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박철용은 목을 가다듬기만 할 뿐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박씨 가문의 사람들 모두 박철용이 연예계에 발을 담근 여자를 좋아하지 않아 박진우와 양아현의 교제를 반대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박진우가 이번 가족 모임에 대놓고 양아현을 데려왔으니 좋게 볼 리가 없었다.
진은주는 박강훈의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는 걸 보고는 소파 쪽으로 데리고 갔다.
박진우가 나서서 양아현을 감쌌다.
“할아버지, 아현이는 절대 그런 짓을 했을 리가 없어요. 무조건 성유리가 꾸민 짓일 겁니다. 3년 전에도 똑같은 수법으로 아현이를 모함했었거든요.”
그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눈빛도 섬뜩할 정도로 싸늘했다. 그 시각 성유리의 마음은 잔잔한 호수처럼 차분했다.
박씨 가문에서 그녀를 믿어주는 사람은 박철용밖에 없을 것이다.
“유리 씨, 아무리 나한테 앙심을 품었다고 해도 아이한테 그런 짓을 하면 안...”
짝.
그런데 양아현의 말이 끝나기 전에 성유리가 망설임 없이 가냘픈 손을 들어 올리더니 양아현의 얼굴에 찰진 따귀를 후려갈겼다.
눈앞에 벌어진 광경에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늘 온순하고 다정하던 성유리가, 힘들어도 꾹 참고만 있던 성유리가 누군가를 때리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내가 하지 않은 일은 절대 인정하지 않아요. 죄를 뒤집어씌우는 건 한 번은 참을 수 있어도 계속해서 내 한계를 시험한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목소리가 크진 않았지만 단호하고 힘이 있었다.
성유리의 두 눈에 폭풍전야와 같은 분노가 숨겨져 있었다. 박철용의 오른쪽에 앉아 있던 박지훈이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그는 손가락으로 식탁을 두드리다가 갑자기 멈추고는 입꼬리를 씩 올렸다.
‘재미있는 여자네...’
“성유리, 지금 뭐 하는 거야?”
박진우가 재빨리 다가와 얼굴을 감싸고 있는 양아현을 뒤로 끌어당기고는 성유리를 노려보았다.
“어쩜 3년이 지났는데도 뉘우칠 줄을 모르고 오히려 더 막 나가? 정말 갈수록 엉망이 되는구나.”
가정의가 마침 현장에 도착했고 진은주는 아이를 안고 의사와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성유리는 박진우를 상대할 생각이 없었고 박강훈의 상태를 확인한 다음 그냥 떠나려 했다. 그런데 뒤에 있던 그가 성유리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성유리, 오늘 여기서 확실하게 말하지 않으면 아무 데도 못 가.”
“확실하게 말하라고요? ”
성유리는 그의 손을 뿌리치면서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
“진우 씨랑 이혼하고 싶어요. 이제 확실해졌나요?”
그 말이 떨어진 순간 현장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박진우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충격에 휩싸인 얼굴로 성유리를 쳐다보았다.
가족 모임 자리에서 이혼 얘기를 꺼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성유리는 사람을 곤란하게 만드는 방법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
‘본성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딱 맞아.’
옆에서 계속 구경만 하던 박지훈은 가냘픈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하고는 그제야 제대로 살펴보기 시작했다.
하얀색 롱 원피스가 가뜩이나 깡마른 그녀의 몸을 더욱 연약하게 보이게 했다.
예쁜 얼굴은 오랜 불규칙한 식사로 인해 창백했지만 지금 이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라 오히려 생기가 돌았다.
저렇게 가냘픈 두 손에서 저런 폭발력이 나올 줄은 몰랐다. 결단력이 있고 망설이는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박지훈의 관심도 성공적으로 끌었다.
그녀의 얼굴을 볼 때마다 왠지 모르게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대체 어디에 봤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성유리, 아무리 억지를 부리고 싶어도 장소는 가려야지. 할 말이 있으면 따로 해. 우리 둘의 사적인 일을 가족 모임에서 얘기하는 게 창피하지도 않아?”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창피하지 않는데요?”
성유리는 계속해서 양아현을 감싸고 도는 박진우를 노려보면서 싸늘하게 말했다.
“내가 강훈이의 소스에 겨자를 넣었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다른 사람 대신 죄를 뒤집어쓰면 창피하지 않은 건가요? 일을 저지르고도 책임지지 못하는 사람이야말로 창피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성유리, 적당히 해...”
박진우의 말이 끝나기 전에 가운데 자리 쪽에서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우야, 지금 아무 증거도 없는데 유리 씨가 한 거라고 섣불리 단정 지어서는 안 되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고 성유리 또한 그쪽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순간 성유리는 그의 눈에서 복잡한 감정을 본 듯했다.
박진우도 고개를 들었다. 박지훈이 시선을 옮기던 그때 정확하게 그와 두 눈이 마주쳤다.
박진우는 저도 모르게 온몸이 굳어버렸다.
‘작은아버지가 왜 성유리를 감싸고 돌지?’
박진우의 아버지에게 세 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박지훈은 박철용과 최순영의 늦둥이 아들이라 박진우와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았다.
박지훈은 이미 오래전에 독립하여 창업했고 현재는 그만의 사업 제국을 건설했다. 회사의 자산 규모도 박씨 가문의 자산과 실력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그가 상업계에서 마음대로 활보하더라도 감히 뭐라고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하물며 박씨 가문은 오죽하겠는가?
박진우는 말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그때 의사가 2층에서 내려왔다. 상황이 심각하진 않고 이미 아이에게 약을 먹였다고 했다.
의사가 떠난 후 박진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밤에 결판을 내자.”
“나도 진우 씨랑 결판을 내고 싶어요. 다들 여기 모인 김에 증인이 되어 주세요.”
성유리가 소파 쪽으로 걸어가더니 가방에서 서류 한 장을 꺼냈다. 그러고는 박진우에게 다가가 이혼 합의서를 앞에 내려놓았다.
서류를 받은 박진우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혼 합의서를 이렇게 빨리 준비했을 줄은 몰랐다.
“여기 사인만 하면 우린 완전히 끝이에요.”
그러고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지긋지긋한 그곳을 떠났다.
박진우는 멀어져가는 성유리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이혼 합의서를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에게 침묵의 따귀를 날린 것과 다름없었다.
‘대단한데?’
구석에서 지켜보고 있던 박지훈의 눈빛이 따뜻한 조명 아래에서 빛나고 있었다. 박지훈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오늘 밤의 이 드라마는 정말 흥미진진했다.
박씨 본가 대문을 나선 후 성유리는 콜택시 앱을 켰다. 집으로 돌아갈 택시를 부르려 했지만 본가가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어 10분을 기다렸는데도 아무도 주문을 받지 않았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이를 악물고 길을 따라 걸어 내려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되돌아가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그 정도의 자존심은 있어야 했다.
그런데 5분도 채 걷지 않았는데 갑자기 현기증이 밀려왔다.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이마를 짚어봤다. 열이 다시 오르는지 이마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그때 뒤에서 한 줄기 차량 불빛이 비쳐왔다.
마이바흐 한 대가 성유리의 옆을 지나쳤다가 계속 가지 않고 옆에 멈춰 섰다. 뒷좌석 유리창이 천천히 내려갔다.
성유리가 고개를 돌리자마자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리 씨, 내가 데려다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