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네가 아는 사람이냐?”
설현수는 심화영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걸 발견하고 물었다.
심화영은 정신을 차린 뒤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다만 궁금하였을 뿐입니다...”
이곳은 얘기를 나누기 적절한 장소가 아니었다.
그러나 심화영은 이내 수많은 일들을 떠올렸다.
전생에 심화영은 전강훈을 싫어했었다. 그러나 전강훈은 포기하지 않고 심화영에게 집착하며 귀찮게 굴었다. 게다가 전강훈은 자신이 출정했을 때 그녀에게 있었던 일까지 전부 조사했고 그 일 때문에 심화영은 매우 화가 나서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서 삼황자의 요구로 전강훈에게 정보를 흘려야 하거나, 다른 일 때문에 반드시 그와 얘기를 나눠야 할 때면 송연정이 항상 자발적으로 나서서 그녀 대신 전강훈에게 이야기를 전했었다.
당시 심화영은 송연정이 친언니처럼 자신에게 굉장히 잘해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송연정이 그날 밤 몰래 전강훈에게 약을 가져다주었다는 걸 알게 됐을 때도 사실은 약을 가져다주려고 한 게 아니라 그녀 대신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는 송연정의 허술한 변명을 믿었다.
명양왕부에서 앞으로 심씨 가문이 경성에서 지내지 못하게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을 때 심화영은 살짝 두려웠다. 그때 송연정은 그녀를 위로하는 척했고 심화영은 그녀의 위로에 감동을 받았다.
그러다 죽기 직전, 자신을 사정없이 때리는 송연정의 모습과 그녀의 눈동자에서 불타오르는 질투를 보았을 때야 심화영은 송연정이 아주 오래전부터 전강훈을 좋아해서 그에게 접근하고 싶어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흥!’
심화영은 시선을 거두면서 싸늘한 눈빛을 해 보였다.
이때 앞에서 갑자기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청색 옷에 장검을 안고 있는 준수한 사내 한 명이 나왔다.
“백세민, 전하는 어떻게 되었느냐? 우리가 들어가도 되겠느냐?”
심철호는 헐레벌떡 다가가서 황급히 물었다.
심철호는 후작이자 예부 상서였고, 왕부만큼 신분이 고귀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개국공신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심화영 때문에 일개 호위무사를 향해 굽신거리고 있었다.
백세민은 화가 난 얼굴이었다. 예전의 친근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오로지 억눌린 증오만이 보였다.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리, 나리는 예부 상서이면서 따님을 염치없는 사람으로 기르셨군요. 나리의 따님 때문에 전하께서는 변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문 앞에서 소란까지 피우시는 겁니까? 정말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는군요!”
“전부 내 잘못이다. 우리 아버지와는 상관없다.”
심화영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면서 심철호의 앞에 섰다. 그녀는 시선을 들어 백세민을 바라보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게도 미안하고 전하께도 미안하다. 날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거라.”
백세민은 살짝 놀라며 심화영을 바라보았다.
그는 심화영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눈앞의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이 연약해 보이면서도 기개가 넘치고, 눈빛에 미안함을 가득 담고 있는 여인이 예전의 그 심화영이 맞는지 확인하는 듯했다.
그가 조금 전 말을 거칠게 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심화영이 전강훈에게 악담을 퍼붓고 전강훈과 그가 하루살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들을 싫어했던 걸 떠올리면 그렇게 심한 것도 아니었다.
예전의 심화영은 수치를 모르는 혐오스러운 여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백세민은 복잡한 눈빛으로 심화영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질문을 했다.
“일주일 전 연남산에서 저희 전하께 무슨 말을 하려고 했습니까? 무엇 때문에 서신을 써서 전하를 불러낸 것입니까?”
“...”
심화영은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백세민은 차갑게 웃었다.
“혹시 누군가와 미리 상의해서 일부러 전하를 그곳으로 부른 것은 아닙니까?”
전강훈은 젊은 나이에 장군이 되어 천하를 휩쓴 사내였고 그의 곁에 있는 호위무사도 당연히 멍청하지 않았다.
백세민과 전강훈은 심화영의 의도를 이미 진작에 간파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생에 심화영은 자신이 완벽하게 일을 처리했다고 착각했고, 전강훈이 줄곧 그녀를 배려하고 포용해 준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무엇 때문에 전강훈은 심화영을 포기하지 않았을까?
전생에 송연정은 전강훈이 그녀에게 집착하는 이유가 체면 때문이라고 했다. 겨우 후작 댁의 서녀에게 퇴짜를 맞고 싶지 않아서이기 때문에 두 사람의 사이가 좋아지면 틀림없이 그녀를 버린 뒤 죽여버릴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절대 그와 혼인하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위태로운 상황을 직면하고 나서야 심화영은 뒤늦게 깨달았다. 전강훈의 성정과 신분이라면 굳이 그런 방식으로 체면을 되찾을 필요도 없이 그냥 그녀를 죽여버리면 된다는 것을 말이다.
백세민을 보게 되자 그러한 의문이 더욱 깊어졌다.
그와 동시에 눈앞의 백세민을 향한 미안함이 밀려왔다.
전생에 심화영은 멍청한 짓을 하며 수많은 이들에게 밉보였고, 전강훈은 그녀의 안위가 걱정되어 백세민에게 몰래 그녀를 지켜주라고 했다.
삼황자는 백세민이 그들의 음모를 눈치챌까 봐 걱정되어 자객을 보냈다. 그는 심화영에게 백세민을 인적이 드문 골목길로 유인한 뒤 그의 신뢰를 이용하여 그를 제거하라고 했다.
백세민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자객이 심화영에게 달려들었을 때 백세민은 심화영이 정말로 위험에 처했다고 생각해 그녀를 구하려고 했다.
백세민이 몸을 등진 채로 그녀 대신 자객의 공격을 막아낼 때, 심화영은 비수를 꺼내 뒤에서 백세민의 심장께를 힘껏 질렀다.
백세민이 고통스러운 얼굴로 바닥에 쓰러졌을 때 심화영은 두려움과 괴로움이 치밀어 올라 온몸을 떨었다. 그때 삼황자는 뒤에서 그녀를 안으며 말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떠냐? 전강훈이 이자의 시체를 발견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시체를 보면 전강훈은 네가 이자를 죽였다는 것을 알게 되겠지. 그러면 전강훈은 앞으로 더는 너를 믿지 않을 것이다. 화영아, 우리 미래를 위해서라도 절대 마음 약해지면 아니 된다.”
심화영이 정신을 차렸을 때 삼황자는 그녀의 손을 잡고 시체를 녹이는 약물이 담긴 병을 열어 백세민의 몸 위로 액체를 들이부었다.
심화영은 지금까지도 자신을 바라보던 백세민의 눈빛을 잊을 수 없었다.
그의 눈빛에서 보이던 경악과 충격과 원망은 그녀의 영혼을 꿰뚫을 것만 같았다.
백세민을 다시 만나게 되자 심화영은 감히 그의 눈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심화영은 힘겹게 침을 삼킨 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엔 정말로 중요한 얘기를 할 생각이었다. 그건 나와 전하 사이의 사적인 일이니 내가 추후에 직접 전하께 얘기할 것이다.”
백세민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오늘 밤 심화영은 예전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녀는 예전처럼 시끄럽게 호들갑을 떨거나 켕기는 게 있는 사람처럼 피하려고 들지 않고 최대한 그를 똑바로 바라보려고 했다. 눈빛에 후회와 미안함이 가득 담겨 있는데도 시선을 피하지 않는 것이 꿋꿋한 성정이 서서히 형성되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심화영의 눈동자에서 전강훈에게서만 보이던 위엄과 냉정함이 어렴풋이 보여 굴복하고 싶었다.
백세민은 순간 그녀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심화영은 시간을 낭비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괴롭게 하는 미안함을 억누르면서 직설적으로 말했다.
“이미 엎어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걸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모셔 온 이분은 그동안 은거하며 살았던 명의다. 실력이 안에 있는 어의들보다 몇천 배는 더 뛰어날 것이라고 장담한다. 이곳에서 내게 잘못을 따져 묻기보다 차라리 우리를 안에 들여보내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전하께서 깨어나신 뒤 다시 문책해도 늦지 않으니 말이다.”
“만약 이자도 전하를 치료할 수 없다면요?”
백세민은 미간을 찡그리며 설현수를 바라보았다.
그도 당연히 전강훈이 어서 깨어나기를 바랐다.
그러나 감언이설에 능숙한 눈앞의 여인과 너저분한 차림새의 걸인 같은 노인을 과연 믿어도 될까?
백세민은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심화영이 말했다.
“만약 이분도 치료하지 못한다면 이분은 그냥 돌려보내거라. 대신 나는 죽여도 좋다.”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나 봅니다.”
백세민은 참지 못하고 차갑게 웃었지만 사실 그녀의 말에 조금 흔들렸다.
예전에 전강훈은 배은망덕한 심화영을 늘 감싸고 돌았는데 심화영은 오직 삼황자만 좋아했고, 그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만약 그녀가 멀쩡히 그의 앞에 서 있지 않았더라면, 얼굴이 한결같이 아름답지 않았더라면 백세민은 그녀가 심화영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을 것이다.
백세민은 생각을 정리한 뒤 심화영을 바라보았다.
“두 분을 들여보내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저분이 전하를 구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이 서지 않...”
슉!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은빛 두 줄기가 스쳐 지나갔다.
다음 순간, 백세민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서 움직일 수 없었다. 대신 두 귀와 눈꺼풀만이 끊임없이 떨렸다.
백세민은 대경실색하며 황급히 말했다.
“얼른 이걸 푸십시오! 들어가게 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마마께서 어떤 성정인지는 잘 알고 계시겠지요. 마마의 분노를 감당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두 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백세민은 바로 동의했다. 두려웠기 때문이 아니라 설현수의 실력에서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협박했다.
“만약 전하께서 깨어나시지 못한다면 이곳에서 전하와 함께 묻힐 각오를 해야 할 것입니다!”
설현수는 백세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은침을 거두고 안으로 들어갔다.
심화영과 심철호는 서둘러 설현수의 뒤를 따랐다.
백세민은 의문을 가득 품은 채로 심화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심화영이 무엇 때문에 이러는 것인지 알지 못했고, 무엇 때문에 왕부에서 모든 명의를 다 불러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설현수를 빠뜨린 것인지 알지 못했다.
마당 안의 길을 거닐며 심철호는 신신당부했다.
“마마께서는 황실의 일원이고 폐하의 유일한 여동생이다. 까탈스러운 성정에 고집이 세고 오만한 면이 있어 상대하기 상당히 힘들 것이다. 잠시 뒤 너는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나와 네 둘째 오라버니 뒤에 숨어 있거라.”
말하는 사이 앞쪽에 있는 처소 안에서 사람 두 명이 나왔다.
한 명은 종이우산을 든 계집종이었고 다른 한 명은 우아해 보이지만 표정이 굉장히 싸늘한 장공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