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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정해은은 주연희가 만든 자리에 나갔다. 그녀가 등장하자마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정해은은 처음으로 연예계 거물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완전히 낯선 세계였지만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짧디짧은 삼사 초 안에 그녀는 모든 사람들을 꼼꼼히 관찰했다. 유명 감독, 작가, 그리고 촬영팀의 주요 관계자들이 있었는데 그들과 눈을 맞추고 웃으며 인사했다.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으면서 흠잡을 데 없는 모습을 보였다. 주씨 가문 또한 명문가였고 주씨 가문의 딸인 주연희가 직접 초대한 사람이기에 체면을 충분히 세워줬다. 몇 차례의 교류 끝에 모두들 남다른 분위기를 지닌 정해은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했다. 다들 배우를 옛날 시대의 광대라고 했고 나이 많은 어르신들은 여전히 편견이 남아 있어 하찮은 직업으로 여기기도 했다. 정씨 가문의 외동딸인 정해은은 경성시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는 성씨 가문에 시집갔으니 신분만으로도 이미 그들보다 높은 자리에 있었다. 설령 오늘 정해은이 거만한 태도로 사람들 앞에 나타나 그들을 마음대로 부려먹는다고 해도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정해은은 시종일관 상냥했고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사모님, 연예계에 진출하고 싶으신가요?” 감독 권기민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유명 감독인 그는 경력이 오래되어 별의별 사람들을 다 봐왔다. 물론 일부 여배우들이 재벌에 시집가려고 자존심까지 버리면서 재벌들의 내연녀가 되는 것도 수도 없이 봤다. 그런데 재벌가 안주인이 배우가 되겠다고 찾아온 건 처음이었다. 정해은이 웃으면서 차분하게 대답했다. “전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생각해요. 오직 흥미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일 뿐이죠. 저는 연기에 관심이 많아요. 배우가 되면 수많은 인물의 삶을 경험하고 다른 사람의 희로애락을 느끼며 역할을 창조할 수 있잖아요.” 권기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정중하게 말했다. “그럼 어떤 역할을 하고 싶으신가요? 아니면 특별히 사모님께 맞는 각본을 새로 만들어드릴까요?” 정해은은 백유라와 달랐다. 백유라 같은 경우는 능력 있는 백이 있는 것이지만 정해은은 아예 신분과 지위가 달랐다. 예를 들어 백유라는 자본이 뒷배를 봐주었다. 그러나 정해은은 그녀 자체가 자본이었기에 어떤 외부 자본에도 의지할 필요가 없었다.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정해은이 바로 수락하거나 몇 가지 의견을 제시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아무리 맞춤 각본이라도 부족한 점이 있을 테니까. 반드시 대작이어야 했고 최고의 제작진이 필요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정해은은 권기민의 제안을 망설임 없이 거절했다. 정해은이 권기민에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전 조연부터 시작하고 싶어요. 분량이 어느 정도든 상관없어요. 제가 흥미를 느끼고 좋아하는 역할이라면 어떤 것이든 시도해보고 싶습니다.” 권기민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실 필요가 없을 텐데요? 주산 그룹이든 성한 그룹이든 영화와 드라마에 많은 투자를 했어요. 사실 사모님께서 말씀만 하시면 여자 주인공 자리는 떼놓은 당상이에요.” 신인 여배우 백유라가 그런 케이스였다. 데뷔 초에는 아무것도 몰랐고 지금도 연기력이 뛰어나진 않지만 성씨 가문이 전적으로 밀어주니 작품이 끊이질 않았다. 그 결과 백유라는 데뷔한 지 불과 일 년 만에 단역 한 번 출연한 적도 없이 이름을 알렸다. 일 년 반의 시간 동안 백유라는 영화 한 편, 드라마 두 편에 출연했고 모두 여자 주인공이었다. 심지어 여러 작품을 동시에 촬영해도 아무도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처럼 연예계에서는 자본이 최고였다. 정해은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 이 업계에서 아직 신인입니다. 그러니 권력으로 압력을 가하거나 세력을 이용해 특혜를 받아서는 안 되죠. 그건 다른 배우들한테 불공평합니다.” 그녀는 단역부터 시작하여 점차 연기 경험을 쌓고 연기력을 향상시킬 계획이었다. 게다가 단역도 단역만의 매력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각본 관련 지식까지 배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무명인이 쓴 각본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누군가 그녀의 각본을 사겠다고 해도 그건 진정한 감상이 아니라 그녀의 신분 때문일 게 분명했다. 아첨하기 위한 감상은 정해은이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여 그녀는 소설 쓰기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소설을 잘 쓰고 이야기가 독자를 충분히 매료시킨다면 인터넷에서 상당한 팬층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방대한 팬층을 기반으로 소설이 영화나 드라마도 만들어질 가능성도 크게 높아진다. 그때 가서 원작 소설의 캐스팅만 잘한다면 영화나 드라마도 성공적으로 마무리될 것이다. 그러면 정해은의 각본 관련 계획도 좋은 시작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일들은 당장 서두를 수 없었기에 성창수에게 비밀로 하기로 했다. 적어도 할아버지가 말년에 두 사람의 이혼 때문에 속상해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했다. 이 기간에 바쁘게 지내다 보면 두 연놈과 계속 얽혀 기분이 잡칠 일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올해 겨울은 예년보다 일찍 찾아왔다. 정해은이 방에서 나왔을 때 하늘에 작은 눈송이가 흩날리고 있었다. 그녀는 흐릿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코트를 단단히 여몄다. 외출 전 성수혁 때문에 화난 바람에 급하게 나오느라 날씨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고 옷을 많이 입으라는 안정숙의 말도 듣지 못했다. 조금씩 추워지기 시작했다. “해은아, 내가 데려다줄게.” 주연희가 우산을 쓰고 달려왔고 손에 차 키를 들고 있었다. “오늘 날씨 엄청 추운데 왜 이렇게 얇게 입었어? 자, 목도리 둘러.” “연희야.” 그녀가 목도리를 풀려 하자 정해은이 말렸다. “안 추워. 네가 매일 이렇게 바쁜데 나까지 번거롭게 해서 미안해.” “정해은, 우리 사이에 그런 말 하기 있어?” 주연희는 일부러 화난 척하며 두 손을 허리에 얹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알던 사이라고.” 바로 그때 주연희의 휴대폰이 울렸다. 주씨 가문이 하는 사업이 많았다. 최고 재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크고 작은 일이 많았다. 주산 그룹이 섭렵한 분야가 매우 다양했다. 주연희의 오빠 부부는 해외 업무를 담당했다. 국내 업무는 주씨 가문의 노부부에게 맡겨졌지만 주연희가 귀국할 때마다 잠깐 일을 맡곤 했다. 이건 절대 게을리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얼른 가봐. 기사님한테 데리러 와달라고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정해은은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주연희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망설이다 우산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알았어, 그럼. 옷 많이 입고 다녀. 감기 걸리지 말고. 그리고 너 위가 안 좋잖아. 꼭 제때 밥 먹고 위에 좋은 음식 많이 먹어. 위병이 다시 도지면 힘들어.” 정해은의 눈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가득했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주연희가 떠난 후 정해은은 운전기사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점점 커지는 눈송이를 보던 그때 갑자기 산책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오래전에 눈을 맞으면서 산책했던 적이 있었다. 어느 해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대지를 덮었고 거리에는 온통 깨끗한 하얀색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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