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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사과?’ 그 두 글자가 귀에 들린 순간 성유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고개를 들고 박지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박지훈의 차가운 턱선이 어스름한 조명 아래에서 부드럽게 보였다. 그는 입꼬리만 살짝 올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번 가족 모임은 확실히 그의 귀국을 환영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고 또 불쾌하게 끝이 났다. “미안해요, 작은아버지...” 박진우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게 다 성유리를 막지 못한 내 탓이에요. 성유리가 제멋대로 가족 모임을 망치게 내버려 두지 말았어야 했는데. 가족들이 어렵게 모인 자리잖아요. 다음에 또 언제 이렇게 모일 기회가 있겠어요.” 박지훈은 고개를 들어 그를 무심하게 쳐다보다가 한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성유리 씨가 자신이 한 게 아니라고 했던 것 같은데. 제대로 조사해보는 게 좋을 거야. 순간적인 성급함 때문에 억울한 사람한테 누명을 씌워서는 안 되지.” 그 말에 성유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박지훈은 여전히 앞만 쳐다볼 뿐 그녀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대표님조차도 날 믿어주는데 정작 오랫동안 함께해온 남편이랑 아들은 양아현만 감싸고 돌다니.’ 박지훈의 말에 박진우 또한 당황한 듯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작은아버지가 오늘 밤에 벌써 두 번이나 성유리를 감싸고 돌았어.’ “작은아버지, 그건 작은아버지가 성유리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라서 그래요. 3년 전에도 아현이를 모함해서 감옥에 들어갔었고 이젠 친아들한테까지도 잔인한 짓을 하고 있어요. 눈앞에 뻔히 드러나 있는데 뭘 더 조사해야 한다는 거죠? 이 일은 성유리의 짓이 분명합니다.” 성유리는 저도 모르게 두 손을 움켜쥐었다. 어찌나 꽉 쥐었는지 손톱이 피부를 파고들 정도였다. 박지훈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래?” “네. 작은할아버지...” 옆에 있던 박강훈도 나서서 맞장구를 쳤다. “엄마가 정말로 예전에 아현 이모를 모함한 적이 있었어요. 그 착한 이모를 대체 왜 해하려는 건지 모르겠어요.” “질투심 때문이겠지. 네 엄마는 원래 속이 좁고 아무것도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이거든. 어쩜 감옥에 3년이나 있었는데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지. 어떻게 너한테까지 손을 댈 수 있어? 정말 엄마 자격도 없는 사람이야...” 분노 때문에 박진우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박지훈에게 푸념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녀를 헐뜯고 있었다. 책상 밑에 숨어 있던 성유리는 분통이 터져 미칠 것만 같았다. 이런 말을 예전에 들었다면 분명 절망에 빠져 울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분노 외에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이 죽어버리면 씁쓸함조차 잃게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성유리는 꽉 쥐고 있던 주먹을 살짝 풀었다. 너무 화가 났던 탓인지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가뜩이나 책상 밑이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좁은데 갑자기 움직인 바람에 그만 팔꿈치로 책상을 건드리고 말았다. 둔탁한 소리가 팽팽하게 유지되던 분위기를 깨뜨렸다. “무슨 소리예요?” 박진우는 저도 모르게 박강훈의 손을 꽉 잡았다. “작은아버지, 책상 밑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은데요?” 박지훈은 덤덤한 표정으로 성유리를 힐끗 내려다보았다가 마침 고개를 든 그녀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그녀는 단 2초 만에 다시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손을 거두었다. 더 이상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심장이 쿵쾅거려 당장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지금 이 상황은 마치 ‘불륜’을 저지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있던 박지훈은 성유리가 시선을 피하는 걸 보고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입가에 웃는 듯 마는 듯한 미소가 떠오르더니 무덤덤하게 말했다. “책상 밑에 말썽꾸러기 고양이 한 마리가 있어.” 그 말에 성유리는 긴장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순발력이 대단한데?’ “고양이가 있다고요?” 박강훈의 눈이 반짝 빛났다. “작은할아버지네 집에 고양이가 있어요?” “응.” 박지훈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막 주워온 녀석이야.” “고양이 봐도 돼요? 저 고양이 엄청 좋아하는데 엄마 아빠가 계속 못 키우게 해요...” “오늘은 안 될 것 같아.” 박지훈의 목소리에 보일 듯 말 듯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오늘 금방 데려와서 아직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어. 성격이 사나운 녀석이라 네가 놀랄 수도 있어.” 박강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다음에 볼 수 있나요?” 그는 고개만 끄덕일 뿐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박지훈이 불편해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박진우는 아이의 손을 잡고 떠나려 했다. “작은아버지, 시간도 늦었으니 강훈이를 데리고 먼저 가 보겠습니다. 나중에 시간 될 때 식사 한 끼 제대로 대접할게요.” “그래.” 박지훈은 덤덤하게 대답하면서 그들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성유리는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걸 듣고 나서야 다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야옹아, 나와...” 낮고 듣기 좋은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 순간 성유리는 온몸이 굳어버렸다. 그녀가 기억하는 박지훈은 막강한 권력을 지니고 있었고 수많은 인맥과 자원을 쥐고 있었다. 이 도시의 재계에서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항상 차갑고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느낌을 주었다. 그런 박지훈에게 이런 면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가 의자를 치운 다음 성유리는 재빨리 책상 밑에서 기어 나왔다. 손으로 책상 가장자리를 막아 주는 그의 사소한 배려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오늘 정말 감사합니다, 대표님.” 성유리는 허리를 숙여 인사하면서 환하게 웃었다. “별일도 아닌데 뭐.” 박지훈은 평소의 차가운 모습으로 돌아왔다. “게다가 우린 원래 가족이잖아. 그렇게까지 예의 차릴 필요 없어.” “곧 아니게 될 거예요.” 성유리의 말투는 무척이나 단호했고 눈빛도 확고하면서 결연했다. “전 무슨 일이 있어도 진우 씨와 이혼할 거예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에요.” 박지훈이 미간을 찌푸렸다가 덤덤하게 말했다. “진우가 그러던데 감옥에 갔다 왔었다고?” 그녀는 숨김없이 대답했다. “네.” 박지훈은 몸을 앞으로 기울여 손을 책상 위에 올려놓은 후 검은 반지를 낀 손가락으로 왼손 검지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고는 실눈을 뜬 채 빤히 쳐다보았다. “전과자면 앞으로 살기 힘들 텐데. 왜 굳이 지금 진우랑 이혼하려는 거지?” 그의 목소리가 가벼워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성유리는 시선을 늘어뜨리고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의 눈동자가 너무 깊고 칠흑처럼 어두운 겨울밤의 연못과 같아 그 속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녀가 또박또박 말했다. “예전에는 어리석어서 오직 사랑만을 좇았지만 지금은 현실을 깨달았고 정신도 차렸어요. 떠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어리석은 짓이죠. 감옥에 갔던 건 단지 저의 과거일 뿐이지,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걸 막을 수는 없어요. 그리고 결혼이 제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되도록 놔두지 않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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