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
“그동안 대감을 우롱해 온 짓, 이젠 통하지 않을 줄 알아라!”
고윤희가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유씨 부인을 노려보며 한 마디 내뱉었다.
배 속의 아이만 아니었더라면 지금 당장 그 뺨을 갈겼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속이 뒤집혀도 결국 손은 들 수 없었다.
유씨 부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이미 얼굴을 들이민 마당에 더는 가릴 것도 없이 버젓이 맞받았다.
“그럼 대감께서 돌아오신 뒤에 다시 얘기하도록 하죠.”
그리고 그녀는 다시금 심화영을 깊게 바라보았다.
해가 뉘엿뉘엿 저문 저녁 무렵, 이제 갓 열다섯을 넘긴 그 작은 소녀는 처마 밑에 서 있었다. 옅은 별빛이 어깨에 내려앉아 있었고 그녀의 커다란 눈은 까마득히 깊었다. 마치 오래된 고요한 우물처럼, 보고 있자면 등골이 서늘해졌다.
유씨 부인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연남산에서 다쳐 깨어난 뒤부터 이 아이는 마치 얼음처럼 냉정하고 비정해졌는지.
예전의 심화영은 이러지 않았다.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아 있다. 자신이 심철호를 졸라 송연정을 후작 댁의 둘째 아씨 자리에 올리겠다며 목매 자살을 시도했던 날, 그 아이는 겁에 질려 엉엉 울며 자기 다리에 매달려 애원했다.
“어머니, 제발 죽지 마세요... 어머니만 살아계시면 제가 아버지를 설득할게요. 마님께도 빌게요! 꼭, 꼭 연정 언니를 후작 댁의 둘째 아가씨로 만들어 드릴게요! 저한텐... 친언니나 다름없어요!”
그러고는 울면서 뛰쳐나가 고윤희와 심철호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한겨울 찬 바람 부는 마당에서 어린 소녀는 그렇게 오래 무릎 꿇은 채 열이 올라 결국 앓아누웠고 보름이나 지나서야 겨우 회복되었다.
심지어 병중에서도, 잠결에 중얼거렸다.
“어머니... 제발 죽지 마세요...”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그 아이가 ‘어머니’라 부르는 이는 이제 고윤희다.
조금 전, 유씨 부인이 돌기둥에 머리를 들이받겠다며 날뛰었을 때, 그 겁 많던 고윤희조차 놀라 막으려 달려들었건만 정작 그녀의 ‘딸’이라는 심화영은 싸늘하게 말했다.
“막지 마세요. 그냥 부딪히게 내버려두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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