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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여동생이기 때문에 그녀의 옷을 입을 수 있었고 또 성씨 저택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다. 그리고 여동생이기 때문에 정해은이 질투하는 것조차 억지가 돼버렸다. 정해은은 마음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부부로 여러 해 동안 함께 살다 보니 지금 성수혁이 화가 났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건 그의 마지막 경고였다. 그녀는 입술을 깨문 채 자신을 비웃었다.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려고 애를 썼다. “푹 쉬어, 그럼.” 그러고는 방을 나섰다. 계속 물고 늘어져봤자 무슨 소용이겠는가? 성수혁의 눈에는 억지를 부리는 여자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사모님...” 안정숙은 정해은이 걱정되어 계단 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내려오는 걸 보자마자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괜찮아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아주머니.” 정해은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안정숙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늦은 밤 정해은은 발코니의 창가에 앉아 있었다. 바람이 선들선들 불어왔고 차가운 달빛이 그녀의 몸 위로 쏟아져 내려 더욱 가녀려 보였다. 남편이 돌아온 지 1년이 되었고 기억도 되찾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불안했다. 그가 그녀의 곁으로 돌아온 적이 없다는 느낌이 자꾸만 들었다. 가끔은 그녀야말로 이방인 같았다. 어쩌면 두 사람을 방해서는 안 될지도... 그 생각이 떠오른 찰나 휴대폰이 울렸다. 확인해보니 절친 주연희였다. “해은아, 세계 일주 여행 갈래?” 아무 기대 없이 던진 질문이었다. 어쨌거나 이 바닥에서 정해은이 하루 종일 성수혁의 곁에 붙어있을 정도로 그에게 목을 맨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주연희는 매년 한 번씩은 꼭 물었다. “언제?” 주연희가 거절당할 각오까지 다 마쳤는데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 정해은이 휴대폰을 쥔 채 창밖을 내다보던 그때 주연희의 놀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해은아, 드디어 정신 차린 거야? 그 자식이랑 하루도 떨어질 수 없다고 하지 않았어?” “정신 차렸어, 나.” 하지만 주연희는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했다. “중간에 돌아가겠다고 하면 안 돼. 우리 한번 여행 가면 보통 6개월은 걸리는 거 알지?” “안 돌아가.” 정해은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스쳤다. ‘영원히 안 돌아올 거야.’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눈치 빠른 주연희는 정해은의 상태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바로 알아채고는 분노를 터뜨렸다. “성수혁이 또 널 괴롭혔어? 그 여우 년이 끼어든 거 맞지? 나 금방 귀국해서 아직 뉴스 못 봤어. 걔네 둘 혹시...” “연희야.” 정해은이 그녀의 말을 자연스럽게 끊었다. “나 너무 힘들어.” 휴대폰 너머로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르다가 주연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해은아, 정 안 될 것 같으면 그냥 헤어져. 우리 오빠가 에이스 변호사잖아. 이혼할 때 도움이 필요하면 오빠한테 도와달라고 할게. 이건 진심이야. 한번 잘 생각해 봐.” “알았어.” 정해은은 한참 입을 꾹 다물었다가 짧게 대답했다. “그럼 내가 준비하고 있을게. 아마 설 지나면 출발할 수 있을 거야. 산도 보고 바다도 보고 세상 구경 실컷 하자. 그 인간쓰레기만도 못한 남자는 쳐다보지도 말고.” 주연희의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정해은은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을 앉아 있었다. 눈물이 손등에 뚝 떨어졌다. 성수혁과 결혼한 지 7년, 하지만 진짜 부부로 지낸 건 고작 5년뿐이었다. 2년은 다른 여자 옆에 있었다. 3년 전 해난 사고로 성수혁은 행방불명이 되었었다. 그때 정해은은 성수혁의 걱정에 밥도 먹지 못했고 잠도 자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순식간에 뼈만 앙상하게 남을 정도로 야위었다. 바람만 불어도 쓰러질 것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성씨 가문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무려 2년이나 성수혁을 찾아 헤맸다. 살아있다면 산 사람을 만나야 했고 죽었다면 시신이라도 찾아야 했다. 성수혁이 성한 그룹의 유일한 후계자였기에 찾기 전까지는 절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게 2년 만에 작은 어촌에서 기억을 잃은 성수혁을 찾았다. 그를 거둔 건 한 여성 어부였는데 바로 지금의 인기 배우 백유라였다. 성수혁은 기억을 잃은 2년 동안 백유라와 함께 지냈다. 하루 종일 붙어 다녔고 남녀의 감정까지 싹텄다. 성씨 가문은 경성시에서 최고의 권력과 지위를 지닌 가문이었다. 성수혁의 할아버지인 성창수는 그가 어부를 만나는 걸 죽어도 용납하지 않았다. 게다가 기억을 잃은 상태라 완전한 성수혁이 아니었다. 성창수의 명령이 떨어진 후 성수혁은 강제로 경성으로 끌려왔다. 최고의 치료와 최첨단 기계로 마침내 모든 기억을 되찾았다. 기억이 돌아온 다음에는 더 이상 집으로 돌아오는 걸 거부하지 않았다. 완전한 기억을 가진 성수혁은 정해은과 백유라 사이에서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정해은을 선택했다. 이번엔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고 그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다. 성씨 가문은 보상 차원에서 백씨 가문에 거액의 돈을 주었다. 그 덕에 백씨 가문은 가난에서 벗어나 그 지역의 졸부가 되었다. 그리고 백유라를 전적으로 지원하여 톱스타로 만들었다. 연예계는 자본이 지배하는 곳이다. 성씨 가문이 누군가를 밀어준다면 스타가 되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여 백유라는 데뷔 1년 만에 톱스타가 되었다. 정해은은 처음엔 성수혁이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녀만 웃음거리가 돼버렸다. 성수혁이 돌아오긴 했어도 마음은 항상 다른 여자에게 머물러 있었다. 심지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정해은을 택했기 때문에 백유라에 대한 미안함만 더 깊어졌다. 돌아온 후에도 성수혁은 백유라를 끊임없이 챙겼다. 1년 동안 백유라의 전화 한 통에 그가 집을 나갔던 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며칠 전은 정해은의 생일이자 두 사람의 결혼기념일이었다. 이날을 위해 그녀는 많은 준비를 했고 그와 단둘이 제대로 밥 한 끼 하고 싶었다. 그런데 휴대폰 너머 백유라의 울음 섞인 목소리를 듣자마자 성수혁은 바로 젓가락을 내려놓고 급히 나갔다. 이런 일이 수도 없이 많았기에 붙잡아도 결과는 똑같다는 걸 정해은은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다투기도 했었다. 하지만 성수혁은 늘 그저 여동생이고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라는 말로 대충 넘어갔다. 그 말이 사실이긴 했다. 백유라는 성수혁의 은인이자 성씨 가문의 은인이었기에 그녀는 무조건 참아야만 했다. 성창수는 성씨 가문 사모님이라면 아량이 넓어야 한다고 정해은을 달랬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도 성수혁이 실제로 바람을 피운 게 아니라고 했다. 심지어 그녀의 친정아버지마저... 1년 전 성수혁이 기억을 되찾았을 때 정해은은 헤어지자는 얘기를 한번 꺼냈었다. 그가 발견된 그 어촌에 정해은도 직접 갔었다. 기억을 잃은 성수혁의 두 눈에 그녀에 대한 경계와 거부감만 가득했다. 그런데 백유라를 쳐다볼 땐 한없이 다정했다. 다행히 기억을 되찾은 후 그는 성씨 가문의 안주인은 오직 정해은일 뿐 다른 사람은 절대 안 된다고 약속했다. “해은아, 성씨 가문의 안주인은 너뿐이야. 나랑 유라는... 그때는 기억을 잃은 상태라 다 무효야. 지금은 유라를 여동생이자 생명의 은인으로밖에 안 봐.” 성격이 차가웠던 성수혁은 남에게 설명하는 걸 싫어했고 귀찮은 일과 사람을 멀리했다. 그런 성수혁이 참을성 있게 설명해줬기에 그녀도 백유라라는 ‘여동생’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젠 너무 지쳤다. 매일 아량이 넓은 척, 상냥한 척하며 품위 있는 성씨 가문 사모님으로 살아갔지만 남편은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그녀를 혼자 두고 가버렸다. 그리고 다른 여자를 그들의 안방에 재웠고 홀로 기다리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떠나는 게 서로에게 최선일 듯싶다. 성수혁이 결혼을 깨는 악역을 하고 싶지 않다면 정해은이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면 되었다. 그때 가서 기자들의 질문도 그녀 혼자 감당할 생각이었다. 그저 벗어날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그날 밤 정해은은 게스트룸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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