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아들을 바라보는 박진우는 주변의 공기마저 가라앉을 정도로 안색이 어두웠다.
이번에 출소하고 돌아온 여자가 완전히 달라져 있는 것을 보니 마음속의 원한과 분노가 이유 없이 치솟았다.
결국 근원은 이 여자의 변화에 있었다.
아마 그녀는 더 이상 예전만큼 그를 사랑하지 않게 된 걸 수도 있고 또 어쩌면 모든 것이 그의 통제를 벗어났기 때문이기도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유리가 너와 이혼하겠다고 하는데 너는 아직도 이런 말이 나와?”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계단 쪽에서 들려왔다.
진은주의 부축을 받으며 계단을 천천히 내려온 박철용은 몇 사람의 맞은편에 서서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할아버지, 제 말이 다 사실이에요!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갑자기 이혼을 요구했어요. 하지만 이런 사람이 정말로 나를 떠난다 한들 어딜 갈 수 있겠어요?”
박진우의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유리를 얕보는 것이냐?”
박철용이 크게 노했다.
“유리는 살림도 잘하고 아이들 옷까지 직접 만들어 입혔으며 집안을 잘 꾸려나갔어. 훌륭한 내조자였는데 너는 대체 무엇이 불만이냐?”
말이 떨어지자 박진우는 당황한 듯 입을 다물었다.
곁에 앉아 있는 양아현은 감히 소리를 내지 못했다.
“유리는 어느 것 하나 빠질 게 없어. 너와는 비교도 안 되게 훌륭한 사람이야. 네가 소중히 여기지 않은 건 네 잘못이야, 게다가 그때 사건 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그냥 증인을 서서 부자가 함께 유리를 감옥에 넣어버렸으니 마음속에 분명히 억울함이 있을 거야. 그래서 이혼을 요구하는 거다.”
갑자기 고개를 든 양아현이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할아버지 말은 제가 성유리를 모함했다는 뜻인가요?”
“이 일은 나중에 유리가 반드시 철저히 조사할 거야. 누굴 도와준다는 말도 하지 마라. 어쨌든 죄가 있는 사람은 밝혀지기 마련이니까, 나는 유리의 사람됨을 믿는다.”
박철용의 입장은 아주 분명했다.
“아버님, 진정하세요...”
진은주가 곁에서 말리며 안타까워했다.
그들을 불러서 할아버지를 달래려 했는데 또다시 말썽을 일으킨 것 같았다.
“유리가 확실히 예전에 할아버지를 구해준 적이 있지만 사람은 결국 변하는 법이에요. 오늘 일도 보셨잖아요. 유리가 아이에게까지 손을 대려고 해요. 그런 여자가 무슨 짓을 못하겠어요.”
“그 소스는 양아현의 손을 거쳤어. 그런데 너는 왜 양아현이 한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박철용이 손에 든 단장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치자 소리가 분위기를 압도했다.
억울해하던 양아현의 눈가에 당황함과 긴장감이 스쳐 지났다.
박철용 또한 그녀의 눈빛이 변한 것을 발견했다.
“할아버지, 무슨 일이든 증거가 필요해요. 증거 없는 일을...”
“네가 유리를 모함할 때는 왜 증거가 필요하다고 얘기하지 않았어? 내가 양아현이라고 하니까 이제 와서 증거를 운운하는 거야?”
지팡이를 쥔 박철용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대영 그룹의 대표이사가 속셈이 이렇게나 많으면 언젠가는 반드시 약점을 잡힐 거다.”
“아버님, 그만 하세요.”
진은주가 손자 박강훈에게 눈짓을 했다.
“오늘 강훈이 몸이 안 좋아요. 아이 앞에서 이런 말을 하지 마세요. 아이가 놀랄까 봐 걱정이...”
할머니의 뜻을 곧바로 알아챈 박강훈은 소파에서 내려와 박철용에게 다가갔다.
“증조할아버지, 화내지 마세요. 화내면 수염이 점점 더 길어져요...”
박강훈의 한 마디에 감정이 누그러진 박철용은 아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이는 오늘 밤 할머니가 돌보게 해, 밤늦게까지 괜히 녀석 피곤하게 하지 마. 너희 둘은 당장 나가.”
박진우는 말을 맺지 못했다.
“그리고...”
박철용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박진우를 바라보았다.
“확인해 보니 유리가 정란 별장에 안 돌아갔다던데 다시 데리고 와. 만약 유리가 돌아오지 않으면 너를 쫓아낼 거야.”
말을 마친 박철용은 박강훈의 손을 잡고 재빨리 2층으로 올라갔다.
고개를 돌려 박진우를 본 박강훈은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
집에 도착한 성유리는 샤워를 한 후 침대에 누웠다.
체온도 어느 정도 내려갔고 머리도 그렇게 어지럽지 않았다.
몸을 뒤척이다가 침대 머리맡에 놓인 가방을 발견하고는 일어나 손을 넣어 고급스러운 재질의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 다시 누워 빛을 등진 채 그 검은색 명함을 바라보았다.
[박지훈. 안정 그룹 대표이사.]
눈에 들어온 몇 글자에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
박씨 가문에서 가장 실력 있는 사람이 바로 이 남자였다.
휴대폰을 꺼내 연락처를 열어 박지훈의 번호를 저장했다.
‘지금은 필요 없지만 나중에는 필요할지도...’
전화번호를 저장하자마자 화면에 모르는 번호가 떴다.
하지만 성유리는 한눈에 박진우의 번호임을 알아봤다.
출소 후 성유리는 새로운 유심카드로 바꿨다. 하지만 박진우의 지위상 성유리의 번호를 확인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잠시 생각하던 성유리는 결국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너머로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어디에 있든, 내일 바로 정란 별장으로 돌아와.”
성유리의 머릿속에 순간 박지훈이 서재에서 했던 말이 맴돌았다.
모욕적인 그 말들은 마치 날카로운 가시들처럼 그녀의 피부를 뚫고 심장 깊숙이 박혔다.
하지만 전혀 아프지 않았고 오히려 우습게 느껴졌다.
성유리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우 씨, 오늘 밤 술 많이 마셨나 보네요? 내가 공개적으로 이혼을 선언했는데 아직도 정란 별장으로 돌아오라고요? 내가 말을 잘못 했나요, 아니면 귀가 잘 안 들리는 거예요?”
전화기 너머의 박진우가 갑자기 침묵했다.
내일 성유리가 돌아오지 않으면 모레쯤 할아버지가 그를 쫓아낼 게 분명했다.
하지만 성유리는 이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이혼 문제는 돌아와서 다시 상의하자. 내일 저녁에 집에서 기다릴 테니 꼭 와서 설명해. 그렇지 않으면 쉽게 사인하지 않을 테니까.”
“또 무슨 상의가 필요해요?”
휴대폰을 쥔 성유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혼 문제는 이미 결정된 지 오래다.
감옥에 있는 3년 동안 그녀가 가장하고 싶었던 일이 바로 박진우와 이혼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박진우가 이런 태도를 보이다니,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내 사인을 원한다면 내일 돌아와. 네가 보이지 않으면 계속 시간을 끌 거야.”
박진우는 성유리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전화를 끊었다.
미간을 찌푸린 성유리는 꺼진 화면을 내려다보자 순간 속이 뒤집혔다.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것도 박진우, 이혼 서류에 사인하지 않고 시간을 끄는 것도 박진우이다.
순간 이 남자가 대체 무엇을 원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띵!
휴대폰 화면에 메시지가 하나 떴다.
바로 친구 진미연이 보낸 것이었다.
[전화 중이네? 급한 일이 있어. 메시지 보면 바로 답장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