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박태준은 여러 개의 명품 쇼핑백을 들고 온서연의 사무실 문을 요란하게 열었다. 그의 얼굴에는 온서연이 더할 나위 없이 익숙한, 사람을 달래려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서연아, 우리 착한 서연이, 나 보고 싶었어?”
그는 팔을 벌려 그녀를 껴안으려 했다. 온서연은 고개를 들어 잔잔한 물결 하나 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해외 시장 분석 보고서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업무 인계 핵심 서류 중 하나였다.
3년 전, 박태준이 ‘부부 일체’를 이유로 그녀를 설득해 다박 그룹의 마테팅 사업부 부팀장으로 들어오게 한 후, 이 사무실을 3년간 사용하며 그를 위해 수많은 시장을 개척했다.
인제 보니, 이 모든 것이 잘 짜인 함정 같았다. 그의 방문에도 그녀의 움직임은 조금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다만 옅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박태준의 팔이 허공에서 굳더니 얼굴에 뜬 미소가 살짝 멈췄다. 그는 온서연이 다루고 있는 서류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단지 평범한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온서연이 박씨 가문을 떠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한 그는 태연하게 팔을 내리고 쇼핑백들을 사무실 책상의 빈 곳에 내려놓았다.
“봐, 다 너를 위해 사 온 선물이야. 이번엔 내가 잘못했어. 기념일에 출장 가는 건 안 되는 거였는데.”
그는 주황색 상자를 하나 집어 들고 평소의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에르메스 신상품 가방이야. 네가 지난번에 좋아한다고 했던 색깔인데 한 달이나 기다려서 구했어.”
온서연이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자 그는 또 벨벳 소재의 주얼리 상자를 열어 그녀의 앞에 내밀었다.
“그래프의 다이아몬드 팔찌야. 가장 인기 있는 나비 시리즈인데 예쁘다고 칭찬했던 게 기억나서 샀어.”
마지막으로, 그는 포르쉐 차 키를 보석함 옆에 가볍게 내려놓았다.
“포르쉐 새로 나온 한정판 모델이야. 하얀색이고. 하얀색이 너한테 제일 잘 어울려.”
온서연의 시선이 마침내 그 비싼 선물들을 가볍게 훑었다. 예전에 그가 이렇게 애써 그녀를 달래려 했다면 그녀는 벌써 마음이 누그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이 모든 물건이 그가 감추려 했던 거짓말을 가격표처럼 매기고 있는 것 같았다.
이때, 누군가 사무실 문을 가볍게 노크했다. 답변을 듣기도 전에 안해린이 서류를 들고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안해린은 ‘목숨을 구해준 은혜’로 인해 온서연에게 발탁되어 회사에 들어왔고, 지금은 박태준의 행정 비서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박 대표님, 서연 언니.”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더니 책상 위에 놓인 선물들을 훑어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와! 박 대표님, 서연 언니에게 정말 잘해주시네요. 출장에서 돌아오면서 이렇게 많은 선물을 사 오시다니. 정말 부러워요.”
박태준의 얇은 입술이 살짝 올라갔지만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온서연의 곁으로 다가가 다시 그녀의 어깨를 감싸려 하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연아, 내가 이만큼 성의를 보였는데 이번만 용서해 주면 안 될까?”
온서연은 그의 손이 자신에게 닿기 전에 눈에 띄지 않게 옆으로 비켜 다른 서류를 집어 들며 접촉을 피했다.
그녀의 시선은 그의 옆모습을 스쳤다. 그 얼굴에 남아있던 싸워서 남은 미세한 상처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옅어져 있었다. 만약 그녀가 박태준이 며칠 전에 무슨 짓을 했는지 몰랐다면 지금은 발견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심장이 갑자기 쿵 내려앉았다.
‘지난 몇 년 동안, 태준 씨는 나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숨겨왔던 것일까?’
그가 갑자기 취소했던 약속, 갑자기 가야 한다고 했던 회의... 그녀가 한때 굳게 믿었던 모든 설명이 인제 와서 생각해보니 허점이 가득했다.
“맞아요. 서연 언니.”
안해린이 몇 걸음 앞으로 다가서 다이아몬드 팔찌에 눈빛을 고정한 채 동경하는 듯하며 말했다.
“이건 그래프의 한정판이잖아요. 정말 아름다워요.”
박태준은 안해린의 말에 답하지 않고 온서연을 바라보며 그녀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는 온서연의 앞에서는 여전히 안해린과 단순한 상사와 부하 관계처럼 거리를 유지하는 듯했다.
그녀가 보았던 장면들이 다시 떠올라 지금의 자제는 더 깊은 위선일 뿐이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온서연은 잔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해린아, 서류는 내려놓으면 돼. 나는 잠시 후 회의에 필요한 자료를 정리해야 하니 조용히 있었으면 좋겠어.”
이 한 마디는 그만 나가보라는 뜻이 명백했다. 안해린의 미소가 잠시 굳어졌다가 이내 자연스러워졌다.
“네, 서연 언니.”
그녀는 서류를 내려놓으며 박태준과 눈빛을 빠르게 교환했다. 희미한 억울함이 담겨 있었다. 박태준은 무심한 듯 수습하며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해린, 가서 일 봐. 서연이 조용히 있어야 하니까.”
안해린은 순종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떠났다. 박태준은 여전히 온서연의 옆에 서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자신도 모르게 안해린의 뒷모습에 머물고 있었다.
온서연은 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전에 그들 셋이 함께 식사하거나 회사 연회에 참석했을 때, 박태준과 안해린은 늘 할 말이 끊이지 않았다. 그때는 그들이 취향이 비슷하고, 좋은 동료라고 생각했다.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그것은 단순히 취향이 비슷한 것이 아니라 연인 간의 눈빛 교환이었다. 온서연의 마음은 얼음물에 잠긴 듯, 조금씩 가라앉으며 떨릴 정도로 차가워졌다. 그 배신은 일찍이 흔적이 있었으나 그녀는 바보처럼 ‘사랑’이라는 것에 눈이 멀어 있었다.
박태준은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온서연은 이미 정리된 서류와 노트북을 들고 일어섰다.
“회의가 있어서 먼저 가야겠어요.”
그녀는 더는 그를 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열었다. 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는 안에서 들려오는 박태준의 아주 가벼운, 나직한 탄식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과거 그녀의 마음을 녹였던 순간들이 이제는 심장을 찌르는 바늘이 되었다. 그녀는 벽에 기대, 가슴 속에서 올라오는 생리적인 역겨움을 억눌렀다.
몇 분 후, 온서연은 휴대폰을 꺼내 차가운 화면 위를 터치했다. 그녀는 소리 없이 사무실 내부의 CCTV 화면을 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