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더 많은 컨텐츠를 읽으려면 웹픽 앱을 여세요.

제17화

“그래서요?” 심화영은 손에 들고 있던 음식 그릇을 내려놓고 유씨 부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마침내 대답을 주자 유씨 부인은 즉시 흐느낌을 거두고 서너 걸음에 다가섰다. “화영아, 연정이가 이미 자기 잘못을 뉘우쳤단다. 네 어머니도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하루빨리 사람을 골라 시집보내는 것이 상책이라 하셨지. 그래야만 너 또한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을 터이고. 그러나 시집보내려면 일단 상대를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 전생과 이번 생에 심화영은 유씨 부인과 긴 시간을 함께 지낸 터라 그녀가 손만 움직여도 무슨 수작을 부릴지 훤히 알 수 있었다. 역시나, 과연 그 말이 나왔다. “너도 알다시피, 너희 어머니가 급히 재촉하고 계시지 않느냐. 남녀가 서로를 알아볼 기회란 한정되어 있으니 이번에 있을 대비마마의 생신연이야말로 절호의 기회라 하지 않겠느냐. 네가 연정이를 데리고 가기만 하면 생신연에 온 여러 공자들이 눈에 띌 것이다...” “그게 다입니까?” 심화영이 중간에 말을 끊었다. 송연정이 마음에 두고 있는 자는 명양왕 전강훈이었다. 그가 없다면 전생처럼 원씨 황족의 삼황자 원태영을 노릴 게 분명한데 이렇게 높은 지위를 노리는 이가 굳이 생신연에 얼굴을 비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두 생을 살아온 심화영의 눈빛이 이미 심연처럼 어두워져 있었기에 그런 속내를 유씨 부인이 알아차릴 리 없었다. 유씨 부인은 눈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그뿐이란다.” “이건 어미의 마지막 부탁이라 생각해주렴.” 그렇게 말하며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고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전생의 심화영은 이 눈물 어린 얼굴에 늘 마음이 약해졌고 매번 그녀가 이 표정을 보일 때면 결국 뜻대로 해주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 다시 보니 눈물이 글썽이는 그 얼굴이 마치 기녀들이 단골을 붙잡기 위한 수작처럼 느껴져 속이 뒤틀릴 지경이었다. 그녀는 간신히 구토감을 억누르며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께선 제 어머니시니 마땅히 도와드리고 싶지요. 하지만 어머니도 아시다시피 전하는 저 때문에 중상을 입고 불구가 되었습니다. 장공주께선 제 뼈를 갈아버리겠다며 대노하셨지요... 언니를 안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혹여 함께 있다가 장공주를 자극하여 함께 화를 입게 될까 두려운 것입니다...” 심화영은 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차갑게 유씨 부인을 꿰뚫었다. “어머니, 언니가 저와 함께 죽는 건 원치 않으시지요?” 유씨 부인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더니 망설임의 빛이 떠올랐다. 심화영은 그런 그녀의 얼굴에서 일순간 스쳐 지나가는 여러 감정을 보며 마음이 서늘해져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날도 어두워졌고 몸도 피곤하여요. 어머니께선 돌아가시지요.” 말을 마친 심화영은 몸을 돌려 방으로 들어갔다. 유씨 부인은 아마도 송연정의 안전이 염려되었는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 발길을 돌려 유유히 떠났다. 계집종들은 이를 보고 분을 억누르지 못했다. “아니, 아가씨께서 장공주께 미움을 받고 있다고 말씀드렸거늘, 유씨 부인은 정작 걱정도 하지 않으시네요! 연정 아가씨 얘기가 나올 때에만 그토록 애절한 표정을 짓잖습니까!” “모르는 이가 보면 계모인 줄 알겠사옵니다!” 심화영은 묵묵히 입을 다문 채 조용히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전생에 유씨 부인은 심씨 가문에서 유일하게 화를 피한 사람이었다. 끝내 어디로 사라졌는지조차 알 수 없었으나 분명 송연정의 도움으로 무사했을 것이었다. ‘왜일까?’ ‘과연 단순히 송연정의 정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심화영은 고개를 저으며 뒤섞인 생각들을 떨쳐내고 눈을 감았고 다음 날 해가 중천에 뜬 시각에야 잠에서 깨어났다. 대부인 고윤희가 보낸 시녀가 문 앞에서 말했다. “아가씨, 부인께서 출발 준비를 하라 하셨사옵니다.” 심화영은 대강 몸을 단장한 뒤 혜심원으로 향했다. 그녀가 도착했을 때 대부인은 시녀 춘화에게 옷가지와 장신구를 준비시키고 있었는데 심화영이 들어서자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서 와 보거라. 옷 한 벌 맞추었으니 어울리는지 한번 입어보아라.” 상 위엔 밝고 따뜻한 추향색 치마가 놓여 있었는데 비취와 백옥으로 만든 비녀가 함께 곁들여져 싱그럽고 청초한 분위기를 더했다. 심화영이 좋아하던 색감이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매우 마음에 듭니다.” 그녀가 곧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이를 본 심여진이 눈을 반짝이며 칭찬했다. “그래서 화영이가 이 색감을 좋아하는 거구나. 이렇게 입고 나오니 마치 봄날 돋아난 통통한 새싹 같구나! 보기가 참으로 좋다.” 심여진은 그러며 손을 뻗어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심화영의 얼굴은 희고 복스러웠고 약간의 살이 남아 있었는데 여기에 사랑스러운 단장을 더 하니 더없이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대부인도 웃으며 말했다. “내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 우리 화영이 얼굴이란다. 동그랗고 복스럽게 생겨 보기만 해도 태평한 나라를 엿보는 듯하구나.” 유씨 부인에겐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라 그녀는 괜스레 코끝이 찡했다. 유씨 부인은 늘 둥근 얼굴은 여인의 풍치가 없으니 교태를 못 부린다고만 했었다. 허나 후작 댁의 금지옥엽이라면 교태를 부릴 이유가 없었다. 마음이 복잡한 찰나 시녀들이 아침상을 들여왔고 대부인이 말했다. “명양왕이 이제 겨우 의식을 회복했다고 하니 대비마마의 생신연도 그리 성대하게 치르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속 든든히 채우고 가거라.” 심화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얼른 배를 채웠다. 비록 송연정을 데려가지 않았지만 마음속 불안감은 여전했다. 삼황자 원태영이 가만히 있을 인물이 아니었으니까. 가던 길 내내 심화영이 말없이 앉아 있자 그 모습을 본 대부인이 다정하게 위로했다. “연정이 일로 마음 쓰지 마라. 오늘은 전하와 여러 황자가 모두 참석하는 생신연이니 왕부 출입이 삼엄할 것이야. 초대장도 없는 이가 함부로 들 수야 없지.” 심화영은 겨우 안심하며 대부인을 따라 마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송연정이 삼황자를 찾아갈까 봐 걱정되었지만 아무리 삼황자라고 해도 함부로 사람을 데리고 들어올 수 없다고 생각되었기에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러나 안에 들어서자 그녀를 향한 시선이 사방에서 꽂혀왔다. 그들은 겉으론 온화하게 대부인께 인사했지만 속내는 분명 딴전이었는데 생각해 보지 않아도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있었다. 심화영이 전생 내내 삼황자를 짝사랑했고 명양왕과의 혼약을 파혼한 일이 경성 전체에 퍼졌으니 사람들이 당연히 그녀를 조롱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대부인은 그녀의 손을 따뜻하게 잡으며 말했다. “사람들이야 무어라 하든 너의 아버지는 어엿한 대감이시다. 저들은 그저 뒤에서 수군대는 정도일 뿐이니 너무 개의치 말거라.” 그 말에 심화영은 마음이 따뜻해졌고 대부인을 따라 화청으로 들어갔다. 손님들이 속속 도착하였는데 그들이 오자 시선을 그들한테 고정했다. 그러나 심화영은 무시와 재미로 가득한 그들의 눈빛을 뒤로하고 대부인을 따라 주인께 인사하고 나서 자기 자리에 앉았다. 사람들이 많았기에 전씨 가문에서도 그녀를 난감하게 하지는 않았다. 높은 자리에 앉은 피로가 역력한 대비마마와 표정이 안 좋은 장공주를 보자 심화영은 그녀들이 자신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전태산은 손님들과 담소를 나누며 웃고 있었으나 심화영을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를 환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심화영이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전강훈은 보이지 않았다. ‘상처는 다 나았으려나...’ 전생에서는 설현수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가 휠체어에 앉아 생신연에 왔었기에 이번 생은 그보다 나았으니 아마 이내 모습을 드러낼 것 같았다. 그녀는 다른 이들에는 관심도 없었고 얘기도 나누고 싶지 않았기에 최대한 조용히 앉아 다만 오늘이 무사히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송연정이 들어오지 못한다면 이런 기회를 틈타 혼인을 어지럽히려는 일도 어렵게 될 거니까. 그러던 찰나 청아한 외침이 문밖에서 울려 퍼졌다. “전하 행차 시옵니다!” 순간 심화영은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고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만세를 외쳤으나 속은 편치 않았다. 설현수가 나선 대가는 곧 원씨 황족의 몰락이었으니까. 그것은 결국 오늘 이 자리에 선 황제와 그녀의 필연적인 파멸을 의미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참극이 언제부터 시작될지는 몰랐다. 심화영은 고개를 숙이고 손등에 스치는 황제의 곤룡포 자락을 느끼며 곧 들려온 목소리에 따라 자리로 돌아갔다. “모두들 자리로 돌아가라.” 이후 세자 원시경, 이황자 원상우, 그리고 어린 사황자 원민준이 차례로 입장하였다. 그러나 삼황자 원태영의 모습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심화영의 불길한 예감이 스쳐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황제는 형식적인 축사를 마친 뒤 문득 물었다. “명양왕은 왜 보이지 않느냐? 상처는 어떠하냐?” 이 말에 장공주는 곧 심화영을 노려보다가 말했다. “좋아는 졌지만 여전히 거동이 불편하옵니다. 회복 중이오니 조금 늦게 입장할 것이옵니다.” 사실상 그녀 탓이었기에 심화영은 입을 다물었다. 바로 그때 바깥에서 바퀴가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심화영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청석으로 포장된 길 위로 바퀴 의자 하나가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 위에 앉은 이는 비록 얼굴에 핏기가 덜 돌아왔지만 눈빛만은 번뜩이고 있었기에 바퀴 의자라 해도 그 위에 앉은 이의 눈빛은 검처럼 날카로웠다. 전장의 피바람 속에서 살아 돌아온 사내의 위압감은 황제조차도 능히 누르지 못할 정도였다!

© Webfic, 판권 소유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