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더 많은 컨텐츠를 읽으려면 웹픽 앱을 여세요.

제6화

한편 백유라는 성수혁의 품에서 계속 흐느꼈다. 술을 마셔 평소보다 대담해졌다. “오빠도 마셔...” 백유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술기운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런데 성수혁의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했다. 아까 겨우 진정됐던 마음이 이유 없이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눈을 감았다 뜨면 온통 정해은의 미소뿐이었다.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낯선 그 미소, 맑지만 거리감이 느껴졌다. “오빠, 내가 싫어졌어?” 백유라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거 아니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성수혁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울지 마, 유라야. 나 잠깐 어디 좀 다녀올 테니까 먼저 쉬고 있어.” “안 돼. 가지 마.” 백유라가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난 경성시에 가족도 없어. 오빠가 유일한 가족인데 이제 오빠마저 날 버리면... 내가 그렇게 미워? 그냥 죽어버릴게, 그럼.” 성수혁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앉아 그녀를 안고 다정하게 달랬다. 하지만 그의 정신은 이미 멀리 가 있었다. ‘해은이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 돌아가겠다고 약속했는데. 됐어. 내일 선물 사 들고 가서 달래지, 뭐. 걔는 성격이 워낙 온순해서 금방 풀릴 거야. 지금은 유라가 제일 중요해. 마음이 착한 유라가 이번에 억울한 일까지 당했으니 얼마나 괴롭겠어.’ “괜찮아...” 성수혁은 백유라를 끌어안으면서 가볍게 등을 두드렸다. “아무 일 없어. 다시는 네가 이런 억울한 일 당하지 않게 할게.” 백유라는 계속 훌쩍였다. 볼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성수혁의 하얀 셔츠를 적셨다. 병실 문 앞을 지키던 비서가 그 광경을 보고 살짝 놀랐다. ‘우리 대표님 심한 결벽증이 있으셔서 사모님조차도 무척이나 조심하시는데 지금 저 여자의 눈물이 옷에 묻어도 뭐라 하지 않으셨어.’ “오빠, 내 옆에 있어 줘. 가지 마... 무섭단 말이야.” 백유라가 고개를 들고 그렁그렁한 두 눈으로 쳐다봤다. 그녀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 일부러 약한 척하면 더 가여워 보였고 심지어 남자로 하여금 파괴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할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본 성수혁은 2년간의 기억이 갑자기 머릿속을 스쳤다. 눈빛이 잠시 어두워졌지만 그래도 결국 이성이 모든 걸 이겼다. “그래. 오빠가 옆에 있어 줄게.” 자신에게 상기시키려는 듯 오빠라는 말에 일부러 힘을 줬다. 시선을 늘어뜨린 바람에 백유라의 얼굴에 스친 불만을 보지 못했다. 비서는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병실 문을 닫고는 성씨 가문 본가로 전화를 걸었다. 30분 뒤 정해은은 성창수의 전화를 받았다. “할아버님.” 정해은의 목소리가 한없이 부드러웠다. “해은아, 요즘 바빠? 할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그러는데 이 늙은이 보러 본가로 와주면 안 될까?” 성창수는 어릴 적부터 정해은을 봐왔다. 그는 한때 상계를 휘어잡던 인물로 젊었을 적에는 수단이 잔인해서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성씨 가문이 오늘날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다 성창수의 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할 땐 그렇게 엄격하고 무서운 사람이었지만 정해은 앞에서만큼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이보다 더 다정하고 자상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정해은의 기억 속 성창수는 늘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딸이나 손녀가 없었기에 정해은을 아주 끔찍이도 아꼈다. 정해은이 세상에서 제일 귀엽고 착하고 좋은 애라고 생각했다. 하여 어린 시절부터 이 거물의 사랑을 거의 독차지했다. 처음에는 성씨 가문과 정씨 가문의 정략결혼을 깨려는 자들이 수두룩했다. 경성시의 수많은 재벌가 딸들이 성수혁과 엮이려 갖은 수를 썼던 것이었다. 그때 성씨 가문의 안주인이 되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가문이 셀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성씨 가문의 실권자인 성창수는 정해은만 마음에 들어 했다. 그런 성창수가 보자고 했는데 정해은이 거절할 리가 있겠는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할아버님, 그럼 지금 갈까요?” 휴대폰 너머로 성창수가 호탕하게 웃었다. “사모님, 외출하시려고요?” 안정숙이 앞치마에 손의 물기를 닦으며 다가왔다. 정해은은 입가에 얕은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고생 많았어요, 아주머니. 본가에 좀 다녀올게요. 할아버님께서 아마 저녁도 같이 먹자고 하실 거예요. 수혁 씨는... 들어오지 않을 테니까 오후에는 그냥 푹 쉬어요.” 그 말에 안정숙이 활짝 웃었다. 월급쟁이로선 일 안 하고 돈 받는 게 제일 좋았다. 마음씨가 고운 정해은은 일이 없으면 자주 가정부들에게 휴가를 주었다. 경성시의 재벌가를 통틀어 이렇게 까탈스럽지 않은 주인이 아마 또 없을 것이다. 안정숙은 문득 뭔가 떠올라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님은 얼굴도 예쁘고 마음씨도 곱고 또 성격이 다정해서 모두 다 좋아하는데 대표님은... 왜 자꾸 사모님과 싸우는지 모르겠어. 기억을 잃기 전에는 이러지 않았었는데.’ 신혼 초 성수혁의 눈에는 정해은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했기에 그의 얼굴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심지어 정씨 가문이 투자 실패로 주가가 흔들렸을 때도 화를 낸 적이 없었다. 정해은과 결혼한 것만으로도 세상 모든 근심이 사라진 것 같았다. 아무리 강한 남자라도 미인 앞에서는 무너지는 법. 정해은의 생일이 되면 어디에 있든 얼마나 바쁘든 항상 함께 보냈다. 정해은이 어렸을 때 폭우 속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어 트라우마가 생긴 바람에 천둥 번개를 아주 무서워했다. 그런 날이면 성수혁은 회의도 미루고 그녀의 옆에 있어 주려고 바로 달려오곤 했다. 그가 그녀의 옆에 있어 주려고 그런 황당한 짓을 했다는 걸 알게 된 정해은이 여러 번 꾸짖었지만 항상 눈웃음을 지으면서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안정숙도 궁금해서 물은 적이 있다. “대표님한테 사모님은 무엇보다도 중요하신 분인가요?” 그때 성수혁은 이렇게 답했다. “해은이는 내 목숨보다 소중해요.”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소중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소중하게 생각하게 된다. 성수혁은 안정숙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지금까지 그의 소원이 전부 정해은과 관련이 있었다고. 여섯 살이던 성수혁의 생일 소원은 좋은 친구 정해은과 영원히 함께 하는 것. 열여섯 살의 소원은 빨리 어른이 되어 정해은의 손을 잡고 평생 놓지 않는 것. 스무 살에는 소원이 이루어졌다. 드디어 사랑하는 정해은과 약혼하게 되었다. 스물두 살의 성수혁은 결혼식 전날 흥분한 나머지 한숨도 못 자고 다크서클이 짙게 드리운 채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데 나중엔... 안정숙은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이 넓은 별장 안에서 둘은 싸우거나 냉전만 계속 반복했다. 진심으로 사랑하던 사람들도 결국에는 서로를 싫어하게 되는 걸까?

© Webfic, 판권 소유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