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그 후로 며칠 동안 강나연은 성도현이 한 사람을 얼마나 극진히 아낄 수 있는지 똑똑히 목격했다.
하루는 윤서아가 해외에서 공수해 온 벚꽃 젤리가 먹고 싶다고 하자 성도현은 새벽에 바로 국제선 전용기를 빌려 외국으로 날아갔다.
윤서아가 밤이 어두워서 잠을 제대로 못 잔다고 하자 성도현은 손에 잡고 있던 모든 일을 제쳐두고 밤새 그녀를 품에 안아주며 달랬다.
그리고 윤서아가 한밤중에 별똥별이 보고 싶다며 한마디 하자 성도현은 개인 소유 헬기를 동원해 별이 가장 잘 보이는 산꼭대기까지 그녀를 데려갔다.
집 안의 하인들은 남몰래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성 대표님이 정말 서아 씨를 끔찍이도 아끼시는구나...”
“그러게, 대표님이 이렇게 행동하는 건 처음 봐.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아...”
“아무래도 이게 진짜 사랑이겠지. 예전 사모님은... 에휴...”
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던 강나연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지만 그저 묵묵히 자신의 작업실에 숨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그녀의 유일한 피난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강나연의 작업실을 구경하던 윤서아가 벽에 걸린 유화 한 점을 발견했다.
“이 그림 예쁘다. 이건 내 방에 걸어놓을래요.”
윤서아는 그 그림을 가리키며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강나연은 즉시 거절했다.
“안 돼. 이건 선생님께서 남겨주신 유작이에요.”
그러자 윤서아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에이, 그냥 나 주면 안 돼요? 진짜 마음에 든단 말이에요...”
“안 된다고 했잖아요.”
강나연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성도현이 아니에요. 애교 부린다고 다 타협해 주는 건 아니거든요. 이 그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한테 주지 않을 거예요.”
윤서아는 꼼짝도 하지 않는 강나연의 모습에 기분이 불쾌했다.
“그럼 돈 주고 살게요. 가격 제시해 봐요.”
“안 팔아요. 나가 줘요.”
강나연은 차가운 얼굴로 화실을 나서려 했다.
윤서아는 화가 나서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았다.
“네가 뭔데 안 줘!”
강나연은 반사적으로 윤서아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자 윤서아는 중심을 잃은 듯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그녀의 이마가 공교롭게도 이젤의 뾰족한 모서리에 부딪히더니 상처가 나며 피가 배어 나왔다.
“악! 아파!”
바로 그때, 화실 문이 밀려 열리더니 소란을 들은 성도현이 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우선 방 안의 상황부터 훑어보았다. 이마에 피를 흘리며 바닥에 앉아 우는 윤서아와 그 옆에 서 있는 강나연을 보는 순간, 성도현의 얼굴은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곧바로 윤서아에게 다가가 그녀를 부축해 주며 긴장한 듯 물었다.
“서아야, 무슨 일이야?”
윤서아는 울먹이며 눈물로 강나연을 가리키며 비난했다.
“도현 씨! 이 집에서는 모든 걸 다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했잖아요! 내가 저 그림이 마음에 든다고 했는데,주기 싫다고 밀치는 거 있죠? 내 머리 좀 봐요... 너무 아파요... 나 대신 복수 좀 해 줘요!”
“나는 밀지 않았어요. 그냥 혼자 중심 잃고 넘어진 건데...”
“입 닥쳐!”
성도현은 매섭게 강나연의 말을 끊었다. 그의 눈빛은 차갑고 섬뜩했다.
“강나연, 내가 이때까지 너한테 너무 관대했었네.”
그는 경호원들에게 명령했다.
“저 그림 가지고 와.”
“안 돼요!”
강나연은 그림을 보호하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얼마 못 가 달려온 경호원들에게 밀쳐졌다.
두 명의 경호원이 거친 손길로 그림을 빼앗으려 했지만 강나연은 필사적으로 액자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부탁이에요! 이건 안 돼요! 이건 선생님께서 남기신 유일한...”
“쫘악!”
한창 몸싸움을 벌이는 와중에 캔버스가 큰 소리를 내며 찢어지더니 한가운데에 큰 구멍이 생겼다.
강나연은 망가진 유작을 바라보며 넋 나간 사람처럼 바닥에 주저앉더니 공허한 눈빛으로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순간에 세상에 무너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윤서아도 덩달아 멍해지더니 이내 더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내 그림! 멀쩡했던 그림이... 망가졌어요...”
성도현은 울음을 터뜨리는 윤서아를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살살 달래주었다.
“자기야, 울지 마. 그냥 그림 하나잖아. 내가 내일 당장 경매장에 가서 이것보다 더 좋고 비싼 걸로 사줄게. 응?”
“싫어요! 난 그냥 이 그림이 좋단 말이에요! 똑같은 그림이어야 해요!”
윤서아는 억지를 부리며 실의에 빠진 듯한 강나연을 가리켰다.
“다 저 여자가 망가뜨린 거예요! 저 여자가 내 그림을 망가뜨렸으니까, 저 여자한테 물어내라고 해요! 등짝에 똑같은 그림이라도 그려오라고!”
강나연은 고개를 들고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윤서아를 바라보았다.
성도현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지만 윤서아의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마주하는 순간,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 네 마음대로 해.”
“성도현! 너 진짜 제정신 아니야!”
강나연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려 했지만 몇 걸음 가기도 전에 경호원들에게 단단히 제압당했다.
더욱 그녀를 공포로 밀어 넣은 것은 따로 있었다. 윤서아가 하인에세 가져오라고 한 붓은 가늘고 긴 은침이었고 물감은 선홍색의 고춧가루를 탄 물이었다.
“안 돼, 안 돼! 싫어! 성도현,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래!”
강나연은 절망적인 울음을 터뜨리며 발버둥 쳤다.
하지만 성도현은 그저 차가운 시선으로 강나연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경호원들에게 다시 명령했다.
“꽉 붙잡아. 서아한테 직접 그리게 해 줘.”
차가운 바늘 끝이 피부를 꿰뚫고 들어가더니 고춧가루 물의 작열감과 함께 강나연의 등 뒤로 상처가 한 줄씩 그어졌다!
극심한 고통에 강나연은 온몸을 경련하며 비명을 질렀다.
그런 반응에 윤서아는 오히려 신이 나서 그림을 그려대더니 마치 위대한 예술 작품이라도 완성하는 화가처럼 굴었다.
“봤죠? 내 물건 안 준 벌이에요!”
마지막 붓 터치까지 끝낸 윤서아는 강나연의 등에 흥건한 피로 흉측하게 그려진 그림을 보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성도현은 처음부터 끝까지 강나연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고 윤서아를 끌어안으며 애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좀 속이 시원해?”
“네! 속 시원해요!”
윤서아가 성도현의 품에 기대어 응석을 부렸다.
“그럼...”
성도현은 고개를 숙여 윤서아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더니 낮고 관능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이제 화 좀 풀어야 하지 않을까?”
그는 윤서아를 번쩍 안아 들더니 바닥에서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기절 직전까지 강나연을 철저히 무시한 채, 위층 침실로 향했다.
멀리서는 윤서아의 요염한 웃음소리와 강나연이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성도현의 관능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기야, 착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