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설현수가 입을 열기 전까지 심화영은 그의 조건이 얼마나 무시무시할지 예상치 못했다.
설현수는 고개를 들어 심화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야 시선을 거두고 검은색의 환약을 만식이에게 건넸다.
“전해주거라.”
그러고 나서 심화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조건을 논하기 전에 우선 이걸 먹거라. 만약 네가 약속을 어기거나 내게 해를 끼친다면 나는 네게 해독약을 주지 않을 것이다. 해독약은 석 달에 한 번씩 받으러 오거라. 근본적인 치료 방법은 없으니 잘 고민해 보거라.”
만식이는 물을 들고 다가가서 심화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냥... 포기하는 건 어떤가요? 어차피 아가씨도 그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잖아요.”
심화영은 만식이의 손에 들린 검은색의 환약을 본 순간 많은 일들이 떠올랐다.
예전에는 정말로 그를 좋아하지 않았었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유씨 부인과 송연정 때문에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착각한 걸지도 몰랐다.
그러나 지금은...
심화영은 약을 먹은 뒤 고개를 들어 설현수를 바라보았다.
“사부님, 이제 얘기하세요.”
한시가 급했다. 지금 그녀는 이곳에 오래 있을 여유가 없었다.
설현수는 심화영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네가 이런 성격인 줄은 몰랐는데... 오히려 잘됐다.”
그의 눈빛에서 아주 깊은 어떠한 감정이 보였다. 그것은 마치 심해와도 같아 심화영은 그것이 어떤 눈빛인지 알지 못했다.
설현수가 말했다.
“오늘 나는 네가 바란 대로 전씨 가문의 그 아이를 구해줄 것이다. 대신 너는 날 위해 원씨 황족을 제거해야 한다.”
“뭐라고요?”
심화영은 깜짝 놀라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엇 때문입니까?”
삼황자 원태영이 나쁜 놈이긴 하지만 원씨 황족은 그동안 나라를 잘 다스렸고 지금의 황제 또한 어질고 덕망이 높기로 유명했다.
설현수는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타오르는 장작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철천지원수다.”
그는 잠깐 뜸을 들인 뒤 말했다.
“그게 싫으면 전강훈 그놈을 멀리하든가, 날 위해 이 일을 하든가 선택하거라. 어차피 선택은 네 몫이다...”
심화영이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 설현수가 말했다.
“그 이유를 알고 싶다면 지금 네가 선택한 길을 따라 쭉 가다 보면 언젠가는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네 운명이다.”
심화영은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녀는 거듭 고민하다가 마침내 이를 악물고 말했다.
“하겠습니다.”
설현수는 살짝 놀랐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고 있는 것이냐?”
“네.”
심화영은 시선을 들어 설현수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저는 반역을 꾀하는 역적이자 권력을 넘보는 간신이 될 것이고, 저뿐만 아니라 제 가족들 또한 매일 살얼음판 위를 걷게 되겠지요.”
심화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전생에 그녀는 황족과 혼인하고 싶어 했지만 결국 심씨 가문까지 파국을 맞이하게 되었다.
반 각 뒤, 설현수는 그녀를 따라 청유 거리를 떠났다.
비는 계속 쏟아졌고 밤바람은 살을 엘 정도로 차가웠다. 심화영은 황궁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앞으로 자신과 원씨 황족 둘 중 하나는 파멸을 맞이하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결단을 내린 심화영은 고개를 돌려 설현수를 바라보았다.
“사부님, 만약 전하의 다리를 치료해 주신다면 반드시 도와드리겠습니다.”
설현수는 그녀에게 독을 먹였고 심화영은 아직 죽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지켜야 할 가족들이 있었고 전생의 과오를 바로잡고 빚을 갚아야 했으며 복수도 해야 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소중히 여기고 싶은 사람도 있었다.
깊은 밤, 설현수는 심화영을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내 말을 잘 따른다면 나는 앞으로 네게 귀문13침과 영귀8법을 가르쳐줄 것이다. 그걸 전부 배우게 된다면 너는 최고의 의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심화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설현수를 바라보았다.
전생에도 그녀는 설현수에게서 의술을 배웠었고 그 뒤로 경성에서 훌륭한 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설현수가 귀문13침과 영귀8법을 할 줄 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심화영은 놀라서 말했다.
“그 두 가지는 이미 오래전 실전된 것들이 아닙니까?”
전생에 설현수는 그녀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전부를 가르쳐주지는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설현수와 원씨 가문은 철천지원수였는데 정작 심화영은 삼황자와 혼인하려고 아득바득 애를 썼다. 설현수가 그녀를 죽이지 않은 것만으로도 아량을 베푼 것이었다. 그러니 그렇게 중요한 의술을 그녀에게 가르쳐줄 리는 없지 않은가?
전생에 자신이 저질렀던 멍청한 짓들을 떠올린 심화영은 그를 볼 면목이 없었다.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설현수는 차갑게 코웃음을 흘렸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심화영을 유심히 지켜볼 뿐이었다.
심화영은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경성 사람들 모두 그녀가 전강훈을 싫어하고 삼황자를 연모한다는 걸 다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평소와 달리 자신의 목숨까지 내걸면서 전강훈을 구하려고 하니 당연히 놀랄 만도 했다.
삼황자를 떠올린 심화영은 저도 모르게 물었다.
“사부님, 사부님께서 이곳에 사신다는 걸 아는 사람이 또 있는 것입니까? 오늘 오후 삼황자 전하가 이곳에 한 번 왔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떠날 때 굉장히 조심했고 전하에게 그 사실을 알린 적도 없습니다. 오늘 전하가 우연히 이곳으로 온 것인지, 아니면 사부님을 찾으러 온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원태영 말이냐?”
설현수의 눈빛에 살기가 감돌았다.
심화영은 곧바로 경계했다. 설현수는 무공을 할 줄 알았고 그의 살기는 아주 진실했다.
심화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님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만약 사부님께서 원씨 가문과 정말로 원한이 있다면 청유 거리도 더는 안전하지 않을 듯합니다.”
“그놈은 날 어찌할 수가 없다.”
설현수의 목소리가 갑자기 차가워졌다. 그의 목소리에서 위엄이 느껴졌다.
심화영은 자신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에 휘말렸는지 알지 못했지만 지금의 그녀에게는 물러날 길이 없었다.
자시쯤 두 사람은 명양왕부 앞에 도착하게 되었다.
어두운 밤, 앞에 사람 한 명이 문 앞에서 서성거리며 초조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그는 이따금 입을 가리고 심하게 기침했다.
심화영은 뚱뚱한 그의 몸을 본 순간 눈물이 터져 나왔다.
전부 그녀 때문이었다.
그녀 때문에 그녀의 아버지는 폭우가 쏟아지는 와중에 명양왕부 밖에 서 있느라 비를 쫄딱 맞고 병까지 얻었다.
“아버지.”
심화영은 말에서 내린 뒤 힘겹게 목소리를 쥐어 짜내며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전부 제 잘못입니다. 불효한 저를 용서해 주세요.”
고개를 돌린 심철호는 심화영을 본 순간 기쁜 기색을 드러냈다.
“화영아, 깨어난 것이냐?”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린 그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깨어났으면 집에 가만히 있을 것이지, 이곳에는 왜 온 것이냐?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모르는 것이냐?”
심화영은 잠깐 사이에 달라진 그의 눈빛에서 자신을 향한 그의 애정과 실망을 동시에 느끼고 목이 메어 말했다.
“아버지, 제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명양왕 전하를 치료해 줄 의원을 데려왔습니다. 부디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심철호는 고개를 돌려 설현수를 바라보았다.
“이 노인이 의원이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이분은 신분을 숨기고 살던 명의입니다. 의술이 굉장히 뛰어나서 안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반드시 전하를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화영은 그렇게 설명한 뒤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병사를 향해서 말했다.
“심씨 가문에서 신분을 숨기고 살던 명의를 데려왔다고 나리께 전해주겠느냐?”
“저 노인이 명의란 말입니까?”
병사는 경멸 가득한 표정으로 설현수를 바라보았다.
“걸인을 데려와서 누구를 속이려고 드는 것입니까? 아가씨, 우리 명양왕부는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지금 당장 저자를 죽여서 저자의 머리를 들고 안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나리께 대체 누가 우리 전하를 해치려고 했는지 보여줄 것입니다!”
병사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설현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설현수는 피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명양왕부의 현판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무공을 할 줄 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듯이 그저 복잡한 눈빛으로 현판을 바라볼 뿐이었다.
검 끝이 설현수의 심장에 겨눠졌다.
심화영은 대경실색하며 먼저 움직여 설현수의 앞을 막아섰다. 그 순간 검 끝이 심화영의 어깨를 꿰뚫었다.
심화영은 앓는 소리를 내더니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러면 지금 당장 날 죽여 보거라! 전하께서 괴로워할지, 아니면 통쾌해할지 나도 궁금하구나!”
심화영은 그렇게 말해 놓고서는 자신이 매우 비열하다고 느꼈다.
그녀는 또 한 번 자신을 향한 전강훈의 감정을 이용했다.
그러나 그 말을 효과적이었다.
병사는 그 말을 들은 순간 안색이 달라지더니 검을 뽑고 안으로 보고하러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