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설현수는 그 말을 듣고는 깊게 숨을 들이켜더니 다시금 묵직하게 내쉬고서야 입을 열었다.
“고에 당했다. 이 고충은 극독을 지녔을 뿐 아니라 내공마저 삼키는 요물이다. 당장은 은침으로 고충을 다리 쪽에 봉인하고 내공을 상반신으로 돌려두었을 뿐이다.”
“고라 하였소?”
전강훈이 단번에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들어 설현수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눈빛에는 어둡고 날카로운 기운이 번뜩였다.
설현수는 그 눈빛을 마주보다가 문득 누군가를 떠올린 듯 정신이 아득해져서 이윽고 낮은 목소리로 이었다.
“의심하실 필요는 없사옵니다. 이 고는 구연국의 비술이 틀림없사옵니다.”
구연국은 대제국이 아닌 남쪽 대초국 땅에 있는 나라였다.
심화영 역시 뜻밖이었다. 삼황자 원태영이 벌인 이번 계략에 인접국의 세력까지 개입하였을 줄은 그녀조차도 예측지 못한 일이었다. 전생에 전강훈이 고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이미 수년이 흐른 뒤였으니까.
지금 와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질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번 생에는...’
“어르신, 그럼 혹 이 고를 제거하실 수는 없으신지요?”
심화영이 설현수의 소매를 움켜쥐며 애절히 물었는데 두 눈에는 어떻게든 사태를 되돌리고자 하는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
전강훈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미간을 깊게 찌푸렸는데 그 눈빛엔 그녀를 꿰뚫고자 하는 듯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내가 죽기를 누구보다 바랐던 자 아니던가. 허나 지금 이리도 다급하게 구는 이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이 또한 또 다른 속셈은 아닐까?’
심화영은 그의 의심 어린 시선이 느껴졌으나 그걸 돌볼 겨를조차 없었다.
전생의 전강훈은 고충으로 인해 두 다리를 잃었고 그 고충이 그의 내공까지 모조리 삼켜버렸기에 경성 무인의 으뜸이라 칭송받던 사내가 하루아침에 닭 한 마리도 잡지 못할 폐인으로 전락해 버렸다.
무인이 아닌 자는 병권을 가질 수 없었기에 결국 황제는 자연스럽게 그에게서 병권을 회수했다.
병권을 잃은 명양왕부는 호시탐탐 노리는 삼황자 세력의 손아귀에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명양왕부의 멸문은 전강훈이 고를 당한 그날부터 시작된 셈이었다.
이생에서는 절대 그 비극을 되풀이하게 둘 수 없었다!
심화영의 눈빛이 설현수를 향해 더욱 간절하게 닿았으나 설현수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내공으로 고충을 소멸시키는 일은 가능하나 그리하면 전하의 경맥 또한 함께 끊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공은 물론이고 두 다리도 영영 쓰지 못하게 된다. 고를 심은 자는 처음부터 그것을 노렸다.”
심화영은 마치 정수리에 벼락을 맞은 듯 망연했다.
‘다시 돌아온 생이건만 결국 뒤집을 수 없는 운명이란 말인가?’
전생에 두 다리를 잃고도 꿋꿋이 고통을 버텨냈던 전강훈의 모습이 떠오르자 심화영은 회한과 절망에 온몸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고 눈앞이 까마득해져서 이내 의식을 잃을 뻔했다.
“화영 낭자!”
갑자기 침상 위의 사내가 번개같이 손을 뻗어 그녀를 붙들었다.
심화영은 몸이 휘청이며 침상 위로 넘어졌고 그의 다리를 누르자마자 황급히 일어났다.
“죄송하이다...”
정신을 가다듬고 바라보니 전강훈은 미간 하나 찌푸리지 않은 채 그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눈빛을 보자 심화영은 눈물이 한순간에 쏟아졌고 얼굴을 감싸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모든 게 다 그녀 때문이었다!
그녀가 눈이 어두웠고 마음이 미혹되어 유씨 부인과 송연정의 말에 휘둘려 삼황자의 계략에 말려들었으며 결국엔 자신을 가장 진심으로 아껴주던 이를 해하고 말았다.
이번 생에 설현수가 모든 것을 바로잡아 줄 것이라 믿었건만 그마저도 할 수 없었기에 이 현실 앞에 그녀는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던 전강훈은 손가락을 미세하게 떨었다.
그녀가 우는 모습을 그는 참으로 싫어했다.
가슴 한복판에서 치미는 고통이 온몸을 따라 번져가자 그는 결국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그녀의 등을 토닥였고 쉰 듯한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괜찮소...”
“설령 이 병이 낫지 않더라도 괜찮소.”
그의 목소리는 분명 따뜻했고 그녀를 달래고 있었으나 심화영의 귀에는 가슴이 미어지듯 아프게 들려왔다.
예전 같았더라면 그가 괜찮다고 말하면 정말로 괜찮은 줄 알고 아픔도 모르는 강인한 사내라 믿으며 아무렇지 않게 웃고 떠들었을 터였다.
허나 이제는 이 모든 죄가 자신에게 있음을 깨달았기에 그녀는 눈물을 꾹 참고 고개를 들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곧바로 구연국으로 떠나겠습니다. 반드시 전하의 독을 풀어낼 자를 찾아올 것입니다.”
그 말을 듣자 전강훈의 눈빛에는 의혹이 더 짙어졌다.
“화영 낭자.”
긴 침묵 끝에 그가 낮게 말했다.
“낭자는 나를 그토록 미워하던 이 아니었소?”
심화영은 순간 말문이 막혔고 이제는 미워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동안의 악행이 발목을 붙잡았기에 결국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란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 말을 들은 전강훈은 놀란 듯 잠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설현수는 그런 두 사람을 긴 시간 바라보다가 마침내 무언가를 결심한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비록 이 고충을 소멸할 수는 없으나 하반신에 고정하여 독의 기운을 억누를 수는 있사옵니다. 허나 그리되면 전하께서는 두 다리를 쓰시지 못하고 바퀴 의자에 몸을 의지하셔야 하옵니다. 대신 무공은 온전히 보전될 것이며 내공은 더욱 농밀해져 공격은 오히려 더욱 강해질 것이옵니다.”
“그리하시오.”
전강훈은 마치 자신의 몸이 아닌 남의 물건을 처분하는 듯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본디 적에겐 가차 없고 자신에게조차 가혹한 자였다.
오직 심화영에게만큼은 언제나 유하고 집착 어린 정을 품고 있었는데 끝내 그 연모가 온몸을 찢는 고통으로 되돌아왔다.
심화영은 그런 전강훈을 보자 자신이 보배를 품었었지만 한없이 가볍게 여겼던 과거가 떠올라 마음을 아파졌다.
설현수는 그녀를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구연국에 갈 필요는 없다. 이 고를 내린 이는 구연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자일 것이다. 구연국은 외부인을 배척하기에 네가 갔다간 오히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설령 해독법이 있다 하여도 목숨만을 건질 수 있을 뿐이다.”
“정녕 방법이 없단 말씀입니까?”
심화영은 전생의 끔찍한 장면들이 머릿속에 떠올라 몸을 부들거렸다. 그녀는 그 현실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때 밖에서 설현수의 말소리를 들은 장공주가 분노에 휩싸인 채 안으로 들이닥치더니 심화영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
“내 아들을 이 지경으로 만들고도 감히 이리 가식적으로 구느냐!”
본래도 지쳐 있던 심화영은 힘껏 맞자 두 바퀴를 돌며 바닥에 쓰러졌다.
“어마마마!”
날카로운 목소리가 상단에서 울려 퍼졌다.
장공주는 서릿발처럼 차가운 아들의 눈을 바라보며 외쳤다.
“이 지경이 되었거늘, 어찌 그 여우 같은 계집 편을 드느냐!”
그러나 전강훈은 시선을 떨구고 바닥에 엎드린 심화영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는 저와 화영 낭자의 일이 옵니다.”
장공주는 그 말에 가슴이 막히고 온몸이 떨려왔다.
심화영은 정신이 혼미해져 말을 꺼내려 하였으나 이내 피를 토하고 말았다.
“어르신!”
전강훈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고 눈빛에 다시금 살기를 머금었다.
“어서 구하시오!”
설현수는 그를 지긋이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심화영을 안아 부드러운 자리로 눕혔다.
흐린 촛불 아래, 전강훈의 얼굴은 흐릿해졌지만 그 속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이 그녀를 휘감았기에 심화영은 눈물을 줄줄 흘렸다.
독화살에 맞았을 때 그가 품으로 끌어안아 준 것도, 설현수가 화살을 뽑을 때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은 것도, 치료가 불가하다는 말을 듣고도 담담하게 괜찮다고 말한 것도 모두 그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단 한 대 맞았을 뿐인데 그토록 다급하게 반응한 것이다.
그녀는 그가 자신을 원망하고 증오한다는 것을 알았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번번이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
모든 것이 그녀의 죄였다.
그녀한테 그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존재였다.
모든 건 그녀의 죄였고 그녀의 업보였기에 그녀가 감당해야 할 것들이었다!
심화영은 흐릿한 시야 속에서 설현수를 바라보며 마지막 희망을 담아 속삭였다.
“어르신, 정말 단 하나의 방법이라도 있거든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기꺼이 하겠습니다. 허나 정말 길이 없다면 제가 스스로 찾아 나설 것입니다.”
결국 그가 그녀에게 품었던 깊은 정념은 이번 생에선 그녀가 그에게 품은 것이 되어버렸다.
설현수는 말없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은침 세 개를 놓자 심화영은 머리가 많이 맑아졌다. 그때 문밖에서 옥주가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와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심화영이 무슨 일인지 묻고 싶었는데 그녀가 심화영을 한 번 쳐다본 후 장공주에게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송연정 아가씨께서 측문에 와 계십니다. 이미 두 시진이나 기다리셨다 하옵니다. 전하께 드릴 약을 가지고 왔다 하였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