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병실 안.
송해인은 조용히 침대에 앉아 있었고 몇 명의 의사와 간호사들이 그녀를 둘러싸고 검사를 하고 있었다.
송해인은 스스로 침대 옆 호출 버튼을 눌러 간호사 스테이션에 자신이 깨어났다는 것을 알린 상태였다.
5년 동안 식물인간으로 지냈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제 송해인은 깨어났다!
결혼 생활? 반드시 이혼이 먼저다.
청춘은 개한테 줘버려도 좋다. 하지만 그녀의 재산, 커리어... 그리고 가장 중요한, 두 아이까지 송해인은 모조리 되찾아올 것이다. 절대 저 개 같은 남자에게 쉽게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송해인의 최종 목표는 한은찬이 양육권을 잃고 빈털터리로 집을 나가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5년이라는 공백이 있었기에 이혼을 위해서는 아직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시선이 문 쪽을 스친 순간 송해인은 한은찬의 옷자락이 보이는 것을 확인했다.
‘지금이다.’
“도 선생님, 내 눈 어때요?”
송해인은 당황하고 혼란스러운 듯 물었다.
“왜 깨어났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거죠?”
문을 열고 들어온 한은찬은 이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리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침대로 다가왔다.
“해인아.”
한은찬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송해인을 부르자 송해인은 속에서 역겨움이 치밀었다.
“은찬아, 드디어 왔구나.”
역겨움을 참으며 눈이 멀어버린 사람처럼 초점 없이 허우적거리다가 한은찬의 품에 안겼다.
한은찬의 몸에서 여전히 여자의 향수 냄새가 남아 있는 것을 맡을 수 있었다.
“은찬아, 나 무서워. 네가 안 보여...”
한은찬은 송해인을 부드럽게 안으며 위로했다.
“무서워하지 마. 내가 있잖아. 얼마가 들든, 꼭 네 눈 치료할 거야!”
도영준이 말했다.
“한은찬 씨,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사모님 눈, 큰 문제는 없어요. 아마 오랫동안 혼수상태였기 때문에 시각 신경이 아직 회복되지 않은 것 같아요...”
한은찬이 물었다.
“그럼 완전히 회복되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도영준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확신하지 못했다.
“회복 시간은 환자의 상태에 따라 다릅니다. 짧게는 두세 달, 길게는... 장담할 수 없어요.”
연약하고 무력한 모습으로 한은찬의 품에 안긴 송해인은 눈빛 깊은 곳에 끝없는 냉기가 솟아올랐다.
송해인은 한은찬의 긴장이 풀리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는 장님, 이 정도면 한은찬이 경계를 풀기에 충분했다.
송해인은 이 틈을 타서 요구를 했다.
“은찬아, 나 더 이상 병원에 있고 싶지 않아. 집에 가고 싶어. 눈이 회복하면 제일 먼저 너와 우리 아이들을 보고 싶어.”
도영준도 한마디 조언했다.
“한은찬 씨, 사모님이 익숙한 환경으로 돌아가는 게 눈 회복에 더 도움이 될 거예요.”
2초간 고민한 한은찬은 결국 송해인을 데리고 퇴원해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송해인은 다리에 힘이 없어 걸을 수 없었기에 한은찬은 병원의 휠체어를 빌려 그녀를 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방금 임지영을 안았던 장면이 떠오른 송해인은 문득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은찬은 다른 여자는 안을 수 있어도 송해인은 안고 싶지 않은 것이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거울이 하나 있었다. 송해인은 선글라스 너머로 뒤에 있는 한은찬을 바라보았다.
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잘생긴 한은찬은 성숙한 남자의 매력까지 물씬 풍겼다.
하지만 그와 반면 너무 마른 송해인은 마치 기력이 다 빨린 것처럼 보였다.
이런 관계 속에서 송해인은 정말로 한은찬에게 모든 기운을 다 빼앗긴 것이다.
한편, 한은찬이 송해인을 데리고 떠난 후 도영준은 어딘가로 몰래 전화를 걸었다.
“배도현 씨, 사모님... 아니 송해인 씨...”
실수로 ‘사모님’이라는 단어를 언급한 도영준은 당황해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얼른 말을 고친 뒤 억지로 말을 이어갔다.
“드디어 깨어났어요...”
아래층.
송해인은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임지영과 두 아이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미리 떠난 모양이었다.
한은찬은 송해인의 휠체어를 조수석 옆까지 민 뒤 차 문을 열었다. 문을 연 순간 송해인은 시트 위에 샤넬 립스틱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은찬은 송해인을 한 번 쳐다본 뒤 조용히 립스틱을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송해인을 조수석에 태웠다.
“은찬아.”
송해인이 물었다.
“내가 식물인간이 된 5년 동안, 조수석에 다른 여자가 탄 적 있었어?”
“당연히 없지.”
단호하게 부인한 한은찬은 잠시 멈칫한 후 반쯤 농담조로 말했다.
“북성 전체가 다 알다시피 내 아내 송해인은 사납기로 유명해. 소녀가 총을 들고 납치범 속으로 뛰어들 정도로.”
‘사납다고?’
하긴, 송해인과 한은찬이 결혼한 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은찬이 납치를 당한 적이 있었다. 경찰 쪽 수사가 느린 탓에 미칠 듯이 걱정하던 송해인은 모든 인맥을 동원해 한은찬의 행방을 추적했다. 그러다가 끝내 한은찬의 위치를 찾아냈다.
송해인은 돈 가방과 총 한 자루를 준비한 뒤 목숨을 걸고 한은찬을 구하러 갔다.
한은찬은 그때 맹세했다. 절대 송해인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자 차가 횡단보도 뒤에 멈춰 섰다.
한은찬이 문득 송해인을 바라보았다.
“해인아, 식물인간이 된 5년 동안, 어떤 기분이었어?”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송해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잡으려는 한은찬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냥 아주 긴 꿈을 꾼 것 같았어. 꿈속은 캄캄했고 소리도 없고 빛도 없었어... 너무 무서웠어.”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들은 한은찬은 긴장이 풀린 얼굴로 송해인의 손등을 토닥였다.
“다 끝났어, 해인아. 우리 집에 가자.”
송해인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래, 다 끝났어.”
‘한은찬, 우리 사이도 끝났어. 이제, 청산할 시간이야.’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자 한은찬이 힘껏 액셀을 밟았다. 차는 이내 앞으로 미끄러지듯 달렸다.
맞은편에서 검은색 마이바흐가 질주해 지나갈 때 선글라스를 쓴 송해인의 얼굴이 마이바흐 뒷좌석의 어두운 창문에 잠깐 비쳤다.
차 안, 조각처럼 뚜렷한 이목구비의 남자 얼굴은 어둠 속에 가려져 있었다. 그는 온몸으로 싸늘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그러나 송해인의 얼굴이 그 남자의 시야에 들어온 순간 남자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는 창문을 내리고 밖을 바라보았다.
“대표님, 무슨 일 있으신가요?”
조수석에 앉아 있던 비서 함영민이 뒤를 돌아 물었다.
그는 여태껏 자기 상사가 이토록 흥분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배도현은 그 벤츠가 점점 멀어져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시선을 거두었다.
멀지 않은 곳, 스카이 그룹 빌딩의 간판이 밤하늘 아래 웅장하게 서 있었다.
생각에 잠긴 것처럼 눈을 가늘게 뜬 배도현은 무언가 떠오른 듯 날카롭고 아름다운 얇은 입술의 입꼬리 한쪽을 살짝 올렸다.
“송해인.”
배도현은 낮고 차갑지만 비단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 세 글자를 읊조렸다. 그 속에는 끝없는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배도현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