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할아버지가 하고 싶은 얘기는 다 했어. 그래도 여전히 떠날 생각이라면 할아버지도 억지로 붙잡지 않을게.”
성창수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두툼한 서류 뭉치를 그녀에게 건넸다.
정해은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할아버님, 이건...”
성창수가 그녀에게 건넨 서류 중 대부분이 재산 이전 설명서였는데 거의 유언장과 다름없었다.
“어쨌거나 수혁이가 잘못한 건 사실이야. 할아버지 명의로 된 이 재산들을 전부 너한테 줄게.”
그는 자애롭게 웃으며 말했다.
“수혁이랑 계속 함께하면 넌 내 손주며느리고 헤어진다면 내 친손녀야.”
성창수는 그녀를 진심으로 아꼈다.
그동안 억눌렀던 감정이 한순간에 터져 나온 정해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 내 울었다.
닭똥 같은 눈물이 눈가에서 흘러내려 바닥에 떨어졌다.
지금까지 쌓인 억울함이 파도처럼 밀려와 그녀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감정이 격해진 나머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울었다.
그 모습에 성창수는 아이를 달래듯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한참이 지나 진정한 후에야 정해은은 남은 서류를 계속 봤다. 그런데...
“할아버님!”
정해은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라지 마.”
성창수가 웃으며 말했다.
“나 이젠 충분히 살 만큼 살았어.”
그녀의 두 눈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집에 휠체어가 있는 이유, 집사가 할아버지를 혼자 두지 않는 이유, 이번에 본가에 와서 할아버지 안색이 아주 좋지 않았던 이유...
재빨리 남은 서류를 넘겼는데 역시나 그녀의 예상이 맞았다. 성창수에게 기껏해야 2년 정도 남았다.
정해은은 숨이 턱 막히고 눈앞이 캄캄해져 제대로 서 있지조차 못했다.
성창수는 그녀에게 정말 잘해줬다. 언젠가 세상을 떠날 날이 올 거라는 건 알았지만 자연스러운 노환으로 가길 바랐지, 불치병에 걸리는 건 바라지 않았다.
“할아버님...”
이젠 정해은도 목 놓아 울었다. 애절한 울음소리가 처절하게 울려 퍼졌고 성창수의 무릎에 엎드린 채 한참 동안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성씨 가문은 백 년 넘게 이어온 명문가로 권력과 재력이 경성시에서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하여 전 세계 최고 수준의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치료가 불가능했고 성창수는 결국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이미 정해진 운명이라 바꿀 수 없었다.
“해은아, 할아버지가 이기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성창수의 두 눈에 정해은에 대한 애정이 가득했다. 주름진 손으로 그녀의 등을 토닥이면서 위로를 건넸다.
“한 가지만 부탁할게. 내가 살아있는 2년 동안만 성씨 가문의 손주며느리로서 내 곁에 있어 주면 안 될까?”
정해은이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흐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성창수는 마침내 시름을 놓았다.
“고마워.”
‘힘들게 해서 미안하구나, 해은아. 내가 수혁이 녀석을 도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성창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 2년 동안에 어리석은 손자가 정신을 차리길 바랐다. 적어도 나중에 깨달았을 때 돌이킬 여지도 없어 평생 아쉬움을 안고 살지 않게.
성창수는 정해은을 속이지 않았다. 의사들의 판단에 따르면 현재 몸 상태로 2년을 사는 것도 사실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것도 돌발 상황이 전혀 없는 전제하에서.
그의 심장이 항상 큰 문제였다. 조금만 방심해도 쉽게 발병할 수 있었다.
정해은이 마음이 약하고 효심이 매우 깊다는 걸 알기에 성창수는 그녀가 오기 전에 이미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그녀가 거절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잘 알았다. 마음이 약해서든 연민 때문이든 아무튼 성공 가능성은 컸다.
그날 저녁.
정해은은 성씨 가문 본가에서 저녁을 먹었다. 식탁을 둘러보니 온통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들뿐이었다.
성창수는 특별히 그녀의 입맛에 맞춰 저녁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정해은의 가슴속에 따뜻한 기운이 스쳤다. 누군가가 자신을 아껴주고 소중히 여겨주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성수혁은 여동생을 돌본다는 명목으로 백유라를 자주 집으로 데려왔다. 그런데 백유라가 며칠 머무를 때마다 별장 안의 모든 게 그녀의 취향에 맞춰져야 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향을 미리 피워놓고 좋아하는 카펫 색상을 미리 깔아놓아야 했으며 심지어 바닥 청소용 세정제마저 백유라가 좋아하는 향으로 써야 했다.
이렇듯 사소한 것 하나하나 엄격히 지켜야 했으니 식사는 오죽하겠는가?
매번 식사할 때마다 그 커다란 식탁에 정해은이 좋아하는 음식이라곤 하나도 없었고 심지어 그녀의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음식도 많았다.
실망이 쌓이고 쌓여 정해은의 마음은 다시 봄을 맞이할 수 없을 만큼 마른 나무가 돼버렸다. 먹구름에 가려진 정해은 대신 반짝이는 별빛이 자리를 잡았다.
이게 두 사람의 최종 운명이 아닐까?
성창수는 성공적으로 정해은의 마음을 흔들었다. 별장으로 돌아온 그녀는 씻은 후 침대에 누워 잠을 잤다.
아주 긴 꿈을 꿨는데 전부 과거의 추억이었다. 그녀와 성수혁만의 추억, 그리고 어린 시절 나눴던 깊고 진한 감정이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동이 트기 시작한 사람이 적은 새벽.
“해은아, 빨리 와봐. 일출이야. 해가 떠오르고 있어!”
소년은 레이싱복 차림에 머리는 눈부신 은빛으로 염색했고 눈에 띄는 귀걸이를 하고 있었다.
이건 열여덟 살의 성수혁이었다.
그해 그는 눈부시게 빛났고 거침이 없었으며 모두들 도련님이라 불렀다. 그리고 제1고등학교의 골칫거리로 유명했다.
바로 전날 레이싱 대회에서 1등을 하자마자 성수혁은 정해은을 기쁘게 해주려고 서둘러 트로피를 들고 왔다.
조용한 성격인 정해은은 시끄러운 걸 좋아하지 않았기에 멀찍이 서 있었다.
이 경기는 혈기 왕성한 소년에게 무척 중요했다. 정해은은 위험한 레이싱을 싫어했지만 그래도 직접 현장에 가서 그를 응원했다.
성수혁도 기대에 부응해 완벽하게 1등을 거머쥐었다.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띤 채 바람처럼 인파를 뚫고 그녀에게 다가와 말했다.
“넌 나의 공주야.”
정해은의 얼굴에 쑥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소녀의 맑고 투명한 피부에 붉은 기가 스며드는 모습은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소년은 그 모습에 넋을 잃었다. 그녀가 예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소녀의 순정과 수줍음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빛났다.
그는 시선을 늘어뜨리고 짙고 검은 속눈썹으로 눈빛 속에 담긴 감정을 가렸다. 그러다가 시선이 소녀의 붉고 탐스러운 입술에 머물렀다.
침을 꿀꺽 삼키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해은아.”
“네?”
정해은이 고개를 들었다.
“왜요?”
소년의 목소리와 손이 파르르 떨렸고 온몸의 피가 끓는 것만 같았다.
성수혁은 어릴 적부터 정해은을 좋아했다. 항상 예뻤고 눈은 하늘의 별처럼 반짝였다.
“나한테... 키스해주면 안 돼?”
열여덟 살의 성수혁은 긴장한 나머지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정해은은 순간 흠칫 놀랐다.
그녀의 반응을 보고서야 성수혁은 성급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짜증이 났다.
‘방금 나 너무 음흉했어...’
누군가를 좋아할수록 더 자괴감이 들고 실수할까 두려워진다.
열여덟 살의 성수혁은 정해은을 세게 안을 용기조차 없었다. 만지면 깨질까 봐, 너무 무례하면 그녀가 싫어할까 봐 두려웠다.
고요한 밤 차가운 달빛이 두 사람의 어깨에 스며들었다.
정해은이 고개를 들고 별처럼 빛나는 두 눈으로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갑자기 가까이 다가와 소년의 볼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그 순간 제자리에 얼어붙은 성수혁은 두 눈이 동그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