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눈앞에서 사라지는 차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서기훈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것은 그가 바라던 결과가 아니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진심으로 고세연을 내쫓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옆에 서 있던 송주아는 오히려 기뻐하는 눈치였다. 가장 큰 장애물이 사라졌으니 앞으로 우승을 차지할 사람은 자신이라고 믿는 듯했다.
강렬한 불안감이 서기훈을 삼켜버렸고 그는 무의식적으로 고세연을 쫓아가려 했다.
그 순간, 그의 움직임을 눈치챈 송주아가 재빠르게 팔을 붙잡았다.
“기훈아, 세연 씨는 그냥 화가 나서 저러는 거야. 국제 대회 참가 신청도 해놨다던데, 훈련하려면 결국 다시 돌아올 거야. 지금 굳이 찾아갈 필요 없어. 우리 서킷 말고는 제대로 훈련할 데도 없잖아.”
송주아는 몇 마디로 서기훈의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다.
서기훈도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경기에 나가려면 고세연은 반드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도리어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자신을 설득했다.
최근 들어 고세연이 지나치게 오만해졌고 한 번쯤 교훈을 줄 필요가 있다고도 생각했다.
서기훈은 마음속의 불안을 억누르며 천천히 숨을 고르려 했다.
같은 시각, 고세연은 코치를 향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떠나도 코치님은 충분히 남으실 수 있었어요. 저 때문에 떠나실 필요는 없잖아요.”
코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긴 이제 예전의 팀이 아니야. 내가 남아 있어도 의미가 없지. 그래도 계속 경기를 치러야 하니까, 마침 친구가 새 팀으로 날 초대했는데 너도 함께 가보는 게 어때?”
고세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언젠가 스스로 팀을 꾸릴 계획도 갖고 있었다. 수년간 챔피언으로서 받은 상금만으로도 충분히 운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곧 경기가 시작될 시기라 독립하기엔 적절하지 않았다. 경기는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고 코치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이런 제안을 한 것이었다.
고세연이 흔들리는 기색을 보이자 코치는 반가운 듯 말을 이어갔다.
“막 시작한 팀이긴 하지만 실력은 탄탄해. 무엇보다 드라이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떠날 수도 있고.”
‘언제든 떠날 수 있다’라는 말은 고세연의 마음을 크게 흔들었다.
새로운 경기장을 둘러본 후, 그녀는 즉시 결정을 내렸다. 경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하루라도 빨리 훈련을 시작해야 했다.
고세연은 이미 스타 선수였다. 새 팀 X와의 계약 소식까지 더해져 업계는 순식간에 그녀의 이적 소식으로 뒤흔들렸다.
서기훈이 이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심란해졌다.
고세연이 이렇게 담담하게 떠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쉬움이나 미련 같은 감정은 단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다.
‘날 좋아했던 게 아니었나? 어떻게 이렇게까지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지?’
서기훈은 필사적으로 고세연의 흔적을 찾아 헤맸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송주아의 눈에는 질투가 서렸다.
결국 고세연을 쫓아냈는데도 서기훈의 마음은 여전히 그녀에게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억울함과 불안이 뒤섞인 송주아는 옷깃을 살짝 내리고 손을 뻗어 서기훈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기훈아, 오늘은 우리가 연인이 된 첫날이잖아. 오늘은 너랑 함께 있고 싶어.”
셔츠 단추가 풀리며 송주아의 손끝이 서기훈의 가슴 근육을 스쳤다.
그러나 서기훈은 갑자기 송주아를 밀쳐냈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송주아는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
서기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자신도 이해하지 못할 감정에 휩싸였다.
짧게 미안하다고 말한 뒤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송주아는 확실히 그의 여자 친구였고 이런 상황은 자연스러워야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서기훈은 설명할 수 없는 거부감과 위화감을 느꼈다. 심지어 그 혼란 속에서도 고세연이 떠올랐다. 과거 서로 뜨겁게 얽혀 있던 순간들까지.
‘내가 미친 걸까?’
서기훈은 독한 담배를 피워 들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다.
몇 모금 들이켜자 숨이 매캐해지며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는 듯했다.
방금 송주아를 혼자 휴게실에 두고 나온 건 옳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는 담배를 끄고 다시 돌아가 사과하려 했다.
하지만 휴게실 문에 가까워지는 순간, 안에서 들려오는 송주아의 통화 소리가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엿들으려던 건 아니었지만 들려온 그녀의 말에 그의 몸을 그대로 굳혀버렸다.
“서기훈은 정말 눈치가 없어. 내가 그렇게 유혹했는데도 꿈쩍도 안 하잖아. 내가 고세연 대신 생명의 은인이 됐는데도 아직도 고세연한테 마음이 있는 것 같아.”
“쾅!”
굉음과 함께 문이 걷어차였다.
서기훈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송주아를 노려보았다.
“방금 뭐라고 했어? 네가 고세연을 대신했다고? 내 생명의 은인이 고세연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