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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정해은은 둘 사이에 처음 문제가 생겼던 때가 떠올랐다. 성수혁이 실종된 지 2년 만에 돌아온 첫 달이었다. 어촌에서 돌아온 그는 백유라까지 경성시로 데려왔다. 목숨을 구한 은인이자 여동생이라는 명목으로. 그리고 집값이 하늘을 찌르는 경성시에서 별장 한 채를 통째로 선물했다. 그날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데 성수혁은 뭐가 그렇게 초조한지 자꾸 휴대폰을 힐끔거렸다. 뜸을 들이는 그의 모습에 정해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애써 감정을 다잡았다. 그런데 잠시 후... 성수혁이 벌떡 일어나더니 잔뜩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해은아, 유라가 배가 아프대. 가봐야겠어.” “배 아프면 병원에 가야죠. 수혁 씨가 의사도 아닌데.” 정해은은 불만을 억누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의사가 해결할 수 없는 거라서 그래... 굳이 의사한테 갈 필요도 없고.” 그러고는 외투를 껴입었다. 그의 얼굴에 걱정과 긴장이 가득했다. “유라는 몸이 많이 약해. 게다가 경성에는 처음이라 많이 낯설 거야. 누가 옆에 있어야 안심한다고.” 정해은은 고개를 들고 성수혁을 쳐다봤다. 눈치 빠른 그녀라 어찌 된 건지 단번에 알아챘다. “생리통이죠?” 그녀는 소란을 피우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 그 순간 성수혁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역시 그녀의 예측이 맞았다. “먼저 먹어. 금방 다녀올게.” 말하는 동시에 문을 나섰다. 그때 정해은이 뒤에서 외쳤다. “가지 말라고 하면요?” 하지만 들려오는 건 쾅 하고 닫히는 문소리뿐이었다. 과거의 기억에서 깨어난 정해은은 무의식적으로 볼을 만졌다. 어느새 눈물이 볼을 흠뻑 적셨다. 대체 무엇 때문에 사랑이 변하고 잊힌 것일까? 정해은과 성수혁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랐다. 그들의 결혼에 복잡한 이익 관계가 섞여 있긴 했지만 마음은 진짜였다. 서로가 서로의 첫사랑이었고 소년 시절 성수혁은 지금처럼 냉랭하지 않았다. 그때의 그는 거만하고 제멋대로였다.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걸 좋아했고 경성의 악동으로 유명했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아 또래들 중에서는 고집이 최고로 셌다. 하지만 정해은에게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 시절 그 소년은 정해은이 목숨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라고 말했었다. 하늘에 별은 많으나 정해은은 하나뿐이라며 그녀만 있으면 된다고, 평생 변하지 않겠다고 했었다. 진심을 의심한 적은 없었다. 다만 한순간에 변할 뿐이었다. 아무리 깊은 사랑이라 해도 긴 세월이 지나면 달라지기 마련이다. 정해은은 휴대폰을 꺼내 성수혁에게 문자를 보냈다. [생일 선물은 됐어. 그런 일에 시간과 정력을 낭비할 필요 없어.] 뒤늦은 보상 따위 이젠 필요가 없었다. 한편 차 안에 있던 성수혁은 그 문자를 보자마자 가슴이 철렁했다. 저도 모르게 마음이 답답해졌다. 정씨 저택. “이혼하겠다고? 미쳤어?” 정해은의 아버지 정태균이 노발대발했다. “그건 생각도 하지 마!” 정씨 가문은 몇 년째 성씨 가문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두 가문의 관계가 끊어지면 정씨 가문은 곧바로 쇠퇴의 길로 들어설 것이다. “해은아, 대체 무슨 일이야? 수혁이랑 지금까지 잘 지내지 않았어?” 분노하는 정태균과 달리 어머니 김미경은 그래도 차분했다. 정해은의 성격과 외모 대부분이 어머니를 닮았다. “엄마, 그 사람 마음속에는 백유라밖에 없어요.” 가족 앞에서 마음을 터놓다 보면 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쉽다. 정해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안 돼.” 정태균이 차갑게 말했다. “무슨 이유든 이혼은 절대 안 돼. 밖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건 남자들의 본성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진짜로 바람피운 것도 아니잖아.” 정태균이 서리 내린 얼굴로 딸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혼했다간 호적에서 파버리는 수가 있어.” 정해은은 흠칫 놀랐다가 이내 자신을 비웃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경우란 말인가? 장사꾼은 항상 이익이 우선이었다. 이익만 얻는다면 친딸의 행복 따위 짓밟아도 상관이 없었다. “아버지, 저 아버지 딸 맞아요? 물건 아니고요?” 눈물을 참으려고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만 해요. 뭐라 해도 한 가족인데 왜 화를 내고 그래요?” 김미경은 마음 아파하며 정해은을 품에 끌어안았다. 그제야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엄마, 저 먼저 갈게요.” 정해은은 고개를 숙인 채 웅얼거렸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이혼은 이미 돌이킬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 이젠 지칠 대로 지쳐 더 이상 놀아날 기력이 없었다. “해은아...” 김미경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정해은을 붙잡으려 했다. “날도 어두운데 오늘은 그냥...” “가라고 해!” 정태균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이젠 눈에 뵈는 게 없어, 아주.” 정해은은 집을 나와 하늘을 올려다봤다. 밤하늘에 별은 반짝였지만 달은 구름에 가려져 희미한 윤곽만 보였다. 그녀는 자신을 비웃듯 피식 웃었다. 만약 이혼하게 되면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때 성수혁과 결혼할 때도 맨몸으로 왔으니 떠날 때도 맨몸으로 나가야지 않겠는가? 마음이 완전히 재가 돼버렸다. 그때 휴대폰이 갑자기 울려 확인해봤더니 낯선 번호로 온 메시지였다. 사진 한 장이었는데 백유라와 성수혁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속 백유라는 아직 분장을 지우지 않았다. 옛날 전쟁 시대를 배경으로 한 공포물이었고 극 중 그녀는 유학 갔다가 돌아온 부잣집 딸 역할을 맡았다. 그나저나 백유라의 외모가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해은이 청순한 스타일이라면 백유라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전형적인 미인상이었다. 요염하고 사랑스러웠으며 눈동자에 별이 가득 담긴 듯 눈부시고 오만했다. 그리고 성격이 활발해서 차분하고 침착한 정해은과 더욱 대비되었다. 정해은은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그녀가 남자였다면 백유라 같은 여자를 더 좋아했을지도 모른다고. 젊고 예쁜 데다가 성격도 밝았고 언제나 에너지가 넘쳤다. [해은 언니, 보고하러 왔어.] 귀엽고 익살스러운 이모티콘까지 덧붙여 보냈다. [화내지 마, 언니. 사실 수혁 오빠랑은 그냥 순수하게 오빠 동생 사이일 뿐이야. 옛날 일은 벌써 다 잊었어.] [그때 오빠가 맨날 나한테 장가오겠다고, 나랑 영원히 함께하겠다고 했지만 그게 다 오빠가 기억을 잃은 바람에 언니를 잊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아. 2년 동안 나한테 했던 맹세는 그저 한낱 꿈이었다고 생각할게. 난 언니를 진짜 친언니라 생각하고 있어. 그러니까 제발 화내지 마.] 백유라가 연이어 메시지를 보냈지만 정해은은 답장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음 날, 성수혁이 노발대발하면서 정해은을 찾아왔다. 이른 아침 정해은이 아침을 먹고 있는데 대문이 갑자기 벌컥 열리더니 성수혁이 어두운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정해은, 대체 언제까지 억지를 부릴 거야?” 질책과 분노가 뒤섞인 질문이 그녀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당황한 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또 뭘 어쨌는데요?” 정해은은 놀란 기색을 감추고 성수혁을 똑바로 쳐다봤다. 짝. 그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성수혁이 그녀를 때린 것이었다. 거의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네가 한 말 때문에 어제 유라가 죽을 뻔했어. 알아?” 성수혁의 얼굴이 짙은 어둠으로 뒤덮였고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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