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심화영은 어깨의 상처를 움켜쥐고 말없이 대문을 빤히 바라보았다.
피가 금세 옷을 빨갛게 물들였는데도 심화영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일각이 지났는데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무거운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고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심철호는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실망스러움이 천천히 안타까움으로 변해갔다. 간신히 깨어났는데 이렇게 고생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넌 돌아가거라. 나와 이 어르신이 여기서 기다리겠다. 너는 여기 있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으니 차라리 집에 돌아가서 쉬는 것이...”
콜록콜록.
심철호는 그렇게 말하더니 저러다 폐를 토해내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될 정도로 격하게 기침했다.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 심화영은 미안함이 물밀듯이 밀려왔고,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이렇게 큰 사고를 쳤는데도 심철호는 그녀를 차마 원망하지 못하고 그녀의 몸을 걱정했다. 심지어 심화영은 유씨 부인이 그에게 약을 써서 낳은 서녀였는데 심철호는 그녀를 단 한 번도 싫어한 적이 없었다.
바른 성품을 가진 심철호는 심화영 때문에 결국...
심화영은 울컥했다. 하고 싶은 말도 많았지만 그중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옆에 있던 설현수는 심철호와 그녀를 번갈아 보다가 말했다.
“왕부에서 널 안으로 들이지 않으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사서 고생을 한단 말이냐?”
심화영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당연히 제가 끝까지 책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하를 뵙지 못한다면 저는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비가 점점 더 세차게 쏟아지는데...”
설현수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 가면서 심화영의 머릿속에 또 한 번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전강훈은 피투성이가 된 다리를 끌고 무려 십 리를 기어와 그녀에게 어서 경성을 떠나라고, 지금 떠나지 않으면 늦는다고 했었다.
눈보라가 몰아치던 그날, 바닥에는 눈이 반 자 정도 쌓여있었다.
그렇게 궂은 날씨에도 심화영은 전강훈을 위해 대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무려 한 시진이 지나서야 혐오 가득한 표정으로 그에게 꺼지라고 했다.
‘그때는...’
심화영은 후회와 슬픔 때문에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러다 갑자기 대문 쪽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스무 살 정도 돼 보이는 점잖은 사내가 나왔다. 흰 피부에 깔끔한 외모, 맑은 눈빛의 사내는 눈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오랫동안 시달렸는지 아주 초췌한 모습이었다. 원래도 마른 몸이 더 수척해 보여 바람 한 번 불면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 사내는 바로 심화영의 둘째 오라버니 심태진이었다. 심태진은 온화하고 세심한 성정에 참을성이 많은 편이었는데 어렸을 때부터 태의원 원정에게서 의술을 배워 열일곱에 태의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명양왕이 중상을 입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그도 당연히 이곳에 있어야 했다.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아도 그에게 상처가 생긴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마 그녀를 대신하여 백세민에게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심화영은 심태진의 모습을 보고 나니 회한이 더욱 깊어졌다.
심태진은 심화영에게 의술을 가르친 첫 선생이었다. 심태진은 동생인 심화영에게 매우 다정했다. 매번 태의원에서 돌아올 때마다 궁에서만 맛볼 수 있는 요깃거리들을 가져와 그녀에게 주었다. 본인도 아까워서 먹지 못하는 것을 말이다.
게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늘 그녀에게 약초를 구분하는 법, 맥을 짚는 법, 설상을 살피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그녀의 요구라면 뭐든 들어주었다.
심태진처럼 훌륭한 사람이 전생에 그녀 때문에 척추를 다쳐 젊은 나이에 평생 침상에 누워있어야만 했다. 어딘가로 가려면 내시들이 그를 들어주어야 했기 때문에 결국 몇 년 뒤부터는 사람들의 미움을 받았다.
그런 그조차도 삼황자의 계략을 피해 갈 수는 없었다.
7년 뒤 겨울, 삼황자는 심화영이 만든 약으로 황제를 독살한 뒤 그 죄명을 심태진에게 뒤집어씌웠고 결국 심태진과 큰 오라버니, 아버지 모두 능지처참을 당했다.
삼천 번 넘게 칼로 살을 발라냈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게다가 심태진은 원래도 몸이 가녀린 편이었다.
심태진을 보게 된 심화영은 온몸을 떨며 고통스러운 얼굴로 그를 불렀다.
“오라버니.”
심태진은 그녀를 바라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백세민이 네가 왔다고 전하길래 놀랐다.”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자신이 입고 있던 망토를 그녀에게 걸쳐주며 말했다.
“돌아가거라. 이곳은 나와 아버지한테 맡기거라.”
이렇게 호되게 당했는데도 심태진은 여전히 그녀를 지켜줘야 할 동생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도망칠 수 없었다.
심화영은 고개를 저었다.
“전하께서 심하게 다치신 것은 저 때문입니다. 제가 아버지와 오라버니 뒤에 숨는다면 명양왕부의 분노는 오롯이 두 분께 쏟아지게 되겠지요. 그걸 아는데 제가 어떻게 아버지와 오라버니 뒤에 숨겠습니까? 저는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질문했다.
“전하께서는 어떻습니까?”
심태진은 조금 당혹스러웠다. 그가 알고 있는 심화영 같지 않았다. 심화영은 단 한 번도 명양왕을 걱정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심철호도 자신을 간절히 바라보고 있었기에 그는 서둘러 상황을 설명했다.
“다른 어의들이 계속 진찰 중이다. 하지만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구나. 명양왕 전하께서 깨어난다고 해도 다리는 나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공도 쓸 수 없을 테니 평생 폐인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심철호는 그 말을 듣고 비틀거렸다.
명양왕 전강훈은 명양왕부의 독자였다.
그가 폐인이 된다면 누가 명양왕부를 물려받겠는가? 그리고 그들의 손에 있는 30만 대군은 또 어떻게 한단 말인가?
어쩌면 명양왕부가 쇠퇴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명양왕부에서 심씨 가문을 없애버리려고 할지도 몰랐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이었지만 그 말을 들으니 여전히 충격적이었다.
전생의 그녀는 얼마나 멍청하고 이기적이었는가? 삼황자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가족들을 이토록 위험한 상황에 빠지게 하다니.
심화영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심태진은 심화영을 보면서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리께서는 그 사실을 알고 화가 나셔서 피를 토했다. 그리고 마마께서는 너를 죽여버릴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그렇게 말한 뒤 설현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런 차림이라면 마마께서 절대 들여보내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계속 여기 있어 봤자 모욕만 당할 것이다...”
그것은 심화영에게 하는 말이었다.
심화영도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들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기에 심화영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아무리 저를 싫어한다고 해도 어의들까지 전부 손쓸 수 없게 된다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라도 안으로 들여보내 주실 것입니다. 둘째 오라버니, 한 번만 더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해 주십시오. 전하의 몸속에 있는 독을 열흘 내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 독은 경맥과 골수까지 침투하여 더는 치료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심화영은 매우 초조해하며 자기도 모르게 심태진의 옷소매를 잡고 그에게 애원했다.
심태진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전하께서 무슨 독에 당했는지 알고 있는 것이냐?”
어의도 알아내지 못했는데 말이다.
심화영은 살짝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모릅니다. 하지만... 안으로 한 번 들어가 살펴보고 싶습니다.”
전강훈은 고독에 당했다.
전생에 심화영도 몇 년이 흐른 뒤에야 원태영을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제국에는 고를 다를 줄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다. 그것은 구연 쪽의 일부 사람들만 알고 있는 수단이었기에 만약 그녀가 그걸 안다고 한다면 아마 또 한 번 큰 소란이 일어날 것이다.
그래서 심화영은 얘기할 수 없었다.
그녀는 설현수를 힐끔 보며 말했다.
“만약 이분께서 살펴봤는데도 호전되지 않는다면 제 목숨을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심태진은 경악한 표정으로 심화영을 바라보았다. 심화영이 완전히 달라진 것만 같았다.
그러나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기에 심태진은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겠느냐...”
심씨 가문에서는 최대한 빨리 왕부와의 관계를 완화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도 진심으로 전강훈이 하루빨리 낫길 바랐다. 사실 두 가문은 오래전부터 아주 각별한 사이였는데 심화영이 갑자기 혼약을 파기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사이가 살짝 틀어졌다.
그래서 심태진은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다시 안으로 들어가 보마.”
또 기나긴 기다림이 이어졌다.
심화영은 안으로 들어간 심태진이 장공주에게 또 한바탕 수모를 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예상했다.
장공주는 명양왕의 생모이자 황제의 친여동생이었는데 까탈스러운 성정으로 유명했다. 명양왕부가 오만하다고 평가받는 것에 그녀가 9할 정도의 이바지를 했을 것이다.
장공주는 자신의 남편과 친아들에게도 살갑지 않은 사람이었으니 심씨 가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지는 불 보듯 뻔했다.
심화영은 심태진이 걱정되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녀가 초조해하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우연히 익숙한 얼굴이 왕부의 측문으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그자는 큰 검은색의 망토를 입고 모자를 쓰고 있었다. 뒷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녀가 심화영의 사촌 언니 송연정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