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바다는 감정이 격해지면서 흉강 내에서 대량 출혈이 발생했고 출혈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온서진은 소식을 듣자마자 급히 달려왔고 충격에 휩싸인 나머지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여민수는 재빨리 그녀를 끌어안아 등을 다독이며 진정시키려 했다.
“바다는 분명 괜찮을 거예요. 온서진 씨도 조심해야 합니다. 온서진 씨도 뱃속의 아이도요.”
온서진은 더 흐느끼며 울었고 맥없이 여민수에게 기대어 더는 기운을 낼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아이의 병을 걱정하는 부모들처럼 서로에게 기대어 한층 더 굳건하고 친밀한 모습을 보였다.
강우희는 마치 세상에 혼자 남은 사람처럼 병실 한구석에 서 있었다. 심장은 다시 쥐어짜이는 듯 아파왔고 숨조차 가쁘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여민수가 복수심에 온서진에게 잘해주는 거로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가 진심으로 다른 여자를 바라보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그때 의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그녀의 생각을 끊었다.
“환자는 출혈이 너무 심해 B형 혈액이 필요합니다. 혈액 보관실에서 가져오려면 시간이 걸리니 혹시 이 중에 B형이신 분 계십니까?”
순간 공기가 멎은 듯 조용해졌다. B형인 사람은 여럿 있었지만 바다와 혈연이 전혀 없는 사람은 오직 강우희뿐이었다.
여민수도 그 사실을 떠올렸는지 망설임 없이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너가 피를 헌혈해.”
명령처럼 단호한 말투였다. 그에게는 그녀가 위병과 화상으로 고통받으며 치료 중이라는 사실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강우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일어나 간호사를 따라 헌혈 실로 향했다.
굵은 바늘이 핏줄에 꽂히자 개미가 피부를 파고드는 듯한 찌릿한 고통이 느껴졌다.
그녀는 늘 고통을 두려워하던 사람이었다. 예전엔 주사를 맞을 때마다 얼굴을 찡그리고 그런 그녀를 여민수가 부드럽게 품에 안아주곤 했다.
“여보, 무서워하지 마.”
그의 저음이 귓가를 스쳤던 그 기억이 너무도 선명했지만 지금 그녀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불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여민수는 다른 여자를 품에 안은 채 그들의 아이를 걱정하고 있었다.
피가 천천히 빠져나가며 생기까지 함께 흘러내리는 듯했다.
세상이 점점 희미해졌고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피를 뽑았는지도 모른 채 결국 버티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여민수가 곁에 있었다.
그는 밤새 간호라도 한 듯 얼굴이 잔뜩 야위고 안색이 창백했다.
강우희가 눈을 뜨자 그의 눈빛에는 잠깐이나마 안도와 기쁨이 스며들었다.
그녀가 막 무언가를 물으려는 순간 휴대폰 벨소리가 병실의 정적을 깨뜨렸고 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는 온서진이었다.
“바다가 깨어났어요. 여민수 씨를 보고 싶어 해요. 와줄 수 있죠?”
“알았어요.”
여민수는 짧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부드러워지는 것을 본 강우희는 그가 뒤돌아보기도 전에 시선을 피했다.
문이 닫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옆방에서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바다는 밝은 목소리로 아빠를 불렀고 그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강우희는 숨을 죽이고 오랜 기다림 끝에 여민수의 맑고 힘 있게 응답하는 소리에 심장에 망치질하듯 깊이 박히는 것을 느꼈다.
마치 그렇게 하면 옆방의 모든 온기가 자신에게서 사라질 것만 같다는 듯, 그녀는 천천히 이불 속으로 몸을 웅크리고 손으로 귀를 막았다.
며칠 동안 여민수는 옆방에 머물며 바다를 정성껏 간호했다.
밤이 깊으면 가끔 낯익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마저도 이내 사라져 꿈속의 잔향처럼 느껴졌다.
한편 병원 안에서는 온갖 헛소문이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그녀를 볼 때마다 조용히 수군거렸고 불쌍하다는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다행히도 곧 오빠 강천우의 기일이 다가왔다.
온 가족이 함께 묘원을 찾아 추모식을 올리기로 했다.
강지석과 박여금이 먼저 바다를 데리고 떠났고 여민수와 온서진 강우희는 같은 차를 타고 출발했다.
온서진은 아무렇지 않게 조수석에 앉았고 안전벨트를 매고 나서야 뒤늦게 말했다.
“이 자리는 원래 우희 자리인데... 제가 비켜드릴게요.”
하지만 여민수는 그녀의 손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온서진 씨는 제 아이의 엄마니까 여기가 당연하죠.”
엄마라는 그 한마디에 강우희의 가슴이 조여왔다.
숨이 막히는 듯했지만 그녀는 애써 눈물을 삼키며 아무 말 없이 뒷좌석에 올랐다.
묘원에 도착했을 때 바다는 이미 강천우의 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옆에 있던 박여금은 눈물을 글썽이며 꽃다발을 내려놓았다.
“천우야, 걱정 마. 우리는 바다를 잘 키울 거야. 바다는 네 아들이고 앞으로 우리 강씨 가문의 이름을 이어갈 아이야. 명절마다 와서 인사드리고 술도 따를 거야.”
대를 잇는 것, 그것이 박여금의 가장 간절한 바람이었고 그 바람을 이루기 위해 그녀는 지금 엇갈린 관계를 일부러 만들어냈다.
‘하지만 여민수가 정말 나의 바라는 대로 해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