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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성창수가 계속 설득했다. “해은아, 너희 둘은 할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지켜봐 온 아이들이야. 소꿉친구로 시작해서 결혼식장까지 걸어온 거잖아. 이렇게 오랜 세월 감정을 이어온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야. 그런데 이대로 포기한다면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해은이 네가 착한 애라는 걸 알아. 그리고 마음속에 그 녀석이 아직 있다는 것도 알고. 조금만 더 버텨보면 안 될까? 할아버지가 뻔뻔하다는 걸 알지만 수혁이 편 좀 들게. 해은아,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감정에 장애물이 생기면 그걸 치우거나 옮기거나 심지어 파괴해버리면 된다. 정해은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고 무릎 위에 올린 주먹을 천천히 꽉 쥐었다. 조금 전 성창수가 한 말이 그녀의 마음을 흔들어놓아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성창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해은아, 할아버지가 부탁 좀 할게. 수혁이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났고 나도 이젠 나이가 많아 언제 죽을지 몰라. 앞으로 넌 수혁이의 아내이자 가장 가까운 가족이야. 너마저 수혁이를 버리고 떠난다면 그 녀석 곁엔 정말 아무도 남지 않아. 너희 둘 어릴 때부터 사이가 좋아서 늘 붙어 다녔잖아. 그게 할아버지가 널 우리 집 손주며느리로 점찍은 이유 중 하나였어.” 성창수가 간곡하게 부탁했다. “그 마음 변치 말아줘.” 정해은은 손을 넉넉한 소매 안에 숨겼다. 그래야만 떨리는 손을 간신히 가릴 수 있었으니까. 그녀는 지금 감정을 애써 억누르고 있었다. 성창수가 말한 대로 그녀는 어릴 적부터 감정을 속으로 삼키는 습관이 있었다. 기쁘든 슬프든 화가 나든 절대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항상 가슴에 쌓아둔 채 혼자 견뎌냈다. 넓은 거실이 순식간에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정해은은 고개를 숙이고 떨지 않으려 애를 썼다. 사실 성창수에게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여전히 성수혁을 사랑하고 있었고 마음이 변한 적도 없었다. 진짜로 변심한 사람은 성수혁이었다. 그의 마음이 그녀에게서 멀어져 갔고 그녀와 백유라를 대하는 태도가 눈에 띄게 달랐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이 감정이 정해은을 괴롭히지 않았다면, 결혼이 그녀를 불 속에 밀어 넣지 않았더라면, 마음이 끝없는 억울함과 실망으로 가득 차지 않았다면 그녀도 이혼 같은 건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젠 그녀의 마음을 속일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라도 자신의 마음은 안 되었다. 정해은은 여전히 성수혁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하지만 사랑해봤자 무슨 소용인가? 이미 온몸이 만신창이가 돼버렸고 뜨거운 열정은 실망으로 바뀌었다. 하여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를 놓아주고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을 축복하기로 했다. “해은아, 정말 떠나기로 결정한 거야?” 성창수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정해은이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맑고 예쁜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지만 입가엔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성창수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할아버님.” 성창수는 가슴을 움켜쥐고 기침을 두어 번 했다. 얼굴이 순식간에 자줏빛으로 물든 걸 본 순간 정해은이 벌떡 일어나더니 걱정스럽게 물었다. “할아버님, 괜찮으세요? 어디 불편하세요?” 그러고는 사람을 부르려는데 성창수가 재빨리 말렸다. 손을 내저으면서 가슴을 움켜쥔 채 숨을 고른 다음 그녀를 향해 다정하게 웃었다. “많이 놀랐지? 할아버지가 미안해.”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의사 선생님 불러서 봐달라고 할까요?” 정해은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녀의 친할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기에 성창수가 친할아버지나 다름이 없었다. 성창수는 그녀에게 아주 중요하고 소중한 가족이었다. “오랜 지병이라 가끔 이래. 사람 부를 필요 없어.” 성창수는 그녀를 다시 자리에 앉힌 다음 얼굴을 보며 물었다. “네가 열여덟 살 때 일어났던 그 화재 기억나?” 그의 말에 정해은은 순식간에 과거로 돌아갔다. 열여덟 살 때 일어났던 그 화재를 당연히 기억했다. 단순히 기억하는 게 아니라 뼈에 새겨질 정도였다. 끔찍한 악몽이어서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공기 중에 코를 찌르는 짙은 연기가 가득했고 타닥타닥 타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정해은은 필사적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검은 연기에 눈이 따끔거려 도저히 뜰 수가 없었다. 화재 속 연기는 엄청난 독성을 지녀 사람을 질식시킬 뿐만 아니라 눈도 자극했다. 눈이 너무 아파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런데도 통증은 조금도 완화되지 않았다. 비틀비틀 앞으로 달려가면서 여러 번 넘어졌다. 혼란스러운 상황이라 몇 번 넘어졌는지조차 셀 수 없었다. 그저 눈을 꼭 감은 채 숨을 참고 본능에 따라 필사적으로 탈출했다. 불길이 너무 거세서 열여덟 살이던 정해은은 세상이 거대한 용광로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온몸이 타들어 가는 듯했고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공기 온도가 올라갈수록 의식도 점점 흐려졌다. 주변에 불꽃이 타오르는 소리 말고는 서서히 약해지는 구조 요청과 울음소리뿐이었다. 정해은은 잘 알고 있었다. 그 소리가 약해질 때마다 누군가 또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는 것을. 생사의 갈림길에서 생명은 이렇게나 나약했다. 극도의 공포가 그녀를 덮쳤다. 불길이 번지면서 정해은도 결국 의식을 잃었다. 쓰러지던 순간 열여덟 살의 정해은은 마음속으로 절망했다. ‘이대로 죽는 건가?’ 하지만 그녀는 죽지 않았다. 큰 재난을 겪고 살아남으면 복이 따른다고 했다. 의식이 돌아온 순간 정해은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이 말이 스쳤다. 알고 보니 그녀를 구한 건 성수혁이었다. 정해은을 업고 화재가 난 건물에서 멀어질 때까지 미친 듯이 달렸다. 그녀는 소년의 등에 업혀 그의 가느다란 어깨에 얼굴을 살짝 기댔다. 그때의 성수혁은 아직 건장하지 않았고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풋풋하고 소년다운 패기가 가득하긴 했지만 어린 티가 났다. 정해은은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성수혁의 등이 따뜻하고 넓어서 그와 함께라면 두려울 게 없었고 세상의 모든 따뜻한 정을 느낄 수 있을 듯싶었다. 그때부터 삶의 모든 사랑과 미움은 한 사람에게서 비롯됐다.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성창수의 말에 정해은은 마음이 흔들렸다. “그 녀석이 아주 개차반이라는 걸 알아. 하지만 아픈 애잖아. 2년 동안 완전히 기억을 잃었어. 그건 전혀 다른 인생이었고 지금의 수혁이한테 영향을 미치는 건 어쩔 수가 없어.” 성창수는 그녀가 흔들렸다는 걸 알아채고 계속 말을 이었다. “제발 수혁이를 포기하지 마. 깨진 거울도 다시 붙일 수 있다잖아. 할아버지가 눈은 흐려도 사람의 마음은 잘 봐. 너희 둘 아직 서로한테 진심이 남아 있어.” 결혼은 신성하고 소중한 것이기에 함부로 깨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 세상에 연인이 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어렵게 맺어진 인연을 놓아서야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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