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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송연정은 두 눈을 크고 동그랗게 치켜떴다. 심화영은 싸늘한 기색으로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생각보다 전씨 가문과 우리 심씨 가문의 혼약에 대해 잘 아는 모양이로군요.” 송연정의 말대로 양가의 혼약은 단지 각 가문을 대표할 인물을 정해 혼인시키기로 한 약속일 뿐이었고 전씨 가문과 심씨 가문을 대표할 자라면 누구든 상관없다는 것이 본래의 뜻이었다. 허나 이후 전씨 가문에선 오직 전강훈만이 세자 자리에 오를 인물이 되었고 어린 나이에 전공을 세워 곧장 왕작에 봉해지며 대제국 역사상 가장 젊은 장군이자 왕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혼약의 상대는 그로 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반면 심씨 가문엔 정실인 고윤희 대부인이 낳은 심여진과 유씨 부인이 약을 써서 낳은 서출녀 심화영 둘 뿐이었다. 심여진은 고결한 인품과 문채를 겸비한 경성 명문의 규수로 이름을 날렸고 심화영은 뒷방첩 유씨의 계책으로 태어난 서출녀였기에 예법도 못 지키고 언행도 거칠며 천한 언사로 욕을 먹기 일쑤였다. 하지만 전강훈은 뜻밖에도 심화영을 선택했다. 세간에선 모두들 그녀가 재수 좋게 명양왕의 눈에 든 것이라 수군거렸다. 그러나 그때는 유씨 부인과 송연정이 여러 차례 그녀 앞에서 전강훈을 헐뜯고는 기회를 엿보아 삼황자 원태영과의 만남을 자꾸만 주선했었다. 삼황자 또한 온화한 군자의 모습을 연기하며 그녀 앞에 수없이 우연히 나타났기에 그녀의 마음은 어느덧 그에게로 기울었다. 아무도 전강훈이 왜 그녀를 선택했는지 몰랐다. 그녀 자신조차도 몰랐다. 허나 그가 다가올수록 그녀는 점점 더 그를 혐오했다. 특히 그가 애절한 눈빛으로 자기를 바라보며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을 볼 때면 그녀는 속이 뒤틀려 견딜 수가 없었는데 차라리 그가 세상에서 사라지길 바랄 정도였다. 유씨 부인과 송연정은 오히려 그녀가 전강훈을 피하도록 도왔다. 전강훈이 말을 꺼내려 할 때마다 두 여인이 가로막아 말을 끊곤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심화영은 진심으로 그들이 자신을 돕는 줄로 믿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야 그 모든 도움은 결국 계산된 음모였음을 알게 되었다. 심화영의 가슴속은 이미 싸늘한 한기로 가득 찼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문가로 걸어 나갔다. 송연정은 몸을 부르르 떨며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심화영이 성큼성큼 다가오자 그녀의 눈동자엔 점차 공포가 어렸다. “화영아, 난...” “짝!” 심화영의 손이 번개처럼 휘둘러졌고 한쪽 뺨 위에 매서운 손바닥이 내리꽂혔다. 그 누구도 심화영이 이렇게 대뜸 손부터 쓸 줄은 몰랐기에 방 안의 사람들은 모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심지어 장공주마저 그 자리에 멈칫했다. 송연정은 눈을 부릅뜨며 경악했다. “화영아, 너...” 얼굴을 감싸며 놀라움에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에 반대편 뺨에 또 손바닥이 휘몰아쳤다. 그녀의 두 뺨은 순식간에 시퍼렇게 부어올랐고 입가엔 실핏줄처럼 붉은 피가 맺혔다. 그녀는 흐트러진 머릿결을 늘어뜨린 채 땅바닥에 엎드려 멍하니 심화영을 올려다보았다. ‘한때 내가 조롱하고 이용하던 심화영이 어찌하여 이토록 매섭고 차가운 사람으로 돌변한 것이지?’ 빛을 등진 심화영은 서늘한 그림자 속에 서 있었다. 그 눈빛은 차디찬 늪 같았고 입을 떼는 목소리는 마치 지옥의 냉기를 끌어올린 듯 낮고 깊었다. “첫째, 전씨 가문과 심씨 가문의 혼약은 장공주께서 며느리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명양왕께서 비를 정하시는 것이옵니다!” “심화영!” 장공주는 버릇없이 굴며 자신을 무시하는 말에 얼굴빛이 확 변해 곧 상을 내리치며 화를 내려 했다. 그러나 그때 전강훈의 시선이 그녀를 스치자 그 기세에 무너져서 이를 악물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송연정은 장공주의 호통에 내심 기뻤고 이제 심화영이 벌을 받겠다고 생각했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심화영의 말은 더욱 싸늘해졌다. “둘째, 남들이 심씨 가문의 둘째 아가씨라 부른다고 하여 진정으로 이 가문의 딸인 줄 착각하진 마시지요. 이 혼약을 짐승에게 돌린다 해도 언니에게 돌아가진 않을 것입니다.” 송연정이 치욕에 몸 둘 바를 모르며 고개를 들었는데 두 눈엔 독기 어린 분노가 깃들었다. 그녀는 이 자리에 심화영이 나타날 줄 몰랐다. 더구나 이처럼 자신을 공개적으로 모욕할 줄은 꿈에도 상상치 못했다. 전에는 그런 적 없었으니까. ‘한때 모든 말을 믿고 따르던 그 바보가 어쩌다 이토록 독기 품은 인물로 변한 거지?’ 그녀의 가슴이 큰 파도처럼 요동쳤는데 그 안에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왔고 눈빛에는 원망이 가득했다. 하지만 심화영은 더 이상 그런 감정 따위에 흔들리지 않았다. “셋째.” 심화영의 목소리는 바깥의 밤비보다도 차가웠고 그 기운은 방안을 뒤덮을 정도였다. “지금 이 순간부터 이 집엔 심씨 가문 둘째 아가씨 같은 존재는 없습니다! 알아서 갈 길을 가시지요. 다시는 내 앞에 얼씬도 하지 마시지요. 그렇지 않으면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송연정은 온몸을 떨며 힘없이 항변했다. “내가 어디로 가든 그건 네가 정할 일이 아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유씨 부인과 심철호 앞에서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면 상황이 금방 뒤집힐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말끝을 자르듯 방 안에서 한 줄기 위엄 어린 호통이 울려 퍼졌다. “입 다물 거라!” 놀라 머리를 번쩍 든 그녀의 눈앞에는 심철호의 분노에 찬 얼굴이 있었다. “후작 댁에서 널 거두어 기른 것은 가엾은 네 처지를 생각해서였다. 허나 네 속내가 이토록 흉악할 줄은 몰랐구나! 내 귀한 화영이를 등지고 혼약을 가로채려 한 것이냐?!” 송연정은 놀라서 덜덜 떨며 애처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모부, 그게 아닙니다. 제 말 좀 들어주십시오. 절, 절대로 그런 마음은 없었습니다... 전 그냥...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이모부께서 거둬주지 않았으면 아무 데도 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집에 가서 잘 해명하겠습니다. 흑흑...” 그녀는 몸을 움츠리고 흐느끼며 울먹였다. 심화영은 한때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고 연민을 품어 대부인을 찾아가 구명을 청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오직 비웃음만이 남았다. “우리 심씨 가문이 그대를 거둔 것은 정 때문이었으니 도리를 다했기에 쫓아내도 되는 것이지요. 세상에 가엾은 인생은 넘쳐납니다. 그대를 기를 바엔 길가의 들개나 거두겠어요. 적어도 개는 꼬리라도 흔들잖습니까.” 송연정은 울음을 뚝 그치고 멍하니 심화영을 올려다보았는데 예전의 바보 같던 심화영이 어찌 이리 논리 정연하고 독해졌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몰래 방 안을 살폈는데 전강훈이 한쪽에서 흥미롭게 심화영을 바라보다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코끝을 만지며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 눈빛엔 분명한 정이 스며 있었으나 그녀를 보았을 땐 그것이 차디찬 얼음으로 바뀌어 혐오로 덮였다. 송연정은 그 눈빛에 가슴을 찔리는 듯 아파하며 고개를 푹 숙였지만 다시 심화영을 원망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심화영은 콧방귀를 뀌었다. 전강훈은 여인에게 마음을 주지 않기로 이름난 자였다. 전생에 사람들은 그녀를 오만하고 멍청한 여우라고 욕했었기에 “여인”이라 할 수도 없었다. 전강훈은 자신을 좋아하는 타국의 공주에게도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송연정은 더 말할 나위 없었다. 그녀는 대놓고 비웃음을 터뜨렸다. 송연정은 그 웃음에 치욕을 느꼈고 장공주의 미간 또한 파르르 떨렸다. 멍청한 송연정 때문에 화가 났지만 또 한편으로는 심화영이 어찌 이렇게 독하게 변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짜증을 억누르지 못하고 말했다. “이제 그만하거라. 후작 댁의 일은 후작 댁으로 돌아가 해결하거라!” 심화영이 고개를 돌려 장공주를 바라보았는데 눈동자엔 비웃음이 잠깐 스쳐 지나갔다. “제 언니께서 약을 들고 왔는데 마마께선 그 약조차 마다하시겠단 말씀이옵니까?” ‘이 연극을 처음 시작할 때는 제법 흥미로워하셨지 않았습니까?’ ‘어찌하여 이리도 흥미를 잃으신 것이옵니까?’ 장공주는 안색이 일순 검게 변하더니 두 손을 힘껏 움켜쥐었다. 막 분을 토해내려는 찰나 침상에서 전강훈의 차디찬 목소리가 가라앉은 듯 울려 퍼졌다. “보잘것없는 짓이오. 약이 필요 없으니 당장 물러가라 하시오!” 송연정은 그 말에 가슴이 칼에 베이듯 아파 얼이 빠진 듯 문밖에 꿇어앉아 있었다. 전강훈은 심화영 말고는 그 누구에게도 따스한 얼굴을 내민 적이 없었다. 경성 사대부 자제들 사이에서도 명양왕의 독설이 심씨 가문 셋째 아가씨와 겨룰 만하다는 말이 떠돌았을 정도였다. 그 아가씨가 바로 세상 물정 모르고 무례하게도 전강훈을 조롱하며 모질게 대하던 심화영이었다. 송연정은 고개를 숙이고 마음속의 질투를 억누르려 애썼으나 온몸이 떨려왔다. 그때 심화영이 슬며시 고개를 돌려 전강훈을 바라보았다. 착각이었을지도 모르나 그의 시선 속엔 마치 흥미를 품은 듯한 기색이 스쳤다. 서로의 눈이 잠시 마주치자 심화영의 뺨이 불그스레 물들었다. 다행히도 고열이 있던 터라 그 얼굴빛의 변화는 알아채기 어려웠다. 그녀는 눈빛을 피하며 심철호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아버지, 전하께서 깨어나셨고 어르신께서도 하실 일은 다 하셨습니다. 이젠 저희가 여기에 머물러 있을 까닭이 없으니 전하께서 편히 쉬시도록 물러가고 다시 방책을 강구함이 어떠하겠습니까...” 그 순간 뒤편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무겁고 깊은 그 목소리가 그녀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낭자의 상처는...” 심화영이 짙은 근심이 서려 있는 그의 눈빛을 보게 되자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낮게 말했다. “무방합니다. 돌아가 약 바르면 그만이지요. 상처도 깊지 않습니다.” 더 다정한 말을 건네려다 장공주와 송연정이 옆에 있음을 깨닫고는 입을 다물고 심철호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아버지, 돌아가시지요.” “미천한 신, 물러가옵니다.” 그렇게 그들은 자리를 떠났고 아무도 송연정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녀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상복을 입은 개처럼 뒤쫓아가다 결국 후작 댁 처마 밑에서 심화영을 붙잡았다. “화영아, 부디 내 말을 들어다오...” “무슨 말이요?” 심화영은 뒤돌아 처마 아래서 송연정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밤 이곳에 온 까닭이 약을 전하러 온 것이 아니고 명양왕의 부인이 되려 온 것도 아니고 나를 대신하여 정탐하러 온 것이란 말입니까?” “그래... 맞다...” 송연정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것이 그녀가 하려던 말이었으나 심화영이 먼저 그 말을 꺼내니 어찌 된 일인지 마음이 더 불편해졌다. 변명할 말들을 떠올리려는 찰나, 대부인 고윤희가 보낸 세 명의 시녀가 안으로 들어서며 곱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연정 아가씨, 대부인께서 들라 하십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시녀 둘이 송연정을 양쪽에서 부축해 끌고 갔고 나머지 한 명은 심화영을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가씨, 편히 쉬시옵소서. 대부인께선 오늘 밤 사정이 있어 이리 말씀하셨사옵니다. 내일 아침 아가씨가 깨어나시면 찾아뵐 거라 하셨사옵니다.” “화영아! 제발 대부인께 사정해다오. 아니면 내가 정말 매 맞아 죽을 것이다! 왕부에 간 것도 그저 너를 대신해 정세를 살펴보려 한 것뿐이다...” 송연정은 눈물에 젖은 얼굴로 심화영을 바라보며 마지막 희망을 쥐듯 그녀의 옷자락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허나 심화영은 차가운 미소만을 지으며 몸을 살짝 비켜섰고 말 한마디 없이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사정해 달라고?’ ‘차라리 지나가던 개를 돕는 게 낫겠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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