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같이 자요
“가만히 있어.”
유정한은 다소 쉰 목소리로 경고하였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마침 강이영의 쇄골에 닿았다.
“다, 다 됐어요?”
강이영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고 긴장했는지 발가락까지 오므라들고 말았다.
유정한은 이를 빠득 갈고 있었고 거울 속에 어둠으로 일렁이는 그의 눈빛이 비쳤다. 그리고 툭 튀어나온 시퍼런 핏줄도 말이다.
‘빌어먹을. 내가 언제 남을 시중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하필이면 몸도 작고 나이도 어린 애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니 유정한은 차마 모진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한참 후 강이영이 갑자기 물었다.
“여보, 목말라요?”
“아니.”
강이영은 친진난만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럼 왜 자꾸 침 삼키는 거예요?”
유정한은 벌떡 몸을 일으켜 드라이기를 꺼버렸다.
“밥 먹으러 가자.”
머리를 다 말린 후 두 사람은 식사하려고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유정한이 막 자리에 앉아 눈앞에 있던 작은 접시는 산처럼 가득 찼다.
“여보, 오늘 하루 종일 일하느라 정말 수고했어요. 많이 먹어요. 아, 이것도 먹어봐요!”
강이영은 눈을 반짝이며 그에게 반찬을 집어주었다.
“아주머니가 오늘 이 죽순이 아주 싱싱하다고 하네요. 그리고 이 생선도...”
“나한테 안 집어줘도 돼. 그러니까 너도 얼른 먹어.”
유정한은 차가운 얼굴로 돼지고기 한 점을 집어 그녀의 그릇에 놓았다.
“고양이처럼 빼빼 말라서.”
유정한은 그녀가 급하게 밥을 퍼먹는 걸 보며 미간을 확 구겼다.
“천천히 씹어 먹어. 삼십 번은 씹고 삼켜.”
강이영은 볼을 불룩하게 부풀린 채 속으로 숫자를 세며 천천히 씹었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유정한을 보았다. 입속의 음식을 삼키고 나서야 강이영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사실 오후에 문자 보내고 싶었는데...”
유정한은 그제야 강이영의 핸드폰이 교통사고 때 망가졌다는 걸 떠올렸다.
“네 핸드폰은 사고 때 망가졌으니까 내일 새 걸로 보내라고 할게.”
강이영의 눈이 금세 휘어지더니 식탁 너머로 그의 손을 잡고 배시시 웃었다.
“고마워요, 여보. 세상에서 여보가 제일 좋아요!”
그녀의 부드러운 손끝이 그의 손바닥을 간질이듯 스쳐 지나갔다. 마치 깃털이 닿았다가 날아가 버린 듯이.
유정한은 느껴지는 이상한 감정에 손을 홱 거두었다.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강이영은 순진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당신은 제 남편이잖아요.”
“우리...”
유정한은 뜸을 들이다가 한참 후에야 말했다.
“아직 혼인신고도 하지 않았으니까 법적으로는 부부가 아니지.”
“그럼 내일 하면 되잖아요!”
강이영은 벌떡 일어나 유정한에게 달려들어 유정한의 팔을 흔들었다.
“혼인신고 어디서 할 수 있는지는 알아요!”
유정한은 자신의 팔을 흔들며 말하는 강이영을 보니 머리가 지끈해져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급할 거 없어.”
이 말은 마치 찬물을 끼얹은 듯했고 강이영은 손을 놓더니 금세 눈가가 붉어졌다.
“여보, 혹시... 나랑 결혼하는 거 후회해요?”
강이영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저 착하게 밥도 잘 먹고 살도 많이 찌울게요. 그러니까 저 싫어하지 말고, 버리지 말아줘요... 여보.”
유정한의 관자놀이가 두근거리며 뛰었다. 업계에서 두려움의 대상이자 살아있는 염라대왕이라고 불리는 그가, 지금 이 순간 강이영의 눈물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난 널 버린 적 없어.”
유정한은 최대한 부드럽게 말하려고 애썼다.
“요즘 너무 바빠서 그래.”
그는 어색하게 설명하며 손을 뻗어 강이영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시간이 나면... 그때 해도 돼.”
강이영은 금세 눈물을 거두고 웃으며 유정한의 손바닥에 얼굴을 비볐다.
“약속한 거예요. 절대 어기면 안 돼요!”
“...알았어.”
집을 떠난 엄마와 잔혹한 아버지 아래서 자란 불쌍한 그녀... 게다가 지금은 기억까지 잃었으니 강이영이 의지할 수 있는 건 이 ‘남편'뿐이었다.
유정한은 미간을 구기며 생각했다. 일단은 달래주자고. 어차피 며칠 지나면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
저녁 식사 후 유정한은 서재로 가서 서류를 처리했다.
이때 문틈 사이로 작은 머리가 불쑥 들어왔다.
“여보, 제가 우유 데워왔어요...”
“놓고 가.”
그는 고개도 들지 않았고 머그잔이 탁자에 놓이는 소리를 들었다.
곧이어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나더니 강이영이 1인용 소파에 앉아 턱을 괴고 일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안 자고 뭐 해?”
강이영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 일 끝나면 같이 잘래요.”
그 순간 유정한의 손이 멈칫했다.
‘같이 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