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장공주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냉소를 띠며 심화영을 바라보았다.
심화영은 그 조롱 어린 눈빛을 누구보다 잘 느낄 수 있었다.
전생의 그녀는 오직 삼황자만을 마음에 두고 살았기에 그날 밤 장공주가 송연정에게 어떻게 대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이 함께 이 자리에 있는 상황에서, 장공주가 보내는 이 조소는 다름 아닌 송연정과 자신 사이에서 벌어질 일들을 기대하는 의미임을 알 수 있었다.
그때 심철호가 급히 방 안으로 들어와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마마, 신이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였사옵니다...”
하지만 장공주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을 들어 제지하며 심화영을 흘깃 보고는 차가운 말투로 이어갔다.
“심씨 가문 자매께서 이리도 성의를 보이는데, 들이지 않으면 내가 야박한 모양이 되지 않겠소... 심 대감과 심 어의도 안으로 드시오.”
그러면서 안에 있는 자리를 보았는데 그녀가 앉은 자리 옆에는 벽에 가려진 두 자리가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와 곧 도착할 송연정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심화영은 장공주의 얼굴을 조용히 살펴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마마는 오만한 것만이 아니라 궁에서 살아남은 책략과 냉철함을 함께 지닌 인물이었구나.’
송연정이 얌전한 아이가 아님을 간파하고 일부러 들여보내 서로 갈등을 유도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심화영은 조용히 눈썹을 찌푸렸고 전강훈은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그녀의 표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겉보기엔 아직 자라나는 소녀였지만 뺨에 오른 연지 같은 생기와 눈빛에 담긴 총기는 범상치 않았다.
다만 예전에는 언제나 경솔하고 가벼운 기색이 있었기에 그 범상함이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완전히 달라졌다.
비록 미간을 찌푸리고 복잡한 심경을 하고 있었지만 눈빛에는 마치 모든 걸 꿰뚫은 듯 전례 없던 예리함과 날카로움이 깃들어 있었다.
마치 완전히 다른 혼이 깃든 듯한 눈빛을 갖고 있었기에 전강훈은 무심한 표정을 유지하면서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본래 그는 송연정을 내쫓을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상황을 좀 더 지켜보려고 했기에 막지 않았다.
심화영은 그를 고려할 겨를이 없었고 오히려 송연정이 뭐 하러 왔는지만 궁금했다.
그때 문밖에서 옥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송연정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심화영이 고개를 들고 문 쪽을 바라보았는데 송연정이 억지로 단정한 걸음을 옮기며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낮에 보았던 화려한 모습과는 달리 이날 밤 그녀는 단정한 흰옷을 입고 있었다. 겉옷은 젖어 있었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연약하고 측은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옷감은 유씨 부인이 아끼던 진운 비단이었고 머리에 꽂은 비녀 또한 유씨 부인이 아끼던 백옥 해당 비녀였다. 전에 그녀가 좋아한다고 했었는데 유씨 부인이 아까워하면서 주지 않았었다. 그런데 오늘 밤 송연정을 도와주려고 꺼냈던 것이다!
‘이젠 아깝지 않았나 보군.’
심화영은 마음이 아파져 낯빛이 어두워졌지만 이내 유씨 부인이 송연정을 전강훈에게 들이밀 생각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심화영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가 유씨 부인의 친딸이었지만 유씨 부인은 그녀 앞에서 전강훈을 저주하듯 말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송연정을 전강훈한테 보내려 하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심화영은 아무 말 없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때 송연정이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장공주에게 고개를 숙이더니 후작 댁에서의 날카롭던 말투와 달리 나른하게 말했다.
“마마께 삼가 문안 올리옵니다. 화영이의 불경함으로 인해 전하께서 중상을 입으셨다 하니 가슴이 무너지는 듯하옵니다. 마침 민간에 있을 적 혼미한 자에게 효과가 크다는 비방 하나를 얻었사옵니다.”
“소녀가 황공한 마음 금할 수 없으며 전하의 안위 또한 염려되어 화영이를 대신하여 밤을 새워 약을 달여 이리 들고 온 것이니 마마께서 혐의치 않으시길 바라옵니다.”
심화영은 그 말을 듣자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옷깃에 꼭 쥐어버리고 말았다.
전생엔 송연정과 자매처럼 지냈으니 그녀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오늘에야 그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게 되어 화가 나 몸이 미세하게 떨릴 정도였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기에 방안은 기운이 가라앉는 듯 조용해졌다.
장공주는 모욕을 받은 듯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고 심철호와 심태진또한 분노에 휩싸여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유독 전강훈만이 심화영만을 바라보며 한 치의 움직임도 없이 시선을 떼지 않았는데 그 눈길엔 뜻밖의 감정이 미묘히 일렁이고 있었다.
심화영은 그의 시선에 불편함을 느껴 황급히 고개를 돌려 장공주를 바라보았다.
장공주의 눈빛엔 짙은 조소가 어렸고 마치 흥미로운 연극이라도 감상하듯 그녀의 반응을 기다리는 듯했다.
심화영은 속으로 비웃음을 터뜨렸으나 입을 열지 않았다.
한편 송연정은 스스로 제법 단정하게 말끝을 맺었다고 여겼는지 한껏 고개를 숙였으나 아무도 반응하지 않자 서서히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곧 침묵을 깨려 입을 열려던 찰나, 장공주가 뜻밖에도 심화영을 한 번 흘긋 보더니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모습에 흥미를 느꼈는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심화영은 내 아들과 혼약을 맺었음에도 그리 크게 걱정하는 눈치는 못 보았는데 오히려 네가 이리 애를 써주니 감동이 되려 하는구나. 내 아들을 위해 이 문 앞에서 두 시진을 넘게 기다렸다고 들었다. 참으로 마음 씀씀이가 깊구나.”
그 말을 듣자 심화영은 할 말을 잃었다.
오히려 송연정은 느닷없는 “칭찬”에 눈이 동그래져 얼떨떨하게 화답했다.
“소녀로선 마땅한 도리일 뿐이옵니다...”
장공주는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로 유도하듯 물었다.
“혹 나와 우리 아들에게 따로 할 말이 있는 것이냐? 우리 아들은 이미 깨어났으니 이 자리에서 말하거라. 그 또한 들을 수 있을 것이니.”
말은 송연정에게 했으나 그 눈길은 다시금 심화영을 스쳤는데 마치 그녀가 거절한 아들이 환영을 받는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심화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전강훈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고요히 그녀만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시선을 돌리자 오히려 더욱 강하게 마주쳤다.
심화영은 괜스레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송연정이 긴장과 기대를 억누르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소녀가 이번에 뵙고자 한 것은 하나는 화영이를 대신하여 마마와 전하께 사죄드리고자 함이옵니다. 다른 하나는 마마와 전하께 드릴 말씀이 따로 있어 이리 나선 것이옵니다.”
심화영 또한 전생에 삼황자를 짝사랑하며 정비마마를 뵈러 갔던 일이 있었기에 지금 송연정이 보여주는 모습이 어떤 심경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장공주는 마치 재미난 이야기를 듣는 듯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래? 그게 무엇이냐?”
그녀의 말투와 표정은 모르는 자가 들었다면 무척 인자한 분이라 착각했을 것이다.
만약 송연정이 그녀의 눈빛을 보았다면 그녀의 눈 속엔 웃음기가 전혀 깃들지 않았고 오직 조롱과 비웃음만이 서려 있다는 걸 발견했을 수 있을 것이다.
송연정은 떨리지만 벅찬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전씨 가문과 심씨 가문의 혼약에 대한 것이옵니다.”
“그 옛날 양가에서 정한 혼약은 단지 심씨 가문의 손녀가 전씨 가문 손자에게 출가한다는 것뿐, 어느 손녀며 어느 손자인지 밝히진 않았사옵니다.”
이 말을 들은 심화영은 모든 걸 알아챘고 눈빛이 서늘해졌고 마음 한구석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잠시 눈치를 보던 송연정은 아무도 제지하지 않자 목소리에 확신을 실었다.
“애초에 전하께서 화영이를 눈여겨보지 않으셨다면 그 혼약이 화영이와 맺어졌을 이유는 없사옵니다. 만일 화영이가 전하를 마음에 품었다면 소녀 또한 기꺼이 그 사랑을 응원하였을 것이옵니다.”
“헌데 화영이는 삼황자 전하께만 사무쳐 전하의 진심을 짓밟고 자신도 상처 입으며 전하까지 해친 것이옵니다. 소녀가 언니로서 마땅히 그 죄를 함께 짊어져야 하오니 마마께서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심씨 가문 세 자매 중 다시금 혼약을 정하실 수 있도록 허해 주시옵소서!”
“소녀는 기꺼이 소나 말이 되어 전하를 받들 것이며 결코 화영이처럼 전하를 해치는 일은 없을 것이옵니다!”
그리 말하며 송연정은 품속에서 약단지를 꺼내어 옆에 조심스레 내려놓고 이마를 바닥에 바짝 붙였는데 그 모습은 마치 전에 있던 심화영과 대비되어 더욱 겸손하고 성실해 보였다.
이 모든 것이 그녀의 계산된 연기임을 꿰뚫고 있었으나 예전처럼 그 얄팍한 계책에 휘둘릴 심화영이 아니었다. 더욱이 장공주 또한 그런 인물에게 호의를 베풀 만큼 순진한 이가 아니었다.
역시나 장공주는 눈빛이 더욱 싸늘해졌고 비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그래? 그럼 일어나거라. 그리고 화영이와 상의해 보는 것이 좋겠구나.”
그 말투와 표정에는 헛된 꿈도 이쯤이면 족하다는 조롱이 뚜렷하게 깃들여 있었다.
심화영은 그 조롱 섞인 냉소에 불쾌함은커녕 오히려 속이 다 시원하여 자기도 모르게 슬며시 웃었다.
송연정은 마침내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닫고는 재빨리 고개를 들었는데 그제야 방 한쪽 그늘진 곳의 연한 소파 위에 한 사람이 더 앉아 있음을 보게 되었다.
“심화영?!”
그녀는 눈을 부릅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외쳤다.
“너, 너도 이 자리에 있었단 말이냐?!”
‘심화영은 전강훈을 싫어하고 삼황자를 흠모하던 거 아니었나?’
‘어찌 비바람을 뚫고 이곳까지 찾아온 거야?’
‘게다가 심화영이 전강훈을 이런 꼴로 만들었는데 장공주가 어찌 심화영을 이 자리에 들였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