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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볼에 뒤늦게 얼얼한 통증이 밀려왔다. 정해은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성수혁의 차가운 얼굴을 보면서 자신을 비웃듯 웃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데요?” 소위 ‘증거’라는 것을 눈앞에 들이밀었을 때 정해은은 차갑게 웃었다. 그녀는 성수혁의 음산한 얼굴과 분노로 타오르는 눈동자를 노려보면서 비아냥거렸다. “이렇게 더러운 욕설을 난 입에 담지도 않아요. 그리고 익명 메시지는 누구나 다 보낼 수 있는 거라고요.” “네가 아니면 누군데?” 성수혁의 분노가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정해은이 변명하려 들자 앞으로 다가와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꽉 붙잡았다. 그 통증에 그녀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정해은, 성씨 가문의 안주인 자리도 이미 너한테 줬어. 그 자리를 빼앗을 사람 아무도 없다고.” 그는 화가 난 나머지 손까지 부들부들 떨었다. “유라는 순진한 애야. 널 친언니처럼 따랐는데 어떻게 이런 독한 말을 내뱉을 수 있어? 유라가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알아?” 온몸으로 얼음장 같은 기운을 내뿜었고 눈빛이 그녀를 산 채로 삼켜버릴 것처럼 무서웠다. 정해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볼의 통증이 가슴의 통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린 어릴 적부터 같이 자랐어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직도 몰라요? 이건 누군가 날 모함한 거라고요.” 약한 사람은 쉽게 당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정해은이 바로 그 약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억울함과 고통이 가득한 눈빛을 마주한 순간 성수혁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다시 이성을 잃고 분노를 터뜨렸다. “누가 널 모함해? 거짓말도 좀 그럴듯하게 해야 믿지. 유라는 경성에 친구도 친척도 없어. 너랑만 친해.” 성수혁의 얼굴에 서리가 내려앉았다. 그는 정해은을 전혀 믿지 않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 서늘한 기운이 솟아올라 온몸으로 퍼져 나가더니 씁쓸함으로 가득 찼다. 정해은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성수혁을 쳐다봤다. ‘수혁 씨 마음속에 난 이렇게 속셈이 많고 질투심에 뭐든 할 수 있는 여자였구나.’ 심지어 설명조차 들으려 하지 않았다. 성수혁의 단호한 태도에 정해은은 더 말하고 싶지 않았다. “네가 저지른 일 책임져야 할 거야.” 그러고는 문을 쾅 닫고 나갔다. 백유라가 아직 병원에 있어 곁을 지키러 가야 했다. 성수혁이 떠난 뒤에야 정해은은 그동안 쌓아온 감정을 더는 참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엉엉 우는 정해은을 본 안정숙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젯밤 백유라는 ‘성씨 가문 사모님’에게서 모욕적인 메시지를 받았다. 정말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저속한 욕설이 난무했다. 그 충격과 억울함에 백유라는 목숨을 끊고 싶다는 충동마저 생겨 손목을 그었다. 하여 지금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온몸을 휘감는 무력감이 정해은을 덮쳤다. 오랜 세월 알고 지낸 정이 허술하기 짝이 없는 누명 하나 이기지 못했다. 오늘 성수혁이 집에 들어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후 4시 30분이 되자 다시 급히 달려왔다. “해은아!” 그의 두 눈에 후회가 가득했다. “해은아, 미안해. 내가 오해했어. 모든 게 다 파파라치들이 꾸민 짓이었어.” 몇 년간 부부로 지내면서 쌓아온 정이 결국 성수혁을 움직였는지 사람을 시켜 조사했다. 백유라도 생각보다 그리 어리석진 않았다. 메시지를 그녀가 직접 보낸 게 아니었다. 희생양이 나타나자마자 성수혁은 곧바로 백유라와 무관하다고 확신했다. 성수혁과 정해은의 부부 사이가 나빠졌다는 소문이 계속 그들을 따라다녔다. 기자들은 고기 냄새를 맡은 늑대처럼 두 사람 사이에 문제가 생기기를 바랐다. 그래야만 이튿날에 경성시를 뒤흔들 만한 기사를 쓸 수 있으니까. 정해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그를 쳐다봤다. 피부가 하얘서 아침의 따귀 자국이 아직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녀는 울지도, 소리치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심지어 억울해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뜻밖의 반응에 성수혁은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황급히 그녀에게 다가가 꽉 끌어안았다. “아직도 아파?” 그의 눈이 죄책감으로 물들었고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그녀의 볼을 만졌다. 정해은은 말없이 그의 가슴을 밀어내고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목이 멘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요.” ‘앞으로도 영원히 아프지 않을 거예요.’ 이혼 합의서는 이미 프린트해놓았다. 아직 얘기를 꺼낼 타이밍을 잡지 못했을 뿐이었다. 성수혁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다시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 얼굴을 그녀의 목에 파묻었다. 요즘 들어 그는 이유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백유라와 함께 있을 때도 가끔 정신을 딴 데 팔곤 했다. 뭔가가... 그를 서서히 떠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지금 정해은의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향기를 맡고 나니 불안한 마음이 드디어 가라앉았다. 성수혁이 정해은을 세게 끌어안고 뭔가 말하려던 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이 고요함을 깨뜨렸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놓지 않은 채 한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대표님, 큰일 났습니다. 백유라 씨 지금 정신 상태가 좋지 않아요. 방금 몰래 술을 마시고는 또 목숨을 끊겠다고 난리예요...” 거리가 가까워 정해은도 전화 내용을 똑똑히 들었다. 이번에도 성수혁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하더니 그녀를 밀치고 가려 했다. “가지 말아요.” 정해은은 거의 울부짖듯 외치면서 그의 소매를 꽉 붙잡았다.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손가락 마디가 다 하얘질 정도였다. 그를 잡는 게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었다. 그래도 수년간 쌓인 감정이 있어 조금 전 성수혁이 안아줬을 때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해은은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안아줬다고 흔들렸다니, 이런 자신이 참으로 한심했다. “해은아,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어?” 성수혁의 얼굴에 조급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 상황이 아주 급해. 유라는 마음이 여린 데다가 충동적이야. 사람 목숨이 걸린 일이라고...” “수혁 씨.” 정해은이 갑자기 마음을 가라앉히더니 그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수혁 씨가 사인해야 할 서류가 있어...” 잠깐 멈칫했다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땐 목소리에 그 어떤 감정도 실리지 않았다. “사인만 하면 보내줄게요.” ‘이젠 서로를 놓아주자.’ “알았어. 가져와.” 성수혁이 바로 대답했다. 정해은이 서류를 건네자 그는 제대로 보지도 않고 재빨리 이름을 휘갈기고는 후다닥 문을 나섰다. 이번엔 정해은도 그의 바람대로 더는 막지 않았다. 성수혁이 떠난 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커다란 별장이 한없이 썰렁했다. “사모님, 저녁 드시겠습니까?” 안정숙이 다가왔다. “아니요. 이만 들어가 쉬세요.” 정해은은 홀로 방으로 돌아가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제 그녀의 물건은 많지 않았다. 지난 1년간 백유라가 자주 와서 며칠씩 지냈기 때문이었다. 백유라가 마음에 들어 한다면 그게 무엇이든 성수혁은 정해은에게 양보하라고 했다. 그녀가 여동생이기에, 또 예전에 많은 고생을 했기에 많이 챙겨줘야 한다고 했다. 성수혁은 그가 결국에는 정해은을 선택했으니 백유라에게 마음의 상처를 줬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기억을 잃은 2년 동안 두 사람이 거의 부부가 될 뻔했던 건 사실이니까.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났더라면 진짜 부부가 됐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백유라였더라면 무조건 억울해할 거라고 여겼다. 정해은은 사인을 마친 이혼 합의서를 내려다봤다. 하고 싶은 말들이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대표님, 사랑하는 사람이랑 백년해로하세요.’ 오늘 밤이 지나면 정해은은 그의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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