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얼마 지나지 않아 심태진이 들고 들어와 그녀의 상처를 손수 치료했다.
심화영은 그를 바라보다가 전생에 자신으로 인해 그가 허리를 다쳐 고초를 겪었던 일이 떠올라 눈가가 붉어졌다.
“오라버니, 죄송해요. 제가 철이 없어서 후작 댁까지 이리...”
그녀가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자 심태진은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더니 곧 이내 따스한 웃음을 띠며 이르렀다.
“어리석구나, 무슨 허튼 말을 그리하느냐? 오늘 왕부에서 네가 보여준 모습에 이 오라비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참으로 장하더구나!”
“허나 오늘 연정 아가씨를 보아하니 속에 다른 뜻이 깃든 듯하더라.”
“너와 가까이 지내는 이이니 앞으로는 조심에 또 조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오라비가 내일 대부인께 아뢰어야겠다. 계례도 치른 처녀가 언제까지 후작 댁에 머물겠느냐? 어서 시집보내는 것이 좋겠다. 더 큰 탈이 나기 전에 말이다.”
전생에 이 말을 들었을 적 심화영은 송연정을 감싸려 심태진과 대판 다투었고 그 뒤로는 그의 의술도 배우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둘 사이는 점점 멀어졌고 결국 그가 능지처참을 당하기 전까지도 두 사람은 진심 어린 말을 나누지 못했다.
그런 지난날이 사무치게 떠오르자 심화영은 가슴 한편이 무너져 내렸기에 이번 생에는 얌전히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 말씀대로 하겠어요.”
심태진은 그 말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상처를 단단히 감싼 뒤 일렀다.
“몸이 본디 허약하니 더욱 잘 쉬어야 한다. 왕부의 일은 내가 살필 테니 너는 밤새 잘 자거라.”
“오라버니도 일찍 주무셔요.”
심화영은 그를 배웅하며 뜨거운 눈물을 삼켰다.
그가 자리를 뜨자 월계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가씨, 대부인께서 노하셔서 연정 아가씨를 곤장 이십 대 쳐서 사당에 가두셨답니다!”
달걀처럼 둥그스름한 얼굴에 버들잎 눈썹을 지닌 월계는 네 시녀 중 가장 유순하고 단정한 성격이었는데 이 일에 꽤나 격분한 듯했다.
“심씨 가문에서 몇 해를 품어준 은혜도 모르다니요. 아가씨께서도 지극정성으로 대해주셨거늘 도리어 그 은혜를 원수로 갚다니,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심화영이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았는데 떨리는 손끝이 다시 떠오른 지난 생의 기억을 말해주는 듯했다.
그녀는 월계를 보지 못한 지 오래였다.
전생에 심화영이 삼황자에게 밀서를 전하러 백 리 떨어진 수렵장으로 달아났을 때 암살자에게 쫓겨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에 월계가 칼을 대신 맞고 죽었었다.
그 뒤로 제비집을 들고 들어오던 자윤도 유씨 부인 때문에 거짓 누명을 쓰고 송연정의 죄를 대신 뒤집어쓴 채 일장홍을 맞고 심화영의 눈앞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날 밤 심화영은 울다 지쳐 혼절했고 그 뒤로도 유씨 부인에게 꾸짖음을 들었다. 후작 대의 아가씨가 천한 계집종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며, 궁에서는 그딴 계집종이 죽는 게 흔한 일이라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연약한 마음씨로는 훗날 국모에 자리에 오를 수 없다고 했었다.
그 뒤로 심화영은 서서히 유씨 부인의 세뇌에 물들었고 시녀들의 죽음은 당연한 일이라 여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걸 잊은 채 오로지 삼황자를 도와 권세의 길에 헌신했고 송연정과 유씨 부인을 지켜주었다.
그러나 결국 후작 댁이 멸문을 당하고 삼황자와 송연정의 참모습이 드러났을 때야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 다시 눈앞의 자윤과 월계를 마주하자 심화영은 눈물이 쏟아질 듯 북받쳤다.
자윤은 그녀가 왕부에서 억울함을 당한 줄로 여기고 얼른 위로해 주었다.
“아가씨, 얼른 쉬십시오. 저희가 곁에 있으니 걱정 마시고 무서워 마십시오...”
심화영은 입만 벙긋거리다 끝내 고개만 끄덕였다.
전생의 비극과 진실은 오직 그녀만이 기억하는 것이었기에 아무리 목이 메어도 이들 앞에서는 꺼낼 수 없는 얘기였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게 깊이 잠들었는데 꿈에 심씨 가문의 몰락과 전강훈이 잔혹하게 죽던 장면이 또렷이 떠올랐고 핏빛 속에서 송연정이 미쳐 날뛰며 웃고 있었다.
“보았느냐? 이게 바로 네 아비와 형들의 살점이니라!”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을 땐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문밖에선 송로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송 아가씨가 곤장을 맞은 후 사당에 갇혔다는데 유씨 부인은 새벽부터 대감 어르신을 붙들고 어서 풀어달라고 놓질 않는다네요...”
“허나 대부인께서 일단 결심하신 일은 대감이라도 어찌할 수 없죠. 이번 일은 대감님도 노하신 것 같습니다.”
“유씨 부인도 참, 제 핏줄 딸은 안중에도 없고 남의 딸을 위해 그리 발을 동동 구르다니, 정말 너무 하십니다!”
“이따가 또 우리 아가씨한테 들이닥치겠지요!”
그 말에 심화영은 짙은 망설임에서 깨어났고 악몽에서 정신이 들어 유씨 부인이 떠올랐다.
유씨 부인은 분명 그녀의 생모였다.
하지만 송연정이 후작 댁에 들어온 뒤부터 그녀는 매번 핑계를 대며 정작 친딸은 돌보지 않았고 그저 송연정이 부모 잃은 불쌍한 처지라며 모든 사랑과 정성을 그쪽에만 쏟았다.
송연정이 들어오기 전 그녀는 큰언니, 큰 오라버니, 작은 오라버니와 같은 소화원에서 살았었다.
그런데 송연정이 온 후로는 유씨 부인이 그녀를 위로한다면서 소화원을 송연정에게 내어주었기에 심화영은 외진 추월각으로 가게 되었다.
그 일로 대부인 고윤희가 그녀를 불러 크게 꾸짖었었다.
“넌 후작 댁의 작은 아가씨다. 어찌 처소를 외인에게 내어줄 수 있느냐?”
그때도 심화영은 유씨 부인의 말만 듣고 고윤희에게 대들었었다.
“연정 아가씨는 제 외사촌 언니시어요. 제겐 가장 소중한 사람이지요. 외인이 아닙니다.”
대부인은 혀를 차며 기가 막혀 했다.
그러나 그땐 어리기도 했고 유씨 부인이 계속 세뇌하기도 했었다. 그 말들도 당연히 유씨 부인이 몇 번이고 말한 말들이였다.
전생에는 유씨 부인에게 세뇌당해 그녀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제야 유씨 부인이 이상하다는 게 느껴졌다.
세상에 제 배 속에서 낳은 딸을 내팽개치고 남의 자식을 위해 이토록 모든 것을 내어주고 혼사까지 빼앗을 어미는 없으니까.
‘이 일은 시간이 나는 대로 반드시 따로 밝혀봐야겠네.’
마침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유씨 부인이 요란한 기세로 뜰 안을 가로질러 들어왔다.
“심화영이 어디 있느냐? 아직도 눈을 뜨지 않은 게냐? 벌써 해가 중천에 떴거늘, 이리 늦잠이라니!”
송로가 문득 맞받았다.
“참으로 웃기시옵니다. 이 비 오는 날에 어찌 해가 중천에 뜬단 말씀이옵니까? 아가씨께서는 간밤에야 겨우 잠드셨사온데,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으셨사옵니다.”
“비키거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유씨 부인은 송로를 밀쳐내고 “쾅”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문틈 사이로 찬 바람이 몰아치자 심화영은 몸보다도 마음이 더 싸늘하게 식어갔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유씨 부인을 바라보았는데 그 눈빛마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문 앞에 선 여인은 사십을 넘겼음에도 요염한 자태를 뽐내며 온몸에 비단과 옥 장신구를 휘감고 있었다. 머리에는 장신구를 수두룩이 꽂았으나 고급스러운 것이라기보단 화려함을 넘어 천박해 보였다.
한 걸음, 한 눈짓마다 풍기 문란한 기색이 묻어나 마치 후작 댁의 첩실이 아니라 춘루의 기녀처럼 보였다.
그녀의 가느다란 눈매 위로 치솟은 눈꼬리와 뾰족한 턱이 송연정과 많이 닮았다. 반면 심화영은 둥글넓적한 얼굴에 살구 같은 눈과 은은한 분홍빛 얼굴을 지녔기에 그녀와 닮은 구석 하나 없었다.
유씨 부인은 늘 장난스레 말하곤 하였다.
“연정이를 좀 보아라, 나를 꼭 빼닮지 않느냐. 외가의 고운 얼굴을 물려받은 게지. 너는 네 아비를 닮은 것일 테고.”
심철호는 확실히 둥글둥글한 생김새였다.
심화영은 전생에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유씨 부인과 눈을 마주한 순간 심화영의 가슴은 파도처럼 일렁였지만 그 눈동자는 깊고 어두운 물처럼 차가웠다.
그 눈빛을 마주한 유씨 부인은 잠시 멍해졌으나 이내 아랑곳없이 다시 입을 열었다.
“화영아, 깨어났다면 어서 대부인께 가 사정을 드려라! 연정이를 그 음침한 사당에 가둬두셨단다. 제사 지내는 곳이라 죽은 자의 기운이 서린 데다 연정이는 겁이 많아 벌써 혼이 나갔을지도 모른다. 음식도 들이지 말라 하셨고, 어젯밤엔 그 독한 계집의 지시로 곤장 서른 대를 맞았단다... 춥고 아프고 배고프고 무섭기까지 한데 혹여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유씨 부인의 붉은 입술이 바쁘게 오르내리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심화영은 이내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
“제가 칼에 맞고 칠 일을 누워 있어도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으셨지요. 제 상처에 대해선 안부 한마디 없으시니 모르는 이가 들으면 언니가 친딸인 줄 알겠어요!”
유씨 부인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고 잠시 얼어붙었지만 관심은 딴 데 있었다.
심화영이 왜 이렇게 차가워졌는지만 궁금할 뿐 별다른 생각이 미치지 않았으나 이내 익숙한 듯 억지웃음을 띠며 말했다.
“너야 어머니도 있고 아버지도 있으니 다들 너를 아껴주시지 않느냐. 연정이는 내 하나뿐이라 그저 내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되어서 말이지...”
하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입가에 떠오른 웃음은 점점 굳어갔고 이내 허위로 덮은 마음의 불안이 얼굴 위로 드러났다.
예전 같았으면 심화영이 인상을 찌푸리며 그만하라면서 사정하겠다고 했을 거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다만 죽은 듯 차갑고 무겁고 싸늘한 눈빛과 무표정한 얼굴로 유씨 부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빛에 마주친 유씨 부인은 입을 꾹 다문 채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마침내 시선을 이리저리 피하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더듬거렸다.
“가고 싶지 않다면 안 가도 된다. 그래, 잘 쉬거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긴 채 황급히 등을 돌리고 방을 나서며 속으로 혼잣말을 뱉었다.
“빌어먹을! 저 계집애 눈빛이 대체 언제부터 저리 무서워졌지?”
‘정말 귀신이라도 씌었나!’
심화영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금 전 그녀의 표정을 되새기듯 곱씹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밖에서 익숙한 걸음 소리가 다가왔는데 문은 열리지 않았지만 따뜻한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화영이는 좀 어떠하냐?”
그 목소리에 심화영은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라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