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fic
더 많은 컨텐츠를 읽으려면 웹픽 앱을 여세요.

제4화

심화영은 그 말에 당황했다. 차가운 빗물이 머리 위에서 쏟아지자 단향은 황급히 종이우산을 펴서 씌워주며 그녀를 설득했다. “아가씨, 가지 않는 게 좋을 듯합니다. 지난 과오를 바로잡고 싶어 하시는 마음은 알겠습니다만,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송로가 말했다. “맞아요. 명양왕부의 실력이라면 아마 의원이라는 의원은 전부 불러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가씨가 누구를 찾아갈 수 있겠습니까? 차라리 나리와 큰 도련님께 맡기시는 게 나을 듯합니다.” “한 명 있다.” 심화영은 고개를 저으면서 두 계집종을 밀어냈다. “그분은 성격이 괴팍한 편이다. 그분을 데려오려면 절대 그분의 신분을 노출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를 데려가는 것도 불가능하지... 너희는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거라. 나는 금방 갔다 오겠다.” 그녀는 말을 마친 뒤 바로 마구간으로 향했다. 마구간에서 말 한 마리를 끌고 나온 심화영은 몸이 좋지 않은 것을 신경 쓸 새도 없이 곧장 뒷문으로 달려 나갔다. 우레가 치고 폭우가 쏟아졌으며 날이 아주 추웠다. 심화영은 말에 탄 채로 몸을 계속 덜덜 떨었고 머리도 깨질 듯이 아팠다. 그녀는 설현수가 승낙할 때까지 몸이 버틸 수 있기를 바랐다. 말은 바람을 가르며 빠르게 달렸고 심화영은 말의 등에 탄 채로 거칠게 흔들렸다. 그렇게 청유 거리를 달리던 심화영은 문득 전생의 일을 떠올렸다. 그녀와 설현수는 연남산에서 약초를 채집하다가 알게 된 사이였다. 당시 설현수의 곁에 있던 만식이가 학질을 앓았었는데 학질은 급병이었고 약초를 찾으러 산을 올랐던 설현수는 마침 그녀와 만나서 함께 약초를 캐게 되었다. 설현수에게 당장 약초가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된 심화영은 자신의 바구니 안에 있던 약초를 그에게 주었다. 그 약초는 학질을 치료하는데 효과가 매우 뛰어난 동시에 구하기가 아주 어려운 귀한 약초였다. 약초가 많이 난다는 연남산에서조차 쉽게 볼 수 없는 것이었기에 설현수는 그녀에게 크게 감격하였고 앞으로 청유 거리로 오면 그녀에게 자신의 의술을 전수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어렸을 때부터 약초에 관심이 많았던 심화영은 그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설현수의 의술은 가히 최고라 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는 심화영에게 자신이 아는 것을 아낌없이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에게서 많은 걸 배운 심화영은 의술로 사람을 구하기는커녕 삼황자 원태영의 속임수에 넘어가서 그를 위해 독약을 수도 없이 만들어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을 해쳤다. 전강훈의 두 다리를 치료할 방법이 없다는 걸 알게 됐을 때도 심화영은 그의 다리를 살펴볼 생각은 하지 않고 송연정의 자궁한을 치료해서 그녀가 삼황자의 아이를 가질 수 있게끔 해주었다. 가슴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후회와 원망이 마음속을 마구 헤집어놓았다. 눈물이 차오르는 기분에 심화영은 말을 채찍질하며 더욱 빠르게 비를 뚫고 달렸다. 이각쯤 지나 심화영은 말에서 내린 뒤 말을 끌고 아주 더럽고 지저분한 작은 골목길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경성에서 최악이라 불릴만한 곳이라 그곳을 찾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일반적으로 돌아갈 곳이 없는 걸인들이 그곳에 있는 허름한 폐가에서 모여 살고 있었다. 흰말을 끌고 들어간 심화영은 그곳과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골목길의 가장 안쪽에는 집 하나가 있었고 7, 8살쯤 돼 보이는 어린 사내아이가 문지방에 걸터앉아 손으로 반쪽짜리 시호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심화영을 본 아이는 깜짝 놀랐다. “아가씨, 이렇게 큰비가 쏟아지는 날에 여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아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찰박찰박 달려왔고 심화영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살짝 거칠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사부님은?” “안에서 주무시고 계세요. 성격이 아주 고약해서 저한테 안으로 들어와 시끄럽게 굴지 말라고 하셨어요...” 만식이는 불만을 터뜨리다가 물었다. “할아버지를 만나러 오신 거예요? 아마 보지 않겠다고 하지 않을까요? 할아버지 성격은 아가씨도 아시잖아요.” 심화영은 당연히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너는 그저 안으로 들어가서 내 얘기를 전해주면 된다. 나는 사부님께서 나와 함께 이곳을 떠나 명양왕 전하의 다리를 살펴봐 주기를 바란단다.” 심화영은 그렇게 말한 뒤 문밖에서 무릎을 꿇었다. 바닥에 돌멩이들이 많아 무릎을 꿇는 순간 엄청난 통증이 느껴졌다. 심화영의 얼굴은 젖어 있었는데 그것이 눈물 때문인지, 빗물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녀의 뇌리에 전생에 아픈 다리를 이끌고 수년간 최선을 다해 그녀를 지켰던 전강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겨우 무릎을 꿇은 것만으로 이렇게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인간들은 서로의 희비에 공감하기 어려웠다. 전생의 그녀는 얼마나 매정하고 잔혹했고 이기적이었던가. 심화영은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자세를 바로 했다. 이번 생엔 빚을 갚아야 했다. 만식이는 도저히 심화영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어 방 안으로 들어가 크게 외쳤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화영 아가씨께서 찾아오셨어요. 지금 문밖에서 무릎을 꿇고 계세요. 할아버지가 명양왕 전하를 구해주길 바라신대요.” 방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심화영은 설현수가 듣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그가 승낙할지는 알 수 없었다. 설현수는 성격이 괴팍했고 예전에 그녀와 세 가지 약속을 한 적이 있었다. 첫 번째는 외부인을 데리고 이곳으로 올 수 없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가 의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남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며 세 번째는 그가 경성의 권력 다툼에 휘말리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오늘 심화영은 약속을 어겼다. 명양왕은 단순한 권력가가 아닌데 심화영은 그가 명양왕을 치료해 주기를 바랐다. 그렇게 된다면 설현수가 의술을 할 줄 안다는 것은 반드시 세상에 알려질 것이다. 심화영은 설현수의 화를 감당할 준비를 했다. 예상대로 만식이가 이내 밖으로 나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할아버지께서 썩 꺼지라고 하셨어요.” 말을 마친 뒤 만식이는 문을 닫았다. 이미 예상한 일이었다. 심화영은 어쩔 수 없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사부님, 약속을 어겨서 송구합니다. 절 어떻게 벌하시든 괜찮으니 제발 명양왕 전하를 구해주세요. 전하는 제게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입니다.” 안에서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빗줄기는 계속해 쏟아졌고 시간은 조금씩 흘러 오후가 되었다. 골목길에 마차 한 대가 멈춰 섰고 그 안에서 비단옷을 입은 사내가 내렸다. 종이우산을 손에 든 그는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그곳으로 걸어갔다. 발소리를 들은 심화영은 고개를 돌려 사내를 본 순간 흠칫했다. 사내는 바로 삼황자 원태영이었다. 청유 거리는 매우 외진 곳에 있었고 심화영은 심지어 일부러 멀리 돌아왔다. 저택에 있는 계집종들에게도 이곳을 알려준 적이 없는데 원태영은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안 것일까? 설마 설현수를 알고 있는 것일까? 심화영의 마음속에서 큰 파도가 일렁이고 있을 때 원태영은 이미 그녀의 앞에 섰다. 종이우산 아래 준수하고 단정한 얼굴이 보였다. 심지어 그의 말에서는 온화함이 느껴졌다. “다쳤으면서 왜 몸조리를 하지 않고 이곳으로 온 것이냐?” “...” 심화영은 충격에 빠져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전생에 원태영이 가차 없이 그녀의 가족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일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원태영은 창백해진 심화영의 안색을 보더니 품 안에서 따뜻한 요깃거리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조금이라도 먹거라.” 그가 말했다. “이번 일은 잘했다. 이래야 전강훈이 네가 한 짓이라고 의심하지 않지. 널 향한 전강훈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네 희생에 감동하여 앞으로 네 말을 더 잘 들으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냥 보여주기식이니 네 몸까지 상할 필요는 없다. 일찍 돌아가거라. 걱정되니 말이다.” 원태영은 그렇게 말하면서 손을 뻗어 심화영의 머리를 쓰다듬고 그녀에게 종이우산을 건넨 뒤 자신은 비를 맞으며 자리를 떴다. 전생이었다면 그의 다정함에 감격했겠지만, 지금은 그저 역겹기만 했다. 원태영이 그런 말을 한 이유는 심화영을 향한 전강훈의 감정을 이용하여 앞으로도 전강훈을 계속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였다. 그의 행위에 소름이 끼친 심화영은 자신의 손에 들린 종이우산을 보더니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본 것처럼 종이우산을 홱 던졌다. 잠시 뒤 날이 저물었고 다시 고열을 앓게 된 심화영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 눈을 떴을 때 흐린 등불과 그녀의 옆에 앉아서 젖은 수건으로 이마를 적셔주는 만식이, 불가 근처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는 설현수가 보였다. 심화영이 깨어나자 설현수는 담배를 힘껏 빨아들인 뒤 입을 열었다. “내가 나서길 바라는 것이지? 그리해 줄 수는 있다. 대신 조건이 있다. 그 조건 때문에 너는 죽을 수도 있다. 그러니 잘 고민해보거라.” 심화영은 고개를 들어 설현수를 바라보았다. 촛불 아래 설현수의 핼쑥한 얼굴과 번뜩이는 눈빛에서 잠깐 시체가 즐비한 지옥이 보인 것 같아 심화영은 순간 흠칫하면서 조금 겁을 먹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대답했다.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 Webfic, 판권 소유

DIANZHONG TECHNOLOGY SINGAPORE PTE. L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