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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박지훈은 가볍게 두드리던 손가락을 멈췄다. 성유리를 향해 있던 두 눈에 알 수 없는 미소가 담겨 있었다. 온실 속에서 곱게 자란 꽃인 줄 알았더니 역경 속에서 자란 들풀이었다. ‘정말 야망도 많은 여자야.’ 그리고 성공적으로 그의 흥미를 자극했다. 그의 눈빛에 변화가 생겼다는 걸 성유리가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한 말 모두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지금은 옛날과 달랐다. 기회가 닿는 대로 위로 올라가 진흙탕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누구든 그녀의 디딤돌이 될 수 있었다. “유리 씨가 이렇게 야망이 있는 사람일 줄은 몰랐어.” 박지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손으로 책상 가장자리를 잡고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다. “진우가 유리 씨를 잃은 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야.” 성유리가 싸늘하게 웃었다. 박진우의 눈에는 오직 첫사랑뿐이었다. 그들이 이혼하면 가장 기뻐할 사람은 바로 그였다. 그러니 안타깝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 제삼자밖에 없었다. “사람이 떠나면 잊히는 법이고 그러다 인연도 다하겠죠.” 성유리가 덤덤하게 말했다. “함께하는 과정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마지막에 가서야 결과가 모두 똑같다는 걸 알게 되니까요.” 그녀의 두 눈에 끝없는 슬픔이 가득했다. 박지훈은 그들의 결혼 생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고 두 사람의 과거를 들여다본 적도 없었지만 그녀의 말을 들으면 항상 모든 것을 내어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가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자 성유리도 떠날 준비를 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대표님도 얼른 쉬세요.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렸다. 그런데 박지훈이 뒤에서 그녀를 불렀다. “유리 씨.” “네?” 박지훈은 명함 한 장을 꺼내 성유리에게 건넸다. “재벌들의 결혼은 유리 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아. 들어오기도 어렵지만 나가는 건 더욱 어렵지. 도움이 필요하면 내가 도와줄게.” 성유리는 명함을 보면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혼 후 그녀는 박진우의 재산 중 절반을 가져갈 것이다. 박지훈의 말이 무슨 뜻인지 그녀 또한 모를 리 없었다. 다만 박지훈이 그녀를 도와주겠다고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성유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박지훈이 한마디 덧붙였다. “나한테 업계 최고의 변호사팀이 있어. 필요할 땐 언제든지 날 찾아와.” “감사합니다, 대표님.” 그녀는 잠깐 생각하다가 명함을 받았다. 박지훈이 또 입을 열었다. “몸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것 같은데 기사한테 데려다주라고 할까?” “괜찮아요.” 성유리의 예쁜 두 눈에 부드러운 기운이 감돌았다. “여긴 박씨 본가보다 택시 잡기가 훨씬 수월해서 혼자 갈 수 있어요.” 그러고는 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발걸음을 옮겨 문을 향해 걸어갔다. 박지훈은 멀어져가는 성유리의 뒷모습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웃었다. 그녀가 쉽게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명함을 준 건 박지훈의 흥미를 끄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던 그때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이 울렸다. 박지훈이 휴대폰을 귓가에 대자 정영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대표님께서 수리를 맡기려 했던 옥 말이에요. 전문가가 그러는데 하성만이 수리할 수 있다고 해요. 근데 3년 동안 종적을 감췄고 마치 증발해버린 것처럼 아무도 그분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합니다.” “찾지 못했으면 계속 찾아. 땅을 뒤져서라도 찾아내.” 그는 다시 통유리창 앞으로 걸어가 창밖의 야경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이 유리창에 비쳤고 눈에 차가운 기운이 감돌았다. 그건 어머니가 남긴 유일한 유품이었다. 원래는 난초 모양의 옥이었는데 사고로 깨져버리고 말았다. 귀국한 이후 박지훈은 정영준에게 그것을 수리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 박진우는 원래 아들과 함께 양아현을 집에 데려다주려고 했지만 가는 길에 어머니 진은주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들이 떠난 후에 박철용이 노발대발했으니 얼른 돌아와 할아버지를 달래라고 했다. 늘 할아버지를 존경해온 박진우라 당연히 거역할 수 없었다. “강훈이가 버틸 수 있을까?” 계속 차 안에 있던 양아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이모. 거의 다 나았어요.” 박강훈은 양아현의 품에 안긴 채 옅은 미소를 지었다. 세 사람이 다시 본가로 돌아왔을 땐 이미 밤 9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화가 난 박철용이 내려오지 않자 진은주가 직접 모셔오겠다고 했다. 그들은 소파에 앉아 박철용을 기다렸다. 박강훈은 심심한 듯 사방을 둘러보다가 옆에 앉은 양아현을 쳐다보았다. “이모, 오늘은 이모가 처음으로 우리 집에 온 날인데 이런 억울한 일을 당했네요.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이의 말에 양아현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모도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어. 가족 모임을 싹 다 망쳐버렸지 뭐야.” “마음에 담아두지 마. 누가 한 짓인지 나랑 강훈이는 다 알고 있어. 그리고 가족 모임을 망친 것도 네가 아니니까 미안해할 필요 없어.” 진지한 표정과 달리 박진우의 말투는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양아현이 그렁그렁한 두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연스럽게 그에게 기댔다. 그러자 박진우도 손을 뻗어 그녀의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아빠.” “왜?” 박진우가 쳐다보자 박강훈은 그를 올려다보면서 입을 삐죽거리며 물었다. “엄마가 정말 아빠랑 이혼하겠대요?” 그 말에 박진우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지면서 뇌리에 성유리의 얼굴이 스쳤다. 오늘 밤 그녀의 태도와 행동에 여간 놀란 게 아니었다. 너무나 단호하고 과감했었다. “아빠, 만약 엄마랑 이혼하면 아현 이모랑 같이 있을 수 있는 거예요?” 박진우가 아무 말이 없자 박강훈이 또 물었다. 초롱초롱한 두 눈으로 박진우를 주의 깊게 보면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기대하는 눈빛 속에 아쉬움이 약간 감춰져 있었다. ‘아현 이모는 착하고 연기도 잘하고 노래도 잘해. 게다가 나랑 자주 놀러 나가고 좋아하는 장난감도 잘 사줘.’ 그리고 성유리는 요리 솜씨가 뛰어났고 옷을 잘 만들었다. 세 살부터 여섯 살까지 입었던 옷 대부분이 성유리가 직접 천을 사서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만든 옷이었다. 그 옷을 입고 나갈 때마다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곤 했고 그건 남들이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는 옷이었다. ‘정말 너무 난감해. 도저히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어.’ ... 옆에 앉아 있던 양아현도 고개를 들고 기대 가득한 두 눈으로 박진우의 잘생긴 옆모습을 올려다보았다. 계속 아무 말도 하지 않던 박진우가 얼굴을 찡그리더니 솔직하게 말했다. “감옥에도 갔다 온 주제에 무슨 염치로 이혼을 꺼내? 박씨 가문을 떠나면 뭘 할 수 있는데? 그냥 순간적인 감정에 휩쓸렸을 뿐이야. 네 엄마가 정말 널 떠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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