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고세연은 자신이 다시 눈을 뜰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마취가 풀리자 몸은 붕대로 단단히 감겨 있었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병실은 비어 있었고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든 뒤였지만 이상하게도 모든 것이 더 선명해 보였다.
그녀는 마음을 굳혔고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이 곧바로 코치에게 전화를 걸었다.
“코치님, 생각을 정리했어요. 이번 국제 자동차 연맹 대회, 참가할게요.”
수화기 너머에서 코치의 격앙된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야지! 우리는 네가 잘할 거라고 믿고 있었어. 기훈이도 재능은 있지만 신인이잖아. 너랑은 비교가 안 되지. 마음 바꿨다니 정말 다행이다.”
국제 자동차 연맹 대회는 최정상급 국제 경기였다.
그곳에 나타나는 모든 레이서는 엄청난 주목을 받는다.
예전의 고세연은 이 출전권을 서기훈에게 양보하려 했다. 서기훈은 재능이 뛰어나지만 경력이 부족했다. 그가 이 대회에 참가해 이름을 올릴 수 있다면 순식간에 스타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녀는 오로지 그를 위해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포기하려고까지 했었다. 그런데 서기훈은 그런 그녀에게 이런 식으로 행동했다.
그 순간, 고세연의 마음 한 조각이 완전히 죽어버렸다.
이제 그녀가 바라는 건 단 하나. 정상에 서는 것뿐이었다.
병실 문이 갑자기 열렸다.
고세연은 고개를 돌려 들어오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했다. 서기훈이었다.
순간, 설명할 수 없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어떻게 저런 뻔뻔한 얼굴로 다시 자신 앞에 나타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고세연의 차갑게 얼어붙은 시선을 마주한 서기훈은 잠시 숨이 멎는 듯했다.
그녀의 눈에서 사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증오만이 또렷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눈빛이었다.
서기훈은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움찔 쥐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이 올라왔다.
마치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태도를 고쳐 잡았다.
고세연의 시선을 피한 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수표 한 장을 내밀었다.
“이건 06번 레이싱 카 보상금이야. 어제 일은 미안해. 널 다치게 하고 싶었던 건 아니야. 그때 내가 너무 이성을 잃었었어.”
고세연은 100억짜리 수표를 힐끗 내려다봤다.
그리고 조소에 가까운 미소로 말했다.
“서 도련님은 돈도 많으시네요. 송주아가 망가뜨린 차값을 이렇게 쉽게 돈으로 해결하시다니.”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서기훈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불편함과 당혹스러움, 그리고 희미한 분노까지 섞인 표정이었다.
그와 사이가 나빴던 시절조차 고세연은 그에게 이런 태도를 보인 적이 없었다.
서기훈은 무언가 변명하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휴대폰이 울렸고 송주아의 문자를 확인하자 올라오던 말은 그대로 목구멍에서 끊겼다.
그는 짧은 침묵 끝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돈은 일부는 보상이고 일부는 네 레이싱 카를 사고 싶어서야. 주아가 막 팀에 들어왔는데 마땅한 차가 없어서 네 차를 눈여겨봤거든.”
순간, 고세연의 두 손이 떨릴 만큼 세게 쥐어졌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낮게 말했다.
“내 레이싱 카는 절대 안 팔 거니까 당장 꺼져.”
서기훈은 잠시 어이가 없다는 듯 날카롭게 눈을 깜박였다. 그는 늘 떠받들어져 왔고 누구도 그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없었다. 그 불쾌감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났다.
그는 천천히 일어서서 고세연을 내려다보았다.
“서씨 가문에서 이미 우리 팀을 인수했어. 넌 팔고 싶지 않아도 결국 팔아야 해. 지금 네 몸 상태로 다시 차를 탈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런데 왜 그 차를 붙들고 있는 거야?”
그 말은 레이서에게 치명적인 모욕이었다.
레이싱 카는 레이서의 또 다른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같은 레이서로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고세연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옆에 있던 꽃병을 그대로 집어 서기훈을 향해 힘껏 던졌다.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고 온몸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당장 꺼져!”
서기훈은 잠시 음침한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문이 닫히는 순간, 고세연은 힘이 풀린 듯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분노가 가라앉자 깊고 짙은 슬픔이 뒤따라 밀려왔다.
그녀가 그토록 오래 좋아했고 마음을 다해 짝사랑해 온 사람은 결국 이런 사람이었다.
그 모든 세월이 이렇게 초라하게 무너졌다.
고세연은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눈물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그녀는 서기훈을 좋아하게 된 모든 순간을 후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