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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사모님, 대표님의 성격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전 대표님의 지시를 거역할 수 없어요.” 임재휘가 난처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 모습에 정해은은 잠시 멍해졌다. 임재휘의 말이 맞았다. 성수혁은 기억을 잃었다가 회복한 이후로 성격이 조금 이상해졌다. 어쩌면 백유라를 만난 후로 모든 것이 변했을 수도 있었다. 임재휘 역시 정해은이 자신을 곤란하게 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정해은의 성격이 온화해서 좀처럼 화를 내는 법이 없었고 항상 양보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토록 좋은 사람에게... 지금 사무실에 있는 사람이 떠오른 임재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눈앞의 가녀린 그녀가 가엾게 느껴졌다. “알겠어요. 수고하세요, 그럼.” 정해은은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손에 든 도시락 가방을 임재휘에게 건네고는 다시 엘리베이터에 탔다. 대표 사무실. 백유라가 검은색 가죽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성수혁을 올려다보면서 눈웃음을 지었다. 두 눈에 유혹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미 가을로 접어들었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시원하다 못해 아찔한 옷차림이었다. 성수혁이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자마자 백유라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옆에 있던 담요를 집어 들어 백유라의 다리를 덮어주었다. “가을인데 이렇게 얇게 입고 다니면 어떡해?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성수혁의 목소리에 걱정과 잔소리가 섞여 있었다. 백유라는 붉은 입술을 깨물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팔에 손을 올렸다. 그러다 천천히 내려가면서 그의 두껍고 따뜻한 손을 잡았다. “어쩔 수 없어. 나 배우잖아.” 백유라가 입을 삐죽 내밀더니 다정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까 잡지 화보 찍었는데 옷을 갈아입을 시간이 없었어.” 요 며칠 그녀는 정신없이 바빴다. 매일 촬영이 있었고 가끔은 감독에게 양해를 구해 다른 행사에도 참석해야 했다. 아무튼 일복이 터졌다. “그렇게 바쁜데 날 보러 여기까지 왔어?” 성수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회사에 들이닥친 그녀의 행동이 조금 언짢았다. 그러자 백유라가 애교를 부렸다. “보고 싶어서 왔지. 오빠는 내가 그렇게 싫어? 알았어. 갈게, 그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성수혁을 째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바로 그때 그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하얗고 매끄러운 어깨를 감싸 안더니 다시 의자에 앉혔다. “여기까지 왔는데 벌써 가려고? 이따가 끝나면 데려다줄게.” 성수혁이 말했다. “비서한테 날 데려다주라고 할 거야?” 백유라가 눈을 깜빡이며 웃어 보였다. 그러자 성수혁이 시선을 늘어뜨리고 덤덤하게 물었다. “넌 어떻게 가고 싶은데?”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나야 당연히 오빠가 데려다주길 바라지. 데려다주면 안 돼?” 그녀의 귀엽고 고집스러운 모습에 성수혁은 달리 방법이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알았어. 오빠가 데려다줄게.” “진작 그럴 거지.” 기분이 좋아진 백유라는 가죽 의자에 얌전히 앉아 발끝을 흔들며 휴대폰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성수혁은 다시 책상 앞으로 돌아가 서류를 처리했다. 똑똑. 비서 임재휘가 노크하고 들어와 손에 든 도시락 가방을 책상 앞에 놓았다. “대표님, 사모님께서 가져오신 국입니다.” “알았어.” 성수혁의 얼굴에 별다른 표정이 없었고 말투도 차분했다. “여기 놓으면 돼.” 정해은이 가져온 국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백유라가 고개를 들었다. 눈빛에 장난기가 스쳐 지나가더니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빠, 이 국 아주머니가 끓인 거야?” 성수혁은 다른 사람에게는 짜증을 내거나 한없이 차가웠지만 백유라에게만큼은 인내심이 언제나 무한했다. 그가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아니. 해은이가 직접 끓인 보양식이야.” 안에 값비싼 약재도 몇 가지 들어 있었다. 한약을 넣고 끓일 경우 대부분 국물 맛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정해은은 성수혁이 거부감 없이 먹을 수 있도록 역한 냄새를 없애기 위해 오랜 시간과 헤아릴 수 없는 정성을 쏟아부었다. 백유라가 눈동자를 굴렸다. “그렇구나. 오빠, 나 이 국 먹고 싶어.” 그러고는 또박또박 이어 말했다. “아직 해은 언니가 직접 만든 국을 먹어본 적이 없어.” “먹고 싶으면 먹어.” 성수혁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임재휘더러 그녀에게 국을 주라고 손짓했다. 임재휘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유라는 국을 조금씩 떠먹으며 싱글벙글 웃었다. “맛이 꽤 괜찮네?” “입맛에 맞아?” 성수혁이 웃으며 물었다. “그럼 오빠가 해은이한테 앞으로 매일 이 국을 끓여달라고 할까?” “정말?” 백유라의 눈이 다 반짝였다. 그녀를 바라보는 성수혁의 눈빛이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오빠가 언제 거짓말한 적 있어?” 두 사람을 지켜보던 임재휘는 눈치 빠르게 사무실을 나왔다. 대표 사무실은 아무나 함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두 명의 비서 외에 인기 스타 백유라만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했다. 다른 사람들은 반드시 사전에 얘기하고 성수혁의 동의를 받아야 했다. 심지어 성수혁의 아내인 정해은조차도 이곳의 규칙을 따라야 했다. 회사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대표가 그의 한계를 건드리는 자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하지만 인기 스타 백유라에게는 한계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동생인 백유라는 경성시에 온 이후로 원하는 건 모두 이루며 살아왔다. 성수혁은 그녀를 끔찍이도 아꼈고 그녀가 뭘 하든 다 용납했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백유라가 하늘의 별을 따달라고 해도 성수혁은 온갖 방법을 써서 따다 주려 할 것이다. 만약 성수혁이 이미 결혼했다는 사실을 몰랐더라면 임재휘는 그의 아내가 백유라가 아닐까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한편 정해은은 성수혁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국이 맛있다면서 앞으로 매일 만들어달라고 했다. 휴대폰 화면에 나타난 글자를 보던 정해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여 정해은은 열흘 넘게 매일 일찍 일어나 성수혁을 위해 국을 만들었다. 그동안 그는 한 번도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낮에는 회사에서 바쁘게 일하고 쉬는 시간에는 촬영지 근처 호텔에 묵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백유라를 걱정했으니까. 백유라는 겁이 아주 많았다. 귀신을 무서워하는데 이번에 들어간 작품이 하필 공포물이었다. 안정숙이 다가와 말했다. “사모님, 나머지는 제가 할게요. 먼저 들어가서 쉬세요.” 정해은도 조금 지친 듯했다. 열흘 넘게 매일 일찍 일어난 데다가 온갖 요리책과 약초 서적을 뒤져가며 공부했다. 솔직히 말해 꽤 머리를 쓰는 일이었다. “네. 그럼 수고해주세요, 아주머니.” 정해은이 웃으면서 다정하게 말했다. 손을 씻고 휴지 두 장을 뽑아 하얀 손을 가볍게 닦았다. 조명 아래 섬섬옥수가 아름답게 빛났다. 그녀는 잠시 쉬려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바로 그때 휴대폰이 두 번 울려 휴대폰을 집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확인해보니 백유라가 보낸 친구 추가 신청이었다. 정해은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수락 버튼을 눌렀다. 전에는 백유라에게 늘 앙금이 있었고 그녀를 볼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중에 백유라 때문에 성수혁과 여러 차례 다투면서 홧김에 백유라를 삭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성수혁과 예전처럼 지내기도 했으니 어떤 것들은 피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성수혁은 백유라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계속 말했다. 그렇다면 마주해야 하는 건 언젠가는 마주해야 했다. 하여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백유라는 이성과의 관계에서 선을 지킬 줄 몰랐다. 듣자 하니 연예인들이 대부분 다 그렇다고 했다. 배우이기 때문에 가벼운 스킨십은 물론이고 심지어 키스까지도 진짜로 해야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 보면 배우들이 생각하는 남녀 간의 선이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과 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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