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수술 후의 날들은 길고 고통스러웠다.
강나연은 병상에 홀로 누워 링거가 한 방울씩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며 상처에서 전해지는 둔한 통증을 견뎠다.
매번 약을 바꾸는 것은 고문과 같았다.
간호사도 강나연을 배려해 최대한 부드럽게 움직여 줬지만 그녀의 눈 속에 드러나는 연민은 육체적인 상처보다 더 힘들게 느껴졌다.
“조금만 참으세요, 금방 끝나요.”
간호사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드레싱을 마치고 나간 간호사는 병실 문 너머로 동료들과 속삭였다.
“정말 불쌍해... 저렇게 심하게 다쳤는데도 보호자가 한 번도 안 찾아왔잖아. 수술 동의서도 환자가 겨우 버티면서 사인한 거래...”
“그러게 말이야, 옆방 VIP실 윤서아 씨는 그냥 피부만 조금 까진 정도인데도 성 대표가 계속 옆에서 지키고 있대. 그 여자 간병 하겠다고 수천억짜리 대형 프로젝트까지 몇 개나 미뤄뒀다고 하더라...”
“다 같은 사람인데 타고난 운명 자체가 다르네.”
이런 말들은 작은 바늘이 되어 강나연의 마음에 촘촘하게 박혔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그런 말들에도 무감각해져 있었다. 강나연은 그저 눈을 감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 채 아무것도 안 들리는 척했다.
퇴원하는 날의 하늘은 한껏 흐려 있었다.
그녀는 수속을 마치고 병원 문을 나섰다.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친구 몇 명이 차를 몰고 와 기다리고 있었다.
“나연아! 이쪽이야!”
친구들의 익숙한 얼굴을 보자 강나연의 얼어붙었던 마음에도 드디어 따뜻한 기운이 감돌았다.
저녁에 그들은 강나연이 자주 가던 술집으로 갔다. 그녀가 드디어 고통의 바다에서 벗어나 자유를 되찾은 것을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잘 헤어졌어! 성도현 그 자식은 너랑 살 자격도 없어!”
“맞아! 우리 나연이는 얼굴이면 얼굴, 몸매면 몸매, 집안 배경이면 집안 배경까지 다 갖춘 여자잖아. 성도현 그 인간 아니어도 너한테 장가가겠다는 남자들이 여기서부터 저 바다 건너까지 줄 설 걸!”
“맞아! 내일 이 오빠가 너한테 꽃미남들 소개해 줄게. 성도현 그 더럽게 싹수없는 얼굴보다 백 배는 나을걸!”
친구들은 실없는 농담을 던지며 강나연을 웃게 하려고 노력했다.
강나연은 잔에 든 술을 마시며 오랜만에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왜 고작 날 사랑하지 않는 남자 때문에 혼자 힘들어해야 해?’
그녀는 잠시 화장실에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돌아와 보자 카운터 좌석은 텅 비어 있었고 친구들도 모두 사라져 있었다.
“저기요, 저 테이블에 있던 친구들 다 어디 갔어요?”
강나연은 지나가는 종업원을 붙잡고 물었다.
종업원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복도 끝에 있는 호화로운 룸을 가리켰다.
“아까... 술에 취한 어떤 여자 손님이 남자 웨이터 좀 불러 달라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봐도 마음에 안 든다고 하셔서... 그러다가 손님 친구분들을 발견하자마자 사람 시켜서 룸으로 끌고 들어가 버렸어요... 안에 경호원들이 꽤 많아서 저희도 감히 막지 못했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강나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녀의 친구들 역시 이 바닥에서는 나름 명성이 자자하던 사람들이었으니 일반인들이라면 감히 쉽게 건드릴 수 없었다.
‘그런데도 얘네한테 손을 댄 거라면...’
불길한 예감이 순식간에 밀려왔다. 강나연은 재빨리 달려가 종업원이 얘기했던 룸의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룸 안에서는 윤서아가 술에 취해 강나연의 친구 손을 붙잡고 몸을 비비려 하고 있었다.
친구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지만 상대가 여자라는 점 때문에 애써 참고 있는 중이었다.
“윤서아! 당장 그 손 놓지 못해?”
강나연은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걸어가 윤서아에게서 친구를 떼어내려 했다.
바로 그때, 큰 소리와 함께 문이 힘껏 열렸다.
성도현이 차가운 얼굴로 뛰어 들어오더니, 윤서아의 손목을 꽉 잡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억눌린 분노가 담겨 있었다.
“서아야! 이런 곳에는 왜 온 거야?”
윤서아는 성도현의 손을 뿌리치더니 취해서 몽롱해진 눈으로 강나연의 친구들을 가리키며 제멋대로 말했다.
“나 호스트 부르러 왔어요! 안 보여요? 이 사람들이 꽤 괜찮아 보이잖아. 이 사람들이랑 놀고 싶어요!”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절대 안 돼!”
성도현의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손을 뻗어 윤서아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려 했다.
하지만 윤서아는 오히려 성도현을 휙 밀쳐내더니 억울하다는 듯 울기 시작했다.
“도현 씨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짓 해도 되잖아요! 왜 나는 안 돼요? 도현 씨는 다른 여자한테 웃어줄 수도 있고, 그 여자 고객이랑 사무실에서 몇 시간씩 같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왜 나는 나와서 호스트랑 같이 놀면 안 되는데요!”
옆에 있던 비서가 재빨리 앞으로 나서서 해명했다.
“윤서아 씨, 다 오해예요. 대표님은 아주 중요한 프로젝트를 논의하고 계셨던 겁니다. 절대 아무런...”
“상관없어요!”
윤서아는 아예 들을 생각도 않고 술주정을 부리며 다시 강나연의 친구 손을 잡으려 했다.
“어쨌든 다른 여자랑 다정하게 굴었으니까 나도 그래야겠어요.”
“이제 그만 좀 해!”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강나연은 친구들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당신들끼리 사랑싸움을 하든, 뭘 하든 당신들 일이겠지만 내 친구들까지 건드리면서 괴롭히지는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