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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정해은의 입가에 맴돌던 미소가 굳어지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 두 사람이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오빠, 너무한 거 아니야? 오빠가 만든 국수를 먹지도 못하고 보기만 해야 하잖아.” 백유라의 귀여운 애교에 성수혁의 낮은 웃음소리가 주방에서 들려왔다. 정해은의 두 눈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백유라는 별거 아닌 말로도 그를 웃게 만들었지만 정작 아내인 그녀는 그가 진심으로 웃는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다. 자신이 얼마나 가소롭고 가련한 존재인지 절실하게 느꼈다. 정해은은 어떻게 주방 문 앞까지 걸어왔는지도 몰랐다. 손발이 차갑게 식어버렸고 휴대폰 화면 속 환하게 웃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오빠, 언제 나 보러 올 거야? 이제 별일 없으니까 다시 촬영하러 갈 수 있어.” 휴대폰 너머 나타난 정해은을 본 순간 백유라의 미소가 살짝 굳어졌다. 백유라가 정해은보다 훨씬 어렸기에 아직 소녀다운 풋풋함이 채 가시지 않았다. 눈매가 휘어지며 웃을 때면 세상이 더욱 밝고 찬란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때로는 매혹적이면서도 때로는 거만하게, 또 때로는 당당하고 화려하게 빛났다. 연예계에서는 이런 독특한 매력의 소유자를 필요로 했다. 미인과 미남들이 넘쳐나는 이 바닥에서 백유라의 외모는 단연 돋보였고 또 독보적이었다. 이것이 바로 성수혁이 그녀를 밀어주자마자 단숨에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던 이유였다. 신인에서 톱스타로 발돋움하는 데 고작 하룻밤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는 연예계에서 흔치 않은 일이었다. 아무리 자본의 힘이 강해도 사람이 별로라면 그 막대한 돈은 허공에 흩어질 뿐 아무런 보답도 얻지 못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뜨지 못하는 배우들이 수두룩했다. 성수혁은 주방 문을 등지고 있었던 터라 정해은을 전혀 보지 못했고 다가온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내일 오전에 회사 일만 마무리하고 오후에 갈게.” 성수혁이 입꼬리를 올리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모습에 정해은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입술을 너무 세게 깨문 탓에 입안에 피비린내가 가득 퍼졌다. 성수혁은 마침내 뭔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고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주방 문 앞에 서 있던 정해은과 눈이 마주쳤다. “아직도 안 잤어? 시간이 늦었는데.” 성수혁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부드럽던 미소가 점점 어색하게 변했다. 왜 그렇게 어색한지 정해은은 잘 알고 있었다. 한창 백유라와 알콩달콩 영상통화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들켜버렸으니 어색할 수밖에. 진짜 아내는 정해은이지만 지금 다른 여자와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다. “나...” 정해은이 뭐라 말하려고 입을 열자마자 성수혁이 가차 없이 끊어버리더니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철 좀 들어. 괜한 억지 부리지 말고. 나랑 유라는 아무 사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그 말에 정해은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정말요? 그런데 왜 갑자기 나한테 설명하는 거죠? 아무것도 묻지 않았는데.” 성수혁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네가 오해할까 봐 그러지.” 정해은은 주먹을 꽉 쥐고 피식 웃었다. “계속 통화해요. 방해해서 미안해요.” 그러고는 그에게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오빠, 언니 혹시 화났어? 다 내 잘못이야. 얼른 가서 달래줘. 난 괜찮아.” 백유라의 목소리가 다시 부드러워졌다. 끝 음을 올릴 때마다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쟤 나이가 몇인데. 애도 아니고 달래긴 뭘 달래?” 성수혁이 분노를 터뜨리면서 휴대폰을 들었다. “괜찮아.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지금까지 내가 너무 오냐오냐했어. 이렇게 오랫동안 사모님 소리를 듣게 해줬으면 만족할 줄 알아야지. 쩍하면 질투하고 별것도 아닌 일로 억지를 부리는 건 무슨 경우야? 이해심이 많고 애교 넘치는 유라랑 비교하면 정말 천지 차이야.’ 한편 방으로 돌아온 정해은은 더 이상 배고픔을 느끼지 못했다. 위장은 감정과 직결되는 장기다. 기분이 나쁘거나 우울하면 식욕이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공허한 눈빛으로 천장의 화려한 샹들리에를 멍하니 쳐다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성수혁은 정해은이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누워있다가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요즘 들어 왜인지 모르게 자주 꿈을 꿨다. 그리고 그 꿈속에는 늘 성수혁이 있었다. 지금의 성수혁, 과거의 성수혁, 심지어 미래의 성수혁까지도. 꿈에서 아주 먼 미래에 성수혁과 백유라는 금실 좋게 지내고 있었고 정해은은 그저 늙어빠진 아주머니가 되어 있었다. 그녀가 끊어진 다리 위에 서 있었고 다리의 양쪽 끝에 소년 시절의 성수혁과 미래의 성수혁이 서 있었다. 미래의 성수혁이 젊고 활기찬 백유라를 안은 채 경멸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며 소리쳤다. “네가 없었으면 좋았을 텐데. 정해은, 넌 정말 나랑 유라 사이에 낀 걸림돌이야. 끈질기게 달라붙어서 떨어지지도 않는 골칫덩어리라고.” 반면 반대쪽에 서 있던 소년 시절의 성수혁은 그녀에게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가에 핏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가 울면서 애원했다. “해은아, 떠나지 마... 영원히 날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해줘.” 다음날, 날이 밝았다. 점심 무렵 안정숙이 정해은에게 다가갔다. “사모님, 이따가 대표님께 국을 가져다드릴 건가요?” 어젯밤의 일을 겪고 난 후 정해은은 마음이 다시 복잡해졌다. 원래는 성창수의 말을 듣고 성수혁과 다시 잘해볼 생각이었다. 어쨌거나 오랜 시간 쌓아온 정이 있었기에 이대로 끝내기엔 뭔가 아쉬웠다. 전에 단호하게 이혼을 결심했던 적도 있었다. 그 후로 그 생각이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는데 성창수가 성수혁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라고 간곡하게 부탁한 바람에 결국 흔들리고 말았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흔들렸다기보다는 오히려 미련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정해은은 그들의 관계에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고 말했다. 만약 이번에도 뜻대로 되지 않고 깨진 거울이 다시 붙지 않는다면 그때는 영원히 잃게 될 것이다. 점심때 먹을 국을 평소처럼 회사에 가져다줬다. 정해은은 도시락 가방을 든 채 엘리베이터 안에 서서 숫자가 변하는 걸 지켜봤다. 마침내 꼭대기 층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성수혁의 비서 임재휘가 문 앞에 서서 깍듯하게 인사했다. “사모님, 저한테 주시면 됩니다. 제가 전달해드릴게요.” 임재휘는 정해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도시락 가방을 건네받으려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요. 제가 직접 가져다줄게요.” 환하게 웃는 정해은을 보던 임재휘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저기... 대표님께서 회의 중이시거든요. 지금 가시는 건 좀 곤란할 것 같습니다.” 정해은이 의아해하더니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점심시간인데 아직도 회의 중이라고요?” 임재휘는 뭔가 말하려다 멈칫했다. 그녀도 그를 난처하게 할 생각이 없었다. “알았어요. 중요한 회의니까 지금까지 하겠죠. 사무실에서 기다릴게요.” 그러고는 엘리베이터 밖으로 발을 내딛으려는데 임재휘가 손을 내밀어 그녀를 막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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