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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다음 날 정해은은 세수를 마치고 식탁 앞으로 왔다. 웬일인지 성수혁은 일찍 회사에 가지 않고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음식에는 아직 손도 대지 않았다. 상황을 보니 그녀와 함께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안정숙이 그녀에게 의자를 빼주었다. 정해은은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성수혁에게는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어젯밤... 잘 잤어?” 성수혁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정해은이 나이프와 포크를 든 채 멈칫했다. 잠시 후 붉은 입술을 살짝 벌리면서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럭저럭요.” 다툼도 비난도 없었고 심지어 질투 때문에 지난 일을 들추지도 않았다. 그녀의 달라진 태도에 성수혁은 오히려 어색하기만 했다. 그는 점점 야위어가는 그녀의 옆모습을 쳐다봤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있어. 감기 걸리지 않게 옷 많이 입고 다녀.” “네.” 정해은은 2초 정도 침묵했다가 덧붙였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성수혁은 어이가 없었다. “우린 부부야. 이렇게까지 예의 차릴 필요 없어.”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식사에 집중했다. “안방 한번 살펴봐. 아직 못 챙긴 물건이 있어.” 성수혁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 “무슨 물건인데요? 아주머니한테 정리해서 내 방으로 가져다 달라고 하면 돼요.” “그건 좀 곤란할 텐데.” 그는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옷이야.” 정해은은 단번에 알아차렸다. “속옷인가요?” 그러자 성수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식사를 마친 그녀는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고 휴지로 입가를 닦았다. 그러고는 빠뜨린 옷을 챙기러 2층으로 올라갔다. 아침 식사를 한 술도 뜨지 않은 성수혁도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뒤따라갔다. 정해은은 그를 무시해버렸다. 그의 다리가 길어 두세 걸음 만에 그녀의 걸음걸이를 따라잡았다. 안방 문 앞에 도착한 후에는 문까지 열어주면서 그녀더러 들어가라고 했다. 정해은이 안방으로 들어서자마자 큰 침대 위에 놓인 검은색 티팬티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자리에 멈춰 서서 아무 표정 없이 그쪽을 쳐다봤다. 성수혁은 그녀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해서 혼잣말을 이어갔다. “그냥 다시 안방으로 돌아오는 게 어때? 난 같이 자는 것에 익숙해졌는데...” “내 것이 아니에요.” 말이 뚝 끊긴 성수혁은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응?” 정해은은 옷장으로 걸어가 옷장 문을 열고 아무 옷걸이나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다시 침대로 다가가 옷걸이 끝으로 섹시하기 그지없는 티팬티를 집어 들어 성수혁에게 내밀었다. “이 속옷 내 것이 아니라고요. 난 이런 거 절대 안 입어요. 수혁 씨 여동생인 백유라한테 전화해서 물어봐요.”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하기만 했다.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을 말하는 것처럼. 성수혁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정해은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분명히 마음을 접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을 겪자 또다시 억울한 감정이 솟구쳤다. 더는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아 몸을 돌렸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성수혁이 돌아서더니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의 옷자락밖에 닿지 못했고 손가락 끝에서 미끄러져 나갔다. 결국 잡지 못했다. 성수혁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또 삐졌네.’ 2층 안방에 머문 사람이 그들 부부 말고는 백유라뿐이었다. 백유라의 속옷이 어쩌다가 그의 셔츠 속에 들어갔는지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성수혁은 머리가 지끈거려 미간을 주물렀다. ‘여기 계속 둘 수도 없으니까 유라한테 가져다줘야겠어. 유라는 순진하고 착한 애라 절대 일부러 놓고 간 게 아닐 거야.’ 만약 다른 여자였다면 성수혁은 상대방이 불순한 의도를 가진 건 아닌지 의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백유라라는 걸 알았을 때 모든 추측을 부정해버렸다. 그는 백유라가 그런 속셈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해은은 그를 믿지 않았다. 그리고 성수혁도 설명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왜냐하면 아무리 많이 설명해도 정해은의 성격이라면 결국 끝없는 싸움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더 이상 철없는 10대 소년이 아니었다. 회사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그나마 시간이 빌 때면 백유라를 챙겨야 했다. 백유라가 경성시에 온 지도 벌써 일 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가난한 시골 출신이라 번화한 대도시를 잘 적응하지 못했다. 연예계에서 일하다 보면 부정적인 영향을 쉽게 받을 수 있었다. 성수혁은 그녀가 적응하지 못할까 봐, 품행이 바르지 못한 연예인들처럼 나쁜 길로 빠질까 봐 두려웠다. 하여 시간이 날 때마다 백유라의 곁을 지켰고 성한 그룹의 힘까지 동원하여 그녀의 연예 활동을 지원한 것이었다. 비록 데뷔는 늦었지만 이미 톱스타나 마찬가지였다. 연예계의 많은 선배들도 백유라를 만나면 공손하게 대했고 아무도 그녀를 함부로 대하거나 괴롭히지 못했다. 이 모든 게 다 성수혁의 공이었다. 기억을 되찾은 후에도 어촌에서의 2년을 잊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늘 백유라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방법이 없었다. 두 여자 중에서 그에게 중요한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와 정해은은 죽마고우라 어린 시절부터 깊은 정을 나누며 지금까지 함께 걸어왔다. 그녀는 성수혁의 청춘을 함께했고 두 가문도 대대로 친분을 이어왔다. 더욱이 정해은은 성수혁의 법적 아내였다. 정해은을 선택한다는 건 곧 다른 여자에게 영원히 미안함을 안고 살아야 함을 의미했다. 백유라는 매우 순종적이었고 또 얌전했다. 성수혁이 그녀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투정도 부리지 않고 그저 그의 앞에 서서 말없이 눈물만 흘렸었다. 그 바람에 백유라에 대한 죄책감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더 커졌다... 죄책감이 깊어질수록 백유라에게 더 잘해주었다. 성수혁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들을 착하고 순수하며 약간 겁이 많고 나약한 백유라에게 보상해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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