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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정해은은 키스를 해본 적이 없었고 이번이 처음이었다. 성수혁의 몸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고 심장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저 멀리 불꽃놀이가 하늘 끝에서 피어났고 그들의 눈에는 서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다음 해의 겨울이 눈앞에 펼쳐졌다. 섣달 그믐날에 정해은은 직접 짠 목도리를 성수혁에게 선물했다. 성수혁은 아주 기뻐하며 그녀를 안고 몇 바퀴 돌았다. 그리고 쪼그려 앉아 고개를 들고는 사랑 가득한 눈빛으로 말했다. “직접 둘러줄래?” 정해은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성수혁이 그녀가 준 목도리를 두르고 부잣집 도련님들 앞에서 엄청 자랑하고 다녔다는 것을.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그녀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소년은 열정적인 마음을 가졌고 그녀의 세상을 녹여버렸다. 정해은은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 사람은 무조건 성수혁이어야만 했다. ... 정해은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하늘이 희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몸을 일으켜 베개를 만져봤더니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그녀의 눈물이었다. 성창수의 말들 때문에 어렸을 적의 기억이 떠오른 모양이다. 과거 그렇게 서로를 사랑했었는데 이대로 포기하면... 정말 후회하지 않을까?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세수하러 갔다. “사모님, 대표님이 어젯밤에 늦게 들어오셨어요.” 정해은이 내려오는 걸 본 안정숙이 다가와 말했다. ‘수혁 씨가 들어왔다고?’ 그녀는 흠칫 놀랐다가 이내 성창수가 나선 거라는 걸 깨달았다. 사실 그녀도 성창수의 말을 들은 후에 생각을 달리할 마음이 들었다. 생각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사모님, 오늘은 직접 대표님께 아침을 준비해주시려고요?” 안정숙이 웃으며 물었다. 그녀는 두 사람이 잘 지내고 서로 사랑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다. 그게 그들의 평소 모습이었으니까. 3년 전의 사고만 아니었어도 이 일상이 깨지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따지고 보면 다 백유라의 탓이었다. 멀쩡하게 잘 지내는 유부남에게 꼬리를 쳤으니 말이다. 정해은은 부엌에서 한참 동안 분주히 돌아쳤다. 예전에도 요리를 못했고 지금도 국만 끓일 줄 아는 정도였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재벌 딸들은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살았다. 평소 공부를 하는 것 외에는 사교 예절이 더 중요했고 요리 같은 건 아예 고려하지도 않았다. 어쨌거나 집에 가정부가 많으니까. 정해은은 그래도 예전에 요리를 조금 배웠다. 처음 성수혁에게 국을 끓여줬을 때 그의 눈에 담긴 놀라움과 기쁨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녀는 단지 그와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성수혁이 내려왔다. 어젯밤 성창수가 집으로 가라고 명령하듯 말해서 기분이 안 좋은지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게다가 밤새 오가다 제대로 쉬지 못해 눈 밑에 짙은 다크서클이 생겼다. 이 별장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평소 안정숙 말고는 거실에 자주 드나드는 가정부가 없었다. 가뜩이나 분위기가 조용한데 성수혁이 차가운 얼굴로 나타나자 더욱 싸늘해졌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식탁 앞에 앉았다. 조금만 건드려도 폭발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좋게 말하면 진지한 표정이었고 직설적으로 말하면 무표정이었다. 마치 세상이 그에게 빚을 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성수혁은 식탁 위에 국이 있는 걸 보고는 숟가락으로 떠서 맛봤다. 시원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그의 가슴속의 화를 풀어주는 것 같았다. 예전에 먹어본 적이 있는 듯 맛이 묘하게 익숙했다. “아주머니, 국을 아주 잘 끓였네요. 맛있어요.” 성수혁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말에 안정숙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대표님, 이건 사모님이 직접 끓이신 거예요.” 분위기가 순식간에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성수혁이 당황해하던 그때 정해은이 앞치마를 벗고 다가왔다. 고개를 들자마자 서로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화장기 없는 얼굴에 연한 블루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허리가 한 손에 잡힐 만큼 가느다랬다. 차가움 속에 부드러움이 스며든 모습이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리고 차가운 백합처럼 은은한 향기를 풍겼다. 성수혁은 그제야 생각이 났다. ‘어쩐지 익숙하더라니. 해은이가 아주 오래전에 끓여준 적이 있었어.’ 과거의 기억이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그녀를 빤히 보던 그때 갑자기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아주머니가 있잖아. 뭘 직접 하고 그래.” 겉으로는 투덜거렸지만 사실 마음속은 너무나 따뜻했다. 첫사랑은 누구에게나 잊기 어려운 존재다. 게다가 그 첫사랑이 아내가 되었다. 성수혁은 원래 백유라에게 아침 일찍 보러 가겠다고 약속했었다. 일어나자마자 백유라와 통화했었는데 불안한지 계속 흐느껴 울었다. 그땐 마음이 조여들었지만 지금은 웬일인지 전혀 급하지 않았다. 성수혁의 얼음장처럼 차갑던 얼굴이 녹아내리더니 입가에 미소가 새어 나왔다. “아주 맛있어.” 정해은이 천천히 다가와 자리에 앉았다. “입맛에 맞다니 다행이에요.” 그녀는 이혼 합의서를 서랍 깊숙이 숨겼다. 성창수가 했던 말 때문에 마음이 많이 바뀐 건 사실이었다. 정해은은 이번이 두 사람의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결국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노력하기로 했다. “수혁 씨.” 정해은이 입을 열었다. “오늘 시간 있어요?” 오후에 서씨 가문에서 주최하는 자선 파티가 있었다. 성씨 가문 같은 상류층 가문은 매년 이 행사에 참석했다. 이 행사는 경성시의 유명 인사들이 거의 다 참석하는 자선 파티이자 명예와 이익을 좇는 자리이기도 했다. 성수혁도 기억하고 있었다. 원래는 겁이 많고 연약한 백유라를 돌봐야 해서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의 아내 정해은은 침착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라 이런 자리에서는 성씨 가문과 그의 체면을 깎은 적이 없었다. 결혼한 지 몇 년이 됐지만 두 사람은 아이가 없었다. 정해은이 출산을 두려워한다는 걸 알고 성수혁은 평생 아이를 낳지 않기고 결심했다. 하여 정해은이 신경 쓸 집안일이 딱히 없었다. 성수혁은 그녀가 안주인의 삶을 누리면서 필요할 땐 성씨 가문을 대표하여 행사에 참여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했기에 백유라에 대한 미안함이 점점 더 커졌다. 그는 별처럼 반짝이는 정해은의 눈을 보며 홀린 듯 대답했다. “오후 자선 파티 같이 가자.” 정해은의 눈이 반짝이더니 마침내 환하게 웃어 보였다. 밝은 기운마저 스며드는 것 같았다. “국 아주 맛있어. 수고했어.” 성수혁은 뜨거운 국을 단숨에 다 먹어버렸다. 정해은의 얼굴에 희미한 홍조가 피어났다. “맛있으면 앞으로 매일 끓여줄까요?” 그 말인즉슨 매일 기다릴 테니 집으로 들어오길 바란다는 뜻이었다. 아내가 남편을 기다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 문득 뭔가 생각났는지 성수혁의 미소가 굳어졌다. 그 모습에 정해은은 마음이 조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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