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본인이 필요할 때 가져다가 3년 동안 개고생시키고는 이제 와서 내쫓으려 하다니? 장난하나?
“알겠어요.”
바보가 아닌 이상 최소한의 눈치는 있는 법이다. 나는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말했다.
“고마워요. 최대한 멀리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게요.”
“엄마, 아빠! 쟤 얼마나 천하태평인지 알아요? 어젯밤만 해도 강현과 잤다니까요? 천한 년! 죽여버릴 거야.”
윤아린이 씩씩거리며 뺨을 때리려고 팔을 번쩍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의 손길을 피했다.
“강현 씨는 여자다운 사람을 좋아해요. 내 얼굴에 상처라도 나면 숙녀 이미지에 타격을 입을지도 모를 텐데?”
“이 년이! 넌 그냥 장난감에 불과해. 대체품 주제에 나대지 마.”
비록 말은 거칠게 해도 손찌검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를 빤히 쳐다보며 경고했다.
“두고 봐. 강현이가 저녁에 프러포즈한다고 했으니 애인 노릇도 오늘부로 끝일 테니까.”
프러포즈?
나는 고개를 떨구었고,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만큼 주먹을 꽉 쥐었다.
저녁이 되자 윤아린은 마지못해 나를 현장으로 데려갔다.
프러포즈 장소는 이강현의 명의로 된 개인 호텔이었다.
화려한 장식만 봐도 윤아린을 향한 사랑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윤아린이 비아냥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힐긋 쳐다보더니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2층으로 올라갔다.
나는 몸이 안 좋아서 소파에 기대어 쉬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손님들이 점점 더 많아졌다.
둘러보니 하나같이 난다 긴다 하는 거물이며 상류층에서 손에 꼽히는 존재였다.
프러포즈 규모가 결코 작지는 않았다.
어느덧 짜증이 스멀스멀 치밀어 올랐다. 정말로 프러포즈에 성공하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발코니로 걸어갔다. 차가운 바람이라도 쐬면서 머리를 식히려고 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남자 목소리가 문득 들려왔다.
“강현아, 오늘 저녁 프러포즈하기로 마음먹은 거야? 세아는 너 많이 좋아하는 것 같던데?”
다름 아닌 김정훈이었다.
흠칫 놀라는 와중에 또 다른 남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강현이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나 봐. 내가 그렇게 쉽게 넘어갈 것 같아? 어차피 데리고 놀다가 버릴 참이었어.”
김정훈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널 형부로 여기고 3년을 곁에서 시중을 들었는데 감동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돈을 받고 걱정하는 척 연기했을 뿐이야. 감동은 무슨.”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내가 누군지 알아냈단 말인가?
이내 조마조마한 마음을 부여잡고 자리를 떠났고 더는 듣고 있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잠시 후 이벤트가 시작되자 이강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윤아린이 그와 함께 무대에 올랐고 뭇 여자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샀다.
눈앞의 광경을 지켜보자니 가슴이 미어질 듯했다.
나는 대체 뭐란 말이지?
“뻔뻔한 거치고 참 안 됐지. 죽 쒀서 개를 줬으니.”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눈에 거슬리는 장면을 더는 지켜볼 수 없었던 나는 뒤돌아서 로비를 가로질러 뛰어갔다.
다만 무대 위의 이강현이 떠나가는 내 뒷모습을 보며 안색이 싸늘하게 식어간 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밖에서 넋을 잃고 있던 와중에 김정훈을 마주쳤다.
“아린아, 이벤트가 곧 시작할 텐데 네가 자리를 비우면 어떡해?”
이내 눈살을 찌푸리더니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
나는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끝내 뒷정원으로 끌려갔다.
하늘에서 흩날리는 눈송이와 땅을 수놓은 장미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장관을 이루었다.
무의식적으로 숨을 죽인 채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장미로 뒤덮인 바닥에 서 있는 윤아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치 한 마리의 백조처럼 우아했다.
내가 나타나자 모든 시선이 집중되었고, 조롱이 가득한 눈빛은 나를 더욱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만들었다.
윤아린의 발걸음에 맞춰 드레스 자락이 나풀거렸고, 하이힐을 신은 덕분에 나보다 키가 훨씬 더 컸다.
“세아야, 너무 속상해하지 마. 형부가 방금 너한테 어울릴 만한 남자를 직접 찾아주겠다고 약속했거든.”
겉으로는 나를 위하는 척 말하더니 곧바로 허리를 숙여 바짝 다가와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리고 둘만 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악의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너 같은 미천한 사람은 기껏해야 장난감에 불과해. 감히 강현에게 흑심을 품어? 그럴 만한 자격은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