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심화영은 그녀를 바라본 뒤 저항하지 않고 사풍원 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장공주는 그러고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심철호와 사풍원 안에서 나오는 심태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둘도 마찬가지다!”
심철호는 괴로워도 얘기하지 못하고 그저 무릎을 꿇어야 했다.
심태진은 두말없이 심화영의 곁에 무릎을 꿇었다.
장공주는 눈앞의 세 명을 노려보았다. 자꾸만 분노가 치밀어올라서 그들을 죽여 피를 보지 않으면 도저히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결국 옥주가 그녀를 설득했다.
“마마, 나리께서는 이미 쓰러지셨사옵니다. 만약 마마께서도 쓰러지시고 전하께서 깨어나시지 못한다면... 왕부는 어떡하옵니까? 이미 많이 늦었사옵니다. 잠이 오지 않으신다면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시는 게 어떻사옵니까? 오늘은 바람이 찹니다. 혹시라도 고뿔에 걸리면 큰일입니다.”
장공주는 온몸을 덜덜 떨면서 독기 어린 눈빛으로 세 사람을 바라보다가 근처에 있던 호위무사들에게 얘기했다.
“이자들을 잘 감시하거라. 이들 중 아무도 일어나면 아니 된다!”
심철호는 그 말을 듣더니 서둘러 앞으로 나서면서 애원했다.
“마마, 저와 제 아들을 벌하시는 건 괜찮지만 화영이는 다쳐서 며칠 동안 깨어나지 못하다가 이제야 막 깨어났사옵니다. 게다가 조금 전에 백세민의 칼에 찔려서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는데... 계속 무릎을 꿇고 있는다면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르옵니다. 그러니 부디 화영이가 잠깐 쉴 수 있도록 아량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장공주는 꿈쩍하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내 아들은 아직 깨어나지 못했소. 그런데 저 아이가 무슨 자격으로 쉰단 말이오?”
심태진은 그 말을 듣더니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제가 화영이 대신 무릎을 꿇고 있겠사옵니다. 마마께서 화영이를 무릎 꿇리고 싶으신 것만큼 제가 무릎을 꿇고 있겠사옵니다.”
장공주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심화영은 가슴이 아렸지만 장공주가 또 화를 낼 것 같아서 말했다.
“제가 저지른 잘못이니 제가 책임지는 게 맞사옵니다. 그러니 죽을 때까지 무릎을 꿇고 있어도 상관없사옵니다... 마마께서는 이만 돌아가시지요.”
“그러면 죽을 때까지 무릎을 꿇고 있거라!”
장공주는 이를 악물면서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심화영을 노려보았다.
옥주는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마마, 그래도 전하께서 마음에 두신 분인데 이렇게 무릎을 꿇리셨다가 전하께서 깨어나셔서 이 장면을 보신다면 또 마마와 사이가 틀어질지도 모르옵니다...”
장공주는 그 말을 듣고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원래도 웃음기가 없는 얼굴인데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그녀는 화를 내면서 말했다.
“우리 사이가 틀어진 게 하루이틀이더냐!”
옥주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녀를 부축했다.
장공주는 열불이 나서 가슴팍이 심하게 오르락내리락했다. 그녀는 몸을 돌리더니 옥주의 부축을 받으며 처소로 돌아갔다. 비록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뒷모습만큼은 매우 꼿꼿해 보였다.
심화영은 고개를 들어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밤, 난새가 수 놓여 있는 검은색의 망토는 음울한 기운과 함께 사람을 질식시킬 듯한 압박감을 내뿜고 있었다. 마치 그녀를 짓누르고 있는 것이 원씨 황족인 것처럼 느껴졌다.
심화영은 설현수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원씨 황족을 제거할 것이다.”
장공주 원해선은 전강훈의 어머니였다.
앞으로 그녀와 어떻게 지내야 할까?
이미 상황이 좋지 않은데 폭우가 쏟아지면서 비바람이 휘몰아쳤다. 그 탓에 가녀린 심화영의 몸이 빗줄기 속에서 위태롭게 흔들렸고 심화영은 몸에 오한이 들면서 힘들었다.
심태진은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만져보더니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열이 이렇게 심한데 왜 이곳까지 찾아와서 이 고생을 하는 것이냐?”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황급히 품속에서 환약을 꺼내 그녀에게 먹였다.
심화영은 약을 먹은 뒤 고개를 들어 심태진을 바라보았다.
심태진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오라버니.”
심화영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녀는 애써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오라버니, 저는 목숨이 질긴 사람이라 곧 괜찮아질 것입니다. 설현수 어르신께서 들어가셨으니 전하께서도 곧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너도 참!”
심태진은 심화영의 모습에 차마 그녀를 나무랄 수가 없었다. 그는 심화영이 정신을 잃고 쓰러질까 봐 어깨를 빌려주었다.
“일단 내게 기대고 있거라... 그런데 저 어르신과는 어떻게 알게 된 것이냐?”
“연남산에서 약초를 채집하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심화영은 자세히 얘기하지 않았다. 대신 진실만을 말했다.
“의술이 아주 뛰어나신 분입니다. 하지만 웬만해서는 직접 나서지 않습니다.”
“그만 얘기하고 조금 쉬거라.”
심태진은 안타까운 마음에 팔을 뻗어 심화영의 어깨를 감싸 그녀가 조금 더 편히 기댈 수 있게 도와주었다.
심화영은 그의 품에 안긴 채로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심태진의 등은 여전히 꼿꼿했고 그녀를 위해 비바람을 막아줄 수 있었다. 그녀 때문에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던 전생의 모습과는 달랐다. 그러다 갑자기 목구멍이 간질거려서 심화영은 심하게 기침했다.
콜록콜록, 콜록콜록.
기침이 멈출 줄을 몰랐다.
심태진은 손을 뻗어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걸 어찌하느냐? 이곳에서는 편히 쉴 수도, 약을 제대로 먹을 수도 없구나.”
“오라버니, 전 괜찮습니다.”
심화영은 그를 위로했지만 더는 버티기 힘들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가슴이 답답하던 것이 점점 심해졌다.
이때 백세민이 안에서 걸어 나와 그들에게 종이우산을 던져주며 언짢은 듯이 말했다.
“전하가 아니었다면 그냥 죽게 놔뒀을 것입니다.”
심화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손을 뻗어 종이우산을 받으며 고맙다고 인사하려는데 입을 벌리자마자 목구멍에서부터 피비린내가 나면서 피를 왈칵 토하게 되었다.
눈앞이 빨갛게 물들여지면서 현기증이 점점 심해졌다. 백세민을 바라보니 그저 검게만 보였다. 얼굴이 어디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심태진은 대경실색하며 황급히 말했다.
“전하께서 화영이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알고 있지 않느냐? 화영이가 이렇게 죽어가는 것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을 것이냐?”
백세민은 몇 마디 대꾸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심화영의 위태로운 모습을 본 그는 전강훈이 그녀를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를 떠올리고 어쩔 수 없이 어두워진 얼굴로 안으로 들어가서 장공주를 찾았다.
“마마, 화영 낭자께서 갑자기 피를 토하셨사옵니다. 더는 버티기 힘들어 보이는데 안으로 불러들여서 어의에게 몸 상태를 살피게 하는 것이 어떻사옵니까?”
백세민은 감히 그녀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장공주는 전강훈을 좋아하지 않았고 그의 호위무사인 백세민도 싫어해서 걸핏하면 꼬투리를 잡아 그에게 벌을 주었다. 만약 백세민이 전강훈과 함께 자라지 않았더라면, 전강훈이 심화영을 얼마나 아끼는지 몰랐다면 절대 장공주에게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괜히 그에게 불똥이 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장공주는 잠시 눈을 감고 쉴 생각이었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매섭게 말했다.
“그러면 그냥 죽게 놔두거라! 훈이가 죽는다면 그 아이는 목숨을 바쳐도 그 값어치를 치를 수 없다! 그 아이가 아니었다면 전장을 휩쓸어 서진의 병사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훈이가, 군권을 손에 쥔 훈이가 이 꼴이 됐을 리가 없다. 이 모든 것은 전부 그 요사스러운 계집 때문이다!”
장공주는 분풀이할 곳이 없어 자신이 덮고 있던 이불을 꽉 쥐면서 이를 악물었다.
“그 아이만 아니었다면 훈이도 어머니인 나를 이렇게 원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강훈이 태어났을 때 그녀는 사실 전강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의 배 속에서 태어난 아이인 데다가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니 가끔 모성애가 샘솟기도 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전강훈을 용맹하고 현명한 무적의 영웅이라고 칭찬할 때마다 그녀는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제는 그녀 자신도 자신과 아들이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심화영이 죽도록 미울 뿐이었다.
백세민도 어떻게 장공주를 설득해야 할지 몰랐다.
바로 이때 옥주가 부랴부랴 안으로 들어와서 화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마마, 전하께서 깨어나셨사옵니다!”
“훈이가 깨어났다고?”
장공주는 분노가 눈 녹듯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그녀는 서둘러 신발을 신었다.
옥주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다소 난처한 표정으로 작게 말했다.
“그런데 전하께서 깨어나시자마자 심화영 아가씨에 관해 물으셨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