하는 건 오직 고유미뿐이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그녀가 법률사무소에서 눈치라도 보게 되면 어쩌냐며 되레 나를 몰아세웠다.
가슴 한쪽이 서늘하게 식어갔다.
나는 다시 그의 목덜미에 남은 키스 자국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목덜미를 가렸다.
“이거... 그냥 모기한테 물린 거야. 괜히 오해하지 마.”
놀랍게도 이번엔 다그치거나 화내지 않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물론 너무 서툰 연기였지만, 예전 같았으면 눈 딱 감고 믿어줬을지도 몰랐다.
아무 말 없이 그저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자, 송연석은 안도한 듯 내 어깨를 감쌌다.
“애도 아니고... 에이스 변호사답게 그만 좀 투정 부려. 오늘 저녁엔 아레나 레스토랑에서 식사하자. 그동안 내가 미안했던 것도 있고...”
나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 침묵마저도 동의로 받아들였다.
사실 오늘 마지막으로 제대로 인사하고 떠나려고 했었지만 이젠 그 마음마저도 사라졌다. 원주로 떠난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선배님!”
고유미는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송연석은 흠칫 놀라며 급히 내 어깨에서 손을 뗐다.
고유미는 민망한 듯 씩 웃으며 말했다.
“선배님이랑 변호사님 데이트 중이었나 봐요? 방해해서 죄송해요. 근데 어쩔 수가 없었어요... 이 사건 자료가 너무 어렵더라고요.”
그 말을 들은 송연석은 마치 내 존재를 잊은 듯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가 들고 온 서류를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인 채 어디가 어려운지 하나하나 물으며 친절하게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고유미는 일부러 송연석에게 바짝 붙어 섰다. 둘은 내 앞에서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마치 나만 배제된 듯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잠시 뒤, 고유미는 송연석의 팔짱을 끼고 함께 나가더니, 문이 닫히는 순간 고개를 돌려 나를 향해 도발적인 미소를 지었다.
혼자남은 방 안엔 나의 가쁜 숨소리만 가득했다.
그 순간, 아무런 전조도 없이 팔찌가 툭 떨어지며 산산이 부서졌다.
그건 연애 1주년을 기념해 송연석이 준비한 선물이었다. 그때 그는 우리 사이도 이 팔찌처럼 끝까지 온전하길 바란다고 말했었다.
나는 한참을 그대로 서 있다가 깨진 팔찌 조각에 베여 따끔거리는 상처도 무시한 채 하나하나 주워 담았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 남아 있던 미련까지 함께 쓰레기통에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