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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문을 밀고 들어선 이는 용모가 단정하고 자태는 곱고 온화했지만 가늘게 그린 눈썹 아래 눈두덩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흔적이 역력했다. 더구나 몸 안에 태기를 지니고 있어 기운이 쇠한 터라 얼굴엔 전례 없이 깊은 초췌함이 깃들어 있었다. 허나 그녀의 눈빛만은 따스하고 자애로웠다. “화영아, 어디 아픈 데는 없느냐?” 말을 마치기도 전에 대부인 고윤희의 발걸음이 이미 곁에 닿아 있었다. 심화영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낮게 부르짖었다. “어머니...” 고윤희는 그 부름에 잠시 멈칫했다. 착각이었을까. 오늘따라 이 막내딸의 목소리는 예전처럼 뾰족하고 거칠지 않았고 마치 갓 난 새끼 고양이처럼 어딘가 사무치게 의지하는 기색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가슴은 그 순간 말없이 풀어졌고 이내 손을 뻗어 딸의 몸 상태를 살폈다. “어제는 어의를 구하지 못해 부득불 의원을 데려왔더니 그 사이 네가 스스로 달아났다더구나... 이리 연약한 몸으로 그처럼 장대히 쏟아지던 빗속을 어찌 아무렇지 않게 내달린 것이냐?” “태진이 말로는 너를 찌른 자가 왕부의 사람이라던데, 상처는 좀 어떠하냐?” 그녀는 손가락을 부들거리며 아주 조심스럽게 심화영을 어깨에 손을 얹었다. 심화영은 제정신으로 돌아오듯 눈을 깜빡이다가 얼른 그 손을 감싸 쥐고는 목이 멘 채 중얼거렸다. “어머니, 저는 괜찮습니다. 괜한 걱정을 끼쳐드려 정말...”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고윤희는 태부부 출신으로 가문도 교양도 남다른 인물이었다.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아끼는 성품은 정평이 나 있었고 비록 유씨 부인을 탐탁지 않게 여기긴 했으나 그녀의 딸인 심화영에게만큼은 늘 한결같이 정을 베풀었다. 심지어는 유씨 부인이 몰래 생필품을 가로채도 고윤희는 가차 없이 나서서 이를 바로잡아 주곤 했다. 하지만 그때의 그녀는 마음속 원망과 미움에 눈이 멀어 오히려 유씨 부인 편에 서서 고윤희에게 자기 세 자식이나 잘 가르치라며 반기를 들곤 했다. 그러나 그녀가 병석에 누웠을 때조차 고윤희는 불룩한 배를 이끌고 의사를 찾아다녔기에 끝내 화병이 치밀어 피를 토하고 조산을 하였으며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나중에는 또 심화영 때문에 삼황자가 그녀를 관기가 되게 하였다. 고윤희가 귀한 몸이었는데 천박한 수모를 당하며 웃음을 팔아야 했으니 차라리 목숨을 잃는 것보다 가혹한 일이었다. 이 모든 것이 생각나자 심화영은 끝내 참지 못하고 오열했다. 고윤희는 그녀가 왕부의 일 때문에 겁먹어서 우는 줄 알고 조심스레 그녀를 끌어안으며 나직이 달랬다. “자, 이제 그만 울거라...” “명양왕도 정신을 되찾았잖냐. 우리 전씨 가문과의 사이는 세세손손 이어진 인연 아니더냐. 남은 일은 네 아버지와 두 오라비가 처리하실 테니 너는 몸을 잘 추슬러라. 몸이 회복되면 함께 가서 사과드리면 될 일이다.” 심화영은 눈물을 훔치며 그녀의 목을 감싸안았다. “네, 어머니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이제부턴 절대 경솔한 짓 하지 않겠어요!” 고윤희는 순간 굳어졌다. 심화영은 유씨 부인이 낳은 딸이었기에 그녀와 친근하지 않았고 자주 대들기도 했었다. 그간 어머니라 부르면 늘 억지로 꺼낸 듯한 기색이 역력했던 딸이었는데 이번엔 자연스럽게 “어머니”라며 목을 끌어안기까지 한 것이었다. 그때 송로가 옆에서 나섰다. “대부인, 우리 아가씨가 병을 앓고 나니 제 잘못을 스스로 깨달은 것이옵니다. 대부인께서 베푸신 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사옵니다.” 고윤희는 이내 눈시울이 붉어져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우리 화영아가 참 많이 자랐구나.” 이 말 한마디에 그간의 서러움이 다 녹아내렸다. 바로 그때, 심여진이 갓 끓인 삼계탕을 들고 들어왔다. “화영아, 이거 좀 들이켜렴. 어제 큰 오라버니께서 조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직접 시장에 들러 구해온 오골계로 끓인 것이란다.” 심화영은 눈물로 젖은 얼굴을 고윤희의 품에서 떼어내고 문득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열일곱 열여덟쯤 되어 보였다. 갸름한 얼굴에 버들잎 같은 눈썹과 달빛 같은 눈매가 있었는데 이 세상 온갖 온유한 기색이 그 얼굴에 깃들어 뼛속 깊이 스며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나 따스한 사람이 전생엔 그녀 탓에 심씨 가문을 지키고 명양왕부의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제왕의 첩이 되어 수년간 굴욕스럽게 살다가 죽게 되었다. 지난 일이 떠오르자 심화영은 가슴이 칼에 베이듯 아팠다. 지금은 모든 것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고 그녀가 여전히 화사한 젊음을 간직한 채 웃고 있다는 사실에 심화영은 끝내 눈물을 터뜨렸다. “언니, 고맙습니다.” 말이 끝나기 전에 그녀는 이미 자리에 앉아 삼계탕을 한술 떠 심화영의 입가에 가져갔다. 뚝, 그녀의 눈물이 국그릇 위로 떨어졌다. “울지 마, 울며 먹다간 체한다.” 그 말투와 눈빛은 꼭 고윤희를 빼닮아 있었다. 심화영은 그 말을 따라 꿀꺽꿀꺽 국물을 들이켰고 이내 기운이 조금씩 돌아왔다. 고윤희는 심화영의 기색이 제법 회복된 것을 보자 문득 지난밤의 일을 꺼냈다. “화영아, 어젯밤 일은 내가...” “어머니의 뜻대로 하십시오.” 심화영은 곱게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고윤희는 그녀가 이렇게 순순히 응하리라 생각지 못했는지 잠시 놀란 듯 눈을 깜박이다가 이내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날이 갠 후엔 내 처소로 옮겨 오너라. 이곳은 기운이 눅눅하여 네 몸을 보양하기엔 썩 좋지 않구나.” 심화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의 진심이란 눈빛 하나에 드러나고 계략은 말끝 하나로 읽히는 법이었다. 허나 전생의 그녀는 그 마음을 보지 못하고 어리석게도 속절없이 믿어버렸던 것이다... 고윤희와 큰언니 심여진이 떠난 뒤 심화영은 다시금 흐릿한 정신으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 뒤로도 며칠간은 상처를 회복하는 데 힘을 쏟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달력은 유월 초하루로 넘어갔고 오랜만에 하늘이 말끔히 개었다. 심화영은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정원에 나가서 맑은 공기를 들이켰다. 그러다가 전강훈의 다리에 대한 걱정이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해 무심코 찻물을 찍어 책상 위에 “고”라고 한 글자를 적었다. 그날 밤 돌아오는 길에 설현수가 전강훈의 다리에 있는 고충은 은침으로 억제해 봐야 기한은 고작 일 년이기에 그 안에 해독하지 못하면 그 뒤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말했었다. 만약 그가 내공을 잃고 병권까지 잃어 삼십만 대군을 다시는 거느릴 수 없게 된다면 모든 것은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이 될 터였다. 전생에 전강훈의 불행은 바로 그때부터 시작되었었다. 이번 생에는 절대로 같은 비극을 허락할 수 없었기에 반드시 그 고충을 없애야 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의술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고 구연국 쪽 문도 닫힌 상태였기에 당장은 설현수에게 침술을 익히는 것이 유일한 길이었다. 생각에 잠긴 찰나 자윤이 과일을 들고 들어왔다. “대부인께서 목을 축이시라고 갓 딴 배를 보내셨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드디어 연정 아가씨가 풀려났대요. 아직 상처가 덜 나아서 유씨 부인이 의원을 부르러 정신이 없답니다.” 단향은 곧바로 코웃음을 쳤다. “우리 아가씨야 대부인도 있고 대감도 있고 오라버니들까지 있으니 이만치 버티셨지. 그 유씨 부인 같은 친어미만 믿었다면 진작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겁니다.” 심화영은 생각을 거두고 배를 하나 집어 한입 베어 물었다. 단물이 입안 가득 번지자 정신이 또렷해졌기에 유씨 부인의 그 편벽된 사랑쯤은 이제 아예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때 자윤이 다시 말했다. “곧 왕부 대비마마의 생신연이 있잖습니까? 전씨 가문과도 오래된 사이시고 아가씨께서도 명양왕과 혼약이 있으니 피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대부인께서는 이미 선물이며 옷이며 장신구를 준비하고 계세요. 올해는 아가씨가 다쳤으니 신경 쓸 것 없다고 알아서 하시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을 듣자 심화영의 머릿속에 문득 전생의 기억이 스쳤다. 그때 그녀는 송연정의 꾐에 넘어가 어처구니없는 짓을 벌여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전까지는 송연정을 철석같이 믿었고 그녀의 진심을 의심한 적도 없었으니까. 혼약서를 찢어버리라고 종용했을 때도 그녀는 그것이 진심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송연정이 뭐라고 해도 믿지 않을 거니까. 이번 생의 송연정도 틀림없이 같은 꿍꿍이를 품고 있을 것이었다. 그녀가 아는 송연정과 삼황자는 분명 또 혼약서를 문제로 삼을 것이었다. ‘이번에는 혼약서를 반드시 지켜내리라.’ 심화영은 조용히 생각을 정리하곤 남은 배를 후딱 삼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윤아 말을 준비해라. 나가야겠다.” ... 이후 며칠간 심화영은 새벽에 나가 밤늦게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했다. 설현수에게 침술을 배우느라 여념이 없었고 송연정은 물론 명양왕부에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현시점의 의술로는 전강훈을 찾아가 봐야 도움은커녕 짐만 될 뿐이기 때문이다. 유씨 부인은 지난번에 심화영한테 정곡을 찔려서인지 송연정의 상처에 정신이 팔려서인지 그 후로는 얼굴조차 내밀지 않았다. 그러다 왕부 대비마마의 생신연 전날 밤, 심화영이 추월각으로 돌아와 갓 구운 고구마를 들고 허겁지겁 먹고 있었는데 송로가 들어와 어딘지 꺼림칙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내일 생신연 말입니다. 유씨 부인이 대감 어르신께 떼를 써서 연정 아가씨도 데려가게 해 달라고 했답니다. 장공주께 사죄를 올려야 한다고요.” “제 생각엔 분명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심화영은 순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아버지께서 허락하셨느냐?” 송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림도 없지요! 지난번 연정 아가씨가 그런 일을 저지른 뒤로 대감께서 어찌나 노하셨는데요. 며칠 전에는 둘째 아가씨의 신분을 폐하겠다고 하셔서 유씨 부인이 목을 맸다지 않습니까.” “그 꼴을 보고서야 겨우 마음을 누그러뜨리신 거죠.” 심화영은 그 말을 곱씹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전생에 송연정은 분명 그녀와 함께 왕부에 갔었다. 그때는 상황을 꿰뚫어 보지 못했지만 이제는 분명히 보였다. 송연정의 목적은 그녀로 하여금 혼약서를 찢게 만든 뒤 전태산을 격노케 하여 그녀를 죽이게 하고 스스로 전강훈의 왕비 자리를 꿰차려는 것이었다. 이번 생에도 그 속셈은 바뀌지 않았을 터였다. ‘지금 이 순간 송연정은 어떤 수를 꺼내 들 준비를 하고 있을까?’ 심화영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데려갈 사람은 있다더냐?” 자윤이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지금이야 돼지나 개나 다 외면할 처지죠. 누가 거기까지 데려가겠습니까? 그만 체념하고 말아야지요.” 심화영이 차갑게 비웃던 그때, 밖에서 울먹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유씨 부인이 들이닥쳤다. 말하지 않아도 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역시나 유씨 부인은 서럽게 눈물부터 쏟아내며 말했다. “화영아, 네 어미 된 사람으로서 엎드려 부탁하마. 그날 밤 연정이가 큰 잘못을 저지른 거 다 아느니라. 나도 호되게 꾸짖었고 대부인도 벌을 내리셔서 대가를 치렀단다. 지금도 앓고 있잖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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