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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심화영은 그 눈빛을 전생에도 여러 차례 마주한 바 있었지만 단 한 번도 그를 이토록 가만히 들여다본 적은 없었다. 지금에서야 제대로 마주하고 보니 그는 누워 있음에도 또래보다 훨씬 크고 다부진 체구를 지니고 있었다. 다만 밖으로 드러난 다리엔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고 그 위로는 핏자국이 넓게 번져 있어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 두 발의 화살이 하나는 무릎 뒤편을 꿰뚫었고 다른 하나는 넓적다리를 꿰찼는데 설현수가 모두 뽑아내자 피와 살이 엉긴 채로 탁자 위에 내던져져 있었다. 헌데도 그는 미동조차 없었고 그저 묵묵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그 역날 달린 화살이 제 몸속을 헤집고 나간 것이 아니라는 듯 말이다. 심화영이 눈 끝으로 피에 젖은 화살촉을 흘낏 보더니 흔들리는 동공과 마음을 다잡고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대제국은 걸출한 인물이 뛰어난 곳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영주성은 남자가 수려하기로 유명했다. 문약하고 우아한 자도 있고 따스하고 온화한 이도 있으며 위엄 있고 건장한 이 또한 많았고 심지어 절제되고 근엄한 자도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그와 견줄 자는 아무도 없었다. 전강훈은 마치 먹을 짙게 눌러 그린 듯한 아름다움을 지닌 이였다. 칼로 조각한 듯한 윤곽, 극도로 날카롭고도 완벽히 정제된 이목구비를 지닌 그가 한번 자리에 들면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는 배경이 되어버릴 정도였으니까. 그중에서도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바로 심연처럼 깊고도 고요하여 별이 흐르는 것 같은 그 눈이었다. 한 생이 지나 다시 그 눈을 마주한 심화영은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저하, 찾으셨습니까?” 그녀는 몸을 부들거리며 떨리는 발걸음으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가슴은 저리도록 아팠고 마음속엔 죄책감과 후회, 그리고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뒤엉켜 밀려들었다. 전생의 기억이 소용돌이치듯 떠올랐고 그에게 사죄하고 싶었다. 더 이상 삼황자 원태영을 마음에 두고 있지 않다고, 이제는 진심으로 그를 아끼고 사랑하겠노라고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술이 굳게 닫혀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침상 위의 사내는 그녀가 문을 들어서던 그 순간부터 계속 바라보고 있었는데 오래도록 그렇게 응시한 끝에야 앞을 스윽 훑으며 말했다. “모두 물러가라. 낭자와 할 말이 있다.” 그의 음성은 거칠고 낮았다. 표정 하나 없었으나 결코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기에 장공주마저 미간을 살짝 찌푸릴 뿐 말없이 자리를 떴다. 심철호와 어의들도 조용히 퇴청했다. “자네도 잠시 나가 보시오.” 전강훈은 설현수를 바라보았다. 설현수는 은침을 내려다보던 시선을 천천히 그에게로 옮기더니 마치 혼이 빠져나간 듯 오랜 시간 그를 바라보다 말없이 일어나 방을 나섰다. 문이 닫히자 방 안엔 심화영과 전강훈, 둘만이 남았다. 문틈으로 바람이 스며들어 촛불이 살짝 흔들렸다. 그를 바라보던 심화영은 이유도 모른 채 가슴이 조여들듯 긴장이 일었다. “무슨... 무슨 말씀 하시려는지요?” 마음 깊은 곳에 쌓인 죄의식 때문인지 그녀의 말끝이 무척 부드러워졌다. 침상의 사내는 순간 멈칫했고 눈동자엔 알 수 없는 의혹이 번졌다. 곧이어 미간이 살짝 좁혀지더니 표정엔 혹시 잘못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어렸다. 예전의 심화영은 자신을 지극히 혐오했고 마주할 때마다 독설을 퍼부으며 거지보다도 못한 대우를 했었으니까. 그는 오랫동안 그녀가 진심으로 자기가 죽기를 바란다고 여겼었다. 오늘 그녀를 부른 것도 마음속 집착 때문이었고 그녀가 정말 살아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또 확인하고픈 말이 있었기에... 한참을 그녀를 응시하던 그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 “이리 오시오.” 심화영은 앞으로 다가가 그의 침상 곁에 앉았다.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 손을 뻗어 그의 미간을 쓰다듬으려 했으나 끝내 그 손길을 거두고 물었다. “괜찮으신지요?” 눈물은 꾹 눌렀건만 목소리가 자꾸만 떨렸기에 그의 눈빛엔 더욱 짙은 놀라움이 스쳤다. ‘화영 낭자라면 왜 아직도 죽지 않았냐고 물어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 눈동자에는 분명한 걱정과 진심 어린 회한과 또 알 수 없는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에 그는 놀랐고 세상이 뒤집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화영 낭자가 어찌 이렇게 달라졌단 말인가.’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다시금 물었다. “낭자, 그날 무슨 말 하려고 나를 연남산으로 불렀소?” 그녀는 깊은 바다처럼 가늠할 수 없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는데 그 안에 억만 가지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심화영은 그가 모든 걸 알고 있지만 그녀가 자신의 입으로 뭐라고 말하는지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전생에 그녀는 그를 바보라 여겼고 자신의 속셈을 눈치채지 못하리라 오만하게 굴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선 자신이 얼마나 우매했는지 절실히 알게 되었다. 스무 살도 되지 않아 조정의 요직에 올랐던 인물이었기에 그녀의 얄팍한 수를 몰랐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유씨 부인과 송연정의 말만 믿고 그를 싸울 줄밖에 모르는 자라 여겨 학식이 뛰어나고 풍류와 기개가 절묘한 삼황자만 바라봤던 것이다. 어리석고 우매했던 자는 그가 아니라 바로 그녀였다. 그녀가 자초한 업보 때문에 결국 그가 무공도 시력도 두 다리도, 심지어 생명까지도 잃게 된 것이었다! 그날의 업장을 떠올리던 심화영은 어느덧 그가 베고 있는 베개에 놓인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고 흐느끼며 말했다. “그날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었습니다. 여름이 지나 비도 덜 내리고 하늘도 높고 맑은 가을이 오면 더는 어디로도 떠나지 않고 전하께 시집가겠다 하려 하였습니다.” 그 말은 곧 팔월 보름에 그가 정한 약조를 지키려는 뜻이기도 했다. 눈물은 어느덧 얼굴을 가득 적셨고 그녀는 잃었던 것을 되찾은 것처럼 떨리는 손에 온 힘을 담았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 시선을 손으로 옮겼다. 그러더니 다시금 얼굴로 시선을 돌려 그녀의 말을 마음속에서 몇 번이고 되뇌었는데 눈가에 붉은 기운이 서리더니 이내 또 사라졌다. 오랜 침묵이 흘렀고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화영은 그를 바라보았고 그는 넋이 나간 채 그녀가 꼭 붙든 손을 바라보았다. 문득 정신이 든 심화영은 자신이 방금 내뱉은 말이 너무도 무겁고 민망하게 느껴졌다. 전강훈은 열두 살에 군영에 들어가 열네 살에 출정하여 열여섯에 승전하고 돌아와 왕작을 받았다. 그 첫 귀환 길에 그는 전하도 만나지 않고 집에도 들르지 않은 채 먼지투성이의 옷차림 그대로 곧장 후작 댁으로 달려와 그녀를 찾았다. 그때 그녀는 겨우 여덟 살이었다. 그러나 그 나이에 이미 유씨 부인에게 휘둘려 몰상식한 아이가 되어 있었고 그와 말 한마디 나누는 대신 침을 뱉으며 돼지한테 시집갈지언정 싸울 줄밖에 모르는 그한테는 절대 시집 안 간다면서 소리만 쳤었다. 그날은 마침 팔월 보름이었다. 노을이 그의 갑옷 위에 붉게 내리던 그날, 그는 별과 달을 좇아 수백 리를 달려왔지만 그녀가 그에게 안긴 건 비웃음과 모욕뿐이었다. 그날의 눈빛과 표정은 지금까지도 잊히질 않았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랍고 당황스럽고 속상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었다. “보고 싶지 않습니다! 아시겠습니까? 당장 나가주십시오!” 그가 물러나지 않자 그녀가 결국 문을 쾅 닫고 자기 방으로 달아났는데 유씨 부인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네 아비가 뭐가 부족해 그런 약조를 했을까. 그자는 바보다. 네가 내쫓아도 멍청하게 서 있잖느냐? 그래도 삼황자는 다르지. 따뜻하고 문약하고 저리 후작 댁까지 막무가내로 뛰어들지도 않잖냐.” 그 말이 반복될수록 심화영은 점점 더 원태영을 좋게 여겼고 전강훈을 더욱 미워하게 되었다. 그 뒤로도 그는 그녀를 여러 차례 찾았다. 심화영의 말과 태도는 날로 가혹해졌고 급기야는 죽으라고 저주를 퍼붓기까지 했다. 지금의 중상 또한 심화영과 삼황자가 함께 꾸민 계략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시집가겠다고 말했으니 그가 아니라 바보라 해도 믿지 않을 일이었다. 심화영은 고개를 떨구고 자기 무릎을 내려다보며 화제를 돌렸다. “어르신의 의술이라면 전하의 다리가...” ‘곧 나아지실 겁니다.’ 그 순간, 그는 따뜻한 손결로 그녀의 눈썹과 눈가를 살며시 쓸며 낮고도 따뜻하게 말했다. “울지 마시오. 난 아무렇지도 않소.” 심화영은 온몸을 떨었다. 전생에 그가 죽어갈 무렵 마지막으로 남긴 말도 울지 말라는 말이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그는 더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허나 이번에는 너무도 가까웠기에 심화영은 그의 눈동자가 그녀를 향하고 있지만 그 시선은 어딘가 그녀의 너머를 응시하고 있는 걸 보게 되었다. 마치 먼 회상의 세계에 잠겨 있는 듯, 그 눈엔 초점이 없었다. 심화영이 고개를 갸웃하며 무언가를 물으려 했는데 갑자기 문소리가 나더니 설현수의 음성이 들려왔다. “침을 다시 놓아야 하니 중요한 말은 나으신 뒤에...” 심화영은 정신을 차리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설현수를 바라보았다. 사부님이라는 말이 튀어나오려던 찰나, 그녀는 겨우 어르신이라 부르며 그 말을 삼켰다. “어르신, 전하께서 어떠하옵니까? 다리가 회복할 수 있으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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