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메시지 내용을 확인한 순간 정해은의 입가에 맴돌던 미소가 굳어버렸다.
백유라가 사진 두 장을 보냈다. 한 장은 그녀의 셀카였는데 오른쪽 하단에 뼈마디가 굵은 커다란 손도 찍혀 있었다.
부부로 여러 해 동안 함께 살아온 터라 그 손의 주인이 누구인지 정해은은 단번에 알아봤다. 그건 성수혁의 손이었다.
두 번째 사진은 익숙한 도시락 가방이었다.
사진 속 도시락 가방을 본 순간 정해은은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건 그녀가 성수혁을 위해 직접 끓인 국이었다.
맛있다는 그의 한마디 때문에 매일 국을 만들어서 회사로 가져가 임재휘에게 건넸다.
그런데 오늘 만든 국이 백유라에게로 갔다.
마음속에 씁쓸한 감정이 차올랐고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바로 그때 백유라의 메시지가 또 도착했다. 이번에는 사진이 아닌 글자였다.
[언니, 고마워. 보름 정도 보양식을 먹었더니 몸이 많이 좋아졌어. 예전에 밤샘 촬영을 연달아 하면 너무 힘들었는데 요즘은 기력이 회복된 느낌이야. 이젠 밤새 촬영해도 어지럽거나 눈앞이 흐릿해지는 증상이 없어. 그런데 언니, 오늘 국이 좀 짠 것 같아. 다음에는 소금을 좀 적게 넣어줘. 나 싱겁게 먹는 편이거든.]
정해은은 휴대폰 화면을 한참 동안 말없이 들여다봤다.
보름 동안의 노력이 백유라에게 전달되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쩐지 국을 매일 만들어달라더라니. 정해은은 성수혁이 국을 좋아하고 그녀의 솜씨를 인정해주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지나친 다이어트 때문에 몸이 허약해진 백유라를 걱정했던 것이었다.
물건을 들고 지나가던 안정숙이 정해은을 보고는 의아해했다.
“사모님, 왜 그러세요? 어디 불편하세요?”
정해은이 여전히 아무 대답 없이 멍하니 있자 걱정스럽게 물었다.
정해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안정숙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괜찮아요. 가서 일 보세요.”
안정숙이 마음을 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모님, 전에 산 약재들 거의 다 바닥났어요. 사야 할 약재들을 정리한 다음에 더 사 오라고 할게요.”
“그럴 필요 없어요.”
정해은이 차분한 표정으로 덤덤하게 말했다.
“약재도 다 바닥났겠다 앞으로는 그만 만들려고요.”
안정숙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한동안 엄청 열심히 만드시더니 왜 갑자기 그만하시겠다는 거지?’
하지만 이건 가정부인 그녀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그럴 자격도 없었고.
하여 자세히 묻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사모님.”
안정숙이 자리를 비운 후 정해은은 고개를 들고 한숨을 쉬었다. 붉어진 눈가에서 눈물 한줄기가 천천히 흘러내려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화가 나서 떨리는 것인지, 아니면 성수혁에 대한 미움 때문에 떨리는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그동안 매일 일찍 일어났고 성수혁이 거부감 없이 먹을 수 있도록 보양식을 더 맛있게 만드는 법을 연구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우스갯거리가 돼버렸다.
정해은은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성수혁과 다시 잘해볼 수 있을 거라고, 깨진 거울이 다시 붙을 거라고 헛된 생각을 하다니.
그녀의 수많은 노력, 끈기와 집착, 포기했다가 다시 피어난 희망, 가득했던 기대감이 결국 완전히 부서지고 말았다.
지금 이 사회는 너무나 빠른 속도로 돌아갔고 사람들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8배속으로 세상을 맞이하는 듯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정해은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다행히 이젠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과거의 정해은은 죄책감을 사랑으로 여길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성수혁이 백유라에게 느낀 건 순수한 죄책감이 아니었다.
분명 사랑했지만 스스로 알지 못했고 죄책감과 사랑이 뒤엉킨 그런 감정이었다.
부모님이든 성창수든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타일러도 정해은은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성수혁은 정해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었다.
해난 사고에서 살아 돌아온 성수혁은 더 이상 뜨거운 사랑을 품었던 그 시절의 소년이 아니었다.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고 헤아리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녀의 헌신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녀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안정감을 헤아리지 못했으며 그녀의 지친 마음과 속상함을 보지 못했다.
정해은은 한 가지를 사실을 깨달았다. 스스로 가둬버리면 영원히 고립된 섬에 갇혀 한평생 나오지 못할 거라는 것을.
마음이 완전히 죽어버렸다.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은 한 폭의 그림처럼 생생했지만 다시 그릴 기회가 없었다.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이 그들에게는 가장 좋은 결말이었다.
모든 것을 깨닫고 나니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홀가분했다. 사랑하든 사랑하지 않든 모두 허망한 것이었고 이제부터는 그저 자신의 삶을 잘 살아가기만 하면 되었다.
정해은은 방으로 돌아와 서랍 구석에서 이혼 합의서를 다시 꺼냈다.
성창수의 설득에 마음이 바뀌었을 때 이 서류를 버리지 않은 게 너무 다행이었다. 적어도 다시 성수혁에게 사인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절친 주연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희야, 나 할아버님이 돌아가시면 이사 가려고.”
“정말 이혼하기로 결심한 거야?”
주연희의 질문에 정해은이 가볍게 답했다.
“응. 할아버님 가뜩이나 몸이 안 좋으신데 심장병까지 있으셔서 충격을 받으면 안 돼. 나랑 수혁 씨가 이혼하는 걸 절대 받아들이지 못하실 거야. 그래서 할아버님이 돌아가실 때까지는 일단 비밀로 하고 돌아가시면 깔끔하게 정리하려고.”
그사이 이혼에 필요한 것들을 모두 준비할 생각이었다.
일단 친정으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했다. 정해은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사업가 마인드라 가문의 이익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만약 아버지가 그들이 이혼하려 한다는 걸 알게 된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는 건 물론이고 심지어 정해은을 압박할 것이다.
정해은은 결혼 후 7년간 사모님 소리를 들으며 살았다. 출근도 하지 않았고 자신만의 사업도 없었다.
성수혁과 결혼할 당시 마침 정씨 가문에 경제적인 위기가 닥친 바람에 김미경이 정해은에게 준비해준 혼수마저 모두 가문의 사업에 쓰고 말았다.
이제 성씨 가문을 떠나게 되면 그녀의 아버지는 분명 그녀를 길거리로 내쫓을 터.
하여 여자는 정신적으로 독립해야 할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독립해야 했다.
“해은아, 내가 지금 거기로 갈게.”
주연희가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과거 정해은은 한 남자에게 목을 매던 사람이었는데 지금 갑자기 모든 현실을 깨닫고 단호해졌다. 이런 모습에 주연희는 오히려 걱정이 밀려왔다.
그녀는 누구보다 정해은을 잘 알았다. 정해은이 어떤 큰 충격을 받은 게 분명했다.
30분 뒤 차 한 대가 별장 앞에 멈춰 섰다. 주연희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정해은을 보고는 바로 달려가 꽉 안아주었다.
“나 괜찮아, 연희야.”
정해은의 표정이 침착했고 눈에도 눈물이 없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 할아버님 때문에 계속 부부인 척 연기하겠다는 거야?”
주연희의 질문에 정해은은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돈이 필요해.”
“내가...”
주연희는 그녀가 모아둔 적금을 빌려줄 수 있다고 말하려 했다. 정해은이 돈이 부족해서 그러는 줄 알았으니까.
그런데 정해은이 고개를 저었다.
“말 그대로의 돈이 아니야.”
바로 사업이었다.
정씨 가문은 그녀에게 든든한 버팀목이나 의지가 되지 못했다.
성수혁과 이혼하게 되면 성씨 가문 안주인으로서 누렸던 모든 걸 잃게 될 터.
경제적 독립의 전제는 그녀의 사업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에스 그룹의 외동딸로 태어난 정해은은 먹고사는 걱정을 한 적이 없었다. 어릴 적부터 안락한 삶에 익숙했고 성수혁과 결혼하기 전까지는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예전의 순진했던 그 소녀가 아니었다.
주연희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그러고는 정해은의 손을 잡고 화장대 앞으로 갔다.
정해은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거울 앞에 서서 거울 속의 아름다운 얼굴을 마주했다.
“연예계에 발을 들이고 싶다는 생각 해본 적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