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소년은 그녀의 손을 잡고 웃으며 장난을 쳤다.
그는 정해은의 입술에 살짝 키스하고는 속눈썹에 묻은 눈송이를 떼어준 다음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열정적인 눈빛으로 말했다.
“해은아, 난 널 평생 사랑할 거야. 우리 죽을 때까지 함께하자.”
죽을 때까지 함께하자...
정해은이 손을 내밀자 눈송이 하나가 손바닥에 떨어졌고 닿은 순간 즉시 녹아내렸다.
‘날 평생 사랑하겠다고?’
그녀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희망의 빛조차 보이지 않는 이 결혼 생활에서 사랑은 쓰면서 사라지는 물에 쓴 시와 같았고 그리면서 녹아내리는 눈밭의 그림 같았다.
이해타산 속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버려지는 사람은 언제나 정해은이었다.
정해은의 눈가에 눈물이 서서히 맺혔다. 눈을 깜빡이자 수정처럼 맑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려 땅에 떨어졌다.
분명 떠나기로 결심했는데도 수년간의 아름다웠던 시간과 행복을 떠올릴 때면 살을 발라내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그녀는 멍하니 앞을 향해 걸었다.
눈이 점점 더 거세게 내렸다. 처음에는 작은 눈송이였지만 십여 분이 흐르자 함박눈으로 변했다.
정해은의 손발이 꽁꽁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그때 머리 위로 갑자기 우산이 드리워졌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본 순간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한 남자가 그녀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그때 상대도 흠칫하는 걸 느꼈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남자의 정교한 얼굴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고 매혹적인 눈매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방탕하거나 경박한 느낌이 없이 오직 부드러움과 우아함만이 느껴졌다.
정해은은 잠시 넋을 잃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렇게 넋 놓고 바라본 남자는 그가 처음이었다.
순간 정해은의 머릿속에 이 말이 떠올랐다.
‘뛰어난 풍채와 아름다움, 세상에 둘도 없는 남자.’
“정해은 씨, 눈이 와서 길이 미끄러워요. 그나저나 왜 우산도 안 가져오셨어요?”
남자의 목소리가 한없이 부드러웠고 그녀가 상상했던 것보다 백 배는 더 듣기 좋았다.
“저를 아세요?”
정해은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녀는 본래 남들보다 섬세한 편이었기에 처음 남자를 봤을 때 그의 온화한 미소가 담긴 눈에서 미묘한 파동을 감지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녀를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정해은도 왜 이런 착각과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생겼는지는 몰랐지만 아무튼 직감이 그러했다.
남자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경성시에서 정씨 가문의 아가씨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만나서 반가워요. 기선우라고 합니다.”
정해은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기선우? 서씨 가문과 연을 끊은 유일한 후계자?’
“정해은 씨,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그러고는 들고 있던 우산을 그녀의 손에 쥐여준 다음 목도리까지 벗어줬다.
부를 때마다 ‘정해은 씨’라고 불렀다. 그녀를 ‘성씨 가문의 사모님’으로 여기지 않는 듯했다.
정해은은 어릴 때부터 항상 인기가 많았다. 그녀에게 구애하는 남자들이 끊이지 않았고 셀 수 없이 많았다.
평소의 수법대로라면 눈앞의 남자는 그녀에게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제안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 덕분에 정해은은 기선우가 그리 싫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녀는 유부녀이고 낯선 남자가 직접 집까지 바래다주는 것이야말로 비정상적인 일이었으니까.
성수혁은 남녀 간의 선 따위는 지키지 않고 다른 여자를 쉽게 받아들였지만 정해은은 함부로 하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목도리를 받지 않고 우산만 받았다. 우산을 손에 쥐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우산 감사합니다. 돈 보내드릴게요. 이 우산 제가 산 거로 하죠.”
우산을 돌려주려면 꼭 한번은 만나야 했다. 정해은은 남에게 신세 지는 걸 싫어했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우산 하나 값이 기선우에게 보잘것없는 돈인 건 알았지만 정해은이 갚지 않으면 오히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만약 거절한다면...
고개를 들어 눈송이가 점점 커지는 걸 보고는 그 생각을 바로 접었다.
별장으로 돌아가기 전에 눈에 파묻히고 싶지 않다면 얌전히 우산을 쓰고 집에 가는 것이 나았다.
“정해은 씨는 상인의 마인드를 지녔네요.”
기선우가 웃으며 말했다.
“우산 돌려주지 않아도 됩니다. 돈도 필요 없고요. 겨울이라 날이 일찍 어두워지니 얼른 집으로 돌아가세요.”
기선우는 부드럽게 쳐다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혹시 다음에 다시 만날 기회가 있다면 저의 작은 부탁 하나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정해은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네?”
“연락처 교환이요.”
만약 다음에 만날 기회가 있다면...
정해은이 반응하기도 전에 기선우는 몸을 돌려 차가운 바람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별장 안.
성수혁은 며칠간 계속 마음이 불안했다. 아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일 것이다.
연속 며칠 회사와 촬영장을 오간 데다가 백유라까지 달랬으니 지칠 만도 했다.
다만 오늘은 왠지 마음이 불안하여 오후에 촬영장에 가지 않았다.
기분이 조금 언짢아진 백유라가 투덜거리며 원망을 쏟아냈다.
성수혁은 비서에게 신상 가방을 사서 백유라에게 보내주라고 했다.
백유라는 보석, 가방, 고급 화장품, 그리고 비싼 드레스 같은 것들을 좋아했다.
성수혁에게 넘쳐나는 게 돈이었다. 이런 것들로 백유라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사줄 수 있었다.
별장으로 돌아온 그는 혼자 소파에 앉아 손목시계를 멍하니 쳐다봤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데 기사님도 부르지 않고. 정해은, 대체 밖에서 뭘 하고 다니길래 아직도 안 들어와?’
성수혁의 얼굴에 짜증이 드리워지더니 외투를 걸치고는 곧장 밖으로 나섰다.
“대표님, 어디 가세요? 기사님한테 연락할게요.”
안정숙이 앞치마도 풀지 못하고 허둥지둥 뛰어나왔다.
“괜찮아요. 내가 직접 해은이 찾으러 갈 거예요.”
성수혁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차고에서 차를 꺼내 액셀을 밟아 별장 마당을 빠져나갔다.
운전하면서 정해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성수혁은 마음이 점점 더 불안해졌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애처럼 툭하면 가출이나 하고...”
그러다가 갑자기 급정거했다.
길가에 한 노인이 앉아 있었는데 전에 성수혁과 정해은의 점을 봐주던 점쟁이였다.
성수혁이 피식 웃었다.
‘난 저런 사기꾼을 절대 믿지 않아. 해은이 같은 애만 쉽게 믿지. 해은...’
문득 뭔가 떠올라 차를 길가에 세우고는 눈먼 노인에게 다가갔다.
“저기, 영감님.”
성수혁은 노인의 앞에 서서 내려다보며 물었다.
“전에 영감님한테서 점을 본 적이 있는 여자인데 오늘 또 찾아왔었나요?”
점쟁이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텅 빈 ‘눈’이 정확히 그에게로 향했고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젊은이, 진심을 가진 이를 저버리지 말아요. 젊은이의 인연이 위태로워 보이는군요. 이대로 가다간 평생의 사랑을 잃고 고독하게 늙어 죽는 신세가 될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