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조하린이 그를 똑바로 쳐다봤다.
“새벽에 나간 거 아니었어요? 아저씨, 저 성묘 간다고 말 안 했는데,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요?”
신도현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어제 속이 안 좋아서 네가 화장실에 있길래 혼자 병원에 다녀왔어. 오늘 아침에 돌아오니 이모님이 너랑 같이 오고 싶다고 하시길래 따라온 거야.”
거의 완벽에 가까운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묘지에 도착해 나란히 붙어 있는 두 개의 묘비를 보자 조하린의 속에서 시큰한 슬픔이 밀려들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사랑해주었던 두 사람마저 떠나버린 것이다.
그녀의 눈에 고인 물기를 본 강지유가 다가와 부드럽게 어깨를 감쌌다.
“하린아, 부모님은 가셨지만 네 곁엔 도현이가 있잖아. 평생 널 챙겨줄 거고 곧 아기도 태어날 테니 너만의 새로운 가정이 생길 거야.”
그녀는 마치 신도현을 대신해 둘의 영원한 결혼을 확신하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신도현도 빠르게 입장을 밝혔다.
“맞아. 너랑 아이, 내가 잘 책임질게. 너무 슬퍼하지 마.”
그의 말을 듣는 조하린은 그저 비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그가 평생을 책임지겠다는 약속은 사랑도, 책임감도 아닌 다른 여자와, 드러낼 수 없는 그의 시커먼 속내를 위한 것일 뿐이었다.
조하린은 모든 감정을 삼키고 사진 속 부모님을 바라보았다.
“네, 저에겐 분명 새로운 가정이 생길 거예요.”
다만, 그 가정은 신도현과 그 어떤 관련도 없을 터였다.
성묘가 끝나자 하늘에서 가랑비가 흩날렸다.
뒷좌석에 강지유와 조하린이 앉았고 신도현이 운전대를 잡았다.
차 안의 무거운 분위기가 싫었던 강지유가 먼저 말을 꺼냈다.
“명동 쪽에 새로 생긴 레스토랑이 있다던데, 점심 먹으러 가볼까?”
신도현은 즉시 방향을 틀었다.
“사장님이 이탈리아 사람이라 음식이 아주 정통이라고 하던데요.”
“그래요? 제가 파리에서 먹었던 피자는...”
두 사람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서양 요리에서 북유럽의 풍경으로, 최근의 경험들로 화제는 끊임없이 옮겨갔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 다른 한쪽이 바로 받아치며 분위기가 식을 틈을 주지 않았다.
마치 오래 사귄 연인처럼 완벽한 호흡이었다.
그 생각이 스치자 조하린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실제로 그들은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 같이 갔던 장소, 서로를 위해 했던 일, 서로에 대한 익숙함...
이 모든 것이 가짜인 그녀가 감히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레스토랑에 도착하자 신도현은 습관적으로 메뉴판을 강지유에게 건넸다.
그녀는 메뉴판을 받았다가 뭔가를 떠올리곤 조하린에게 넘겼다.
“임산부는 가릴 게 많을 테니, 하린이 네가 골라.”
조하린이 대충 몇 가지를 주문하자, 음식이 나온 뒤 신도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다 너 먹으면 안 되는 음식이잖아. 의사 선생님 말씀 잊었어?”
강지유도 그녀의 배를 돌아보며 의외라는 듯 말했다.
“하린아, 너 임신 4개월 아니었어? 배가 그 주수 같지가 않네?”
신도현이 벌떡 일어나 다가오려다 음식을 나르던 직원과 부딪혔다.
카트가 뒤집히며 모든 음식이 쏟아졌다.
그는 반사적으로 강지유를 감싸 안으며 쏟아지는 음식들을 대신 막아섰다.
하지만 조하린에겐 그런 행운이 없었다.
막 나온 뜨거운 국이 전부 그녀의 다리에 쏟아졌고 순식간에 시뻘건 물집이 피어올랐다.
그녀는 고통에 얼굴을 잔뜩 구긴 채 식은땀을 흘렸다.
뜨거운 김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가운데, 테이블보를 꽉 움켜쥔 그녀의 눈에 보인 것은 강지유를 안고 황급히 사라지는 신도현의 뒷모습이었다.
그 순간, 조하린의 심장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현장은 아수라장이 됐고 직원이 황급히 그녀를 안전한 곳으로 부축했다.
레스토랑을 나서자마자 언쟁을 벌이는 강지유와 신도현이 보였다.
“나 괜찮다고 했잖아, 지금 당장 하린이한테 돌아가!”
“손이 이렇게 빨개졌는데 뭘 괜찮아! 병원부터 갔다가 다시 와서 쟤 데려가면 되잖아. 지유야, 왜 이렇게 고집을 부려. 너도 아까 내가 데일까 봐 엄청 걱정했잖아. 사실 네 마음속에도 계속 내가 있었던 거 맞지?”
“있으면 뭐하고 없으면 뭐해! 신도현, 우린 끝났어. 넌 하린이랑 결혼했고 걔 뱃속엔 네 아이까지 있단 말이야!”
강지유가 고통스럽게 내지르는 절규에 신도현의 눈가가 붉어졌다.
“알잖아. 내 마음속에서 저 여자는 절대 너보다 중요할 수 없다는 거!”
강지유가 몇 초간 멈칫했다. 뭔가 말하려던 그녀가 고개를 드는 순간, 입구에 서 있는 조하린을 발견했다. 그녀의 동공이 급격히 수축하며 전례 없는 당혹감이 목소리에 실렸다.
“하린아, 너 왜 나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