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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송가빈은 15년이나 함께 했던 남자를 빤히 바라보더니 슬며시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박동진의 곁을 떠날 생각인 건 맞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었다. 이혼합의서에 사인을 받았다고는 하나 한 달이라는 숙려기간이 남아 있으니까. 송가빈은 이제야 박동진이라는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 것도 같았다. 그는 누구보다 오만한 남자였다. 그러니 아내에게는 아이를 가지자는 소리를 하면서 밖에서는 다른 여자를 끌어안고 사랑을 속삭일 수 있는 것이다 아마 박동진은 자신만 입을 꾹 닫고 있으면 지금 같은 상태가 영원히 지속할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애인을 만들고서도 아내에게 소홀하지 않았으니까. 또한 그 와중에 회사 일도 완벽하게 처리해 냈다. 하지만 아무리 철저하게 숨겨도 여자의 직감은 피해 가지 못했다. 송가빈은 아주 미세한 그의 행동 변화로 이상함을 눈치챘고 그렇게 결국 임수연이라는 여자까지 알아내고야 말았다. 사실 바람을 피우고 싶은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본래 사람이라는 건 늘 새로운 걸 추구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선택을 했으면 그 선택에 따른 책임도 져야 하는 법이었다. 송가빈은 바람을 피우는 남자와 평생을 묶여 살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그가 주는 품이 안락하고 따뜻하다 해도 말이다. “말해! 왜 갑자기 옷을 다 정리해 뒀는지!” 박동진이 화를 내며 송가빈의 어깨를 더 세게 잡았다. 이에 송가빈이 아픈 듯 미간을 찌푸리자 그는 바로 손을 풀어버렸다. 그러나 그의 두 눈은 여전히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유행이 지난 옷들이라 지겨워져서 기부하려고. 그리고 새로 사서 채워 넣을 거야. 당연한 거잖아. 입을 게 없으니까. 언제는 질리면 싹 다 버리고 다시 새 옷으로 채워 넣어도 된다며? 왜, 지금은 아니야?” 송가빈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기부... 하려고 이 옷을 다 정리해 둔 거라고?” 박동진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물었다. “응.” 송가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멀쩡한 옷인데 버리기는 좀 그렇잖아. 그럴 바에는 기부하는 게 낫지.” 박동진은 그제야 안도하며 미소를 지었다. “깜짝 놀랐잖아. 나는 네가 내 곁을 떠나려고 하는 줄 알았어.” “내가 널 왜 떠나? 뭐 나한테 잘못한 거라도 있어?” “없지. 나는 가빈이 네가 싫어하는 건 안 하는 사람이잖아.” 택배 기사는 기대했던 결말이 아니라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큰손 고객이라 기분은 좋았다. 옷이 빼곡히 담겨있는 걸 보니 못해도 50kg은 되는 것 같았다. 기분이 좋아서인지 그는 립 서비스도 아끼지 않았다. “남편분이 아내 분을 엄청 많이 사랑하시네요. 보기 좋습니다. 저희 남자들의 모범이세요. 저도 꼭 형님처럼 다정하고 아내밖에 모르는 자상한 남편이 되고 싶어요.” 박동진은 남자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송가빈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들었어? 오늘 처음 본 사람도 나한테 자상하고 다정한 남편이래. 그러니까 많이 예뻐해 줘. 알겠지?” 송가빈은 그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또다시 옆으로 밀어버렸다. “결제해야 하니까 내 휴대폰 좀 가져와.” ...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박동진은 서재로 들어갔다. 매주 수요일 아침에는 늘 임원진 회의가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대표가 재택근무를 하겠다고 얘기한 덕에 화상 통화로 회의를 진행했다. 그 시각, 송가빈은 방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방 변호사님, 제가 보낸 이혼합의서 보셨어요? 이제 숙려기간만 지나면 남편이랑은 완전히 남이 되는 거죠?” “남편분 사인도 있고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어 양육권 분쟁을 할 일도 없을 테니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게다가 가빈 씨는 재산분할도 요구하지 않으셨고요. 하지만...” 방은호가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뭐죠?” “숙려기간이 끝나면 두 분이 함께 가정법원으로 가 사인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남편분이 과연 사인하려고 할까요?” 송가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남편 모르게 이혼하는 방법은 없나요?” “어렵습니다.” 송가빈은 입술을 꽉 깨물더니 방은호의 계좌로 돈을 송금했다. “지금은요? 아직도 없어요?” “어렵긴 합니다만...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방은호의 태도가 갑자기 바뀌었다. “얘기해 보세요.” “남편분을 설득해 대리인 위임장에 사인하도록 하세요. 그러면 굳이 남편분이 아니더라도 남편에게서 위임장을 건네받은 변호사가 모든 업무를 대신해 줄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이혼 사인도요.” 송가빈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혼합의서에도 흔쾌히 사인해 줬던 박동진이기에 잘만 구슬리면 위임장도 쉽게 받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지금 당장 위임장 양식을 준비해 주세요. 사인은 내가 어떻게든 받아낼게요. 숙려기간이 끝나면 그때는 방 변호사님과 함께...” “저는 못 합니다.” 송가빈은 혀를 한번 차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보수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이혼하자마자 드릴 테니까.” “보수 문제가 아닙니다.” 방은호가 곤란해하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만약 이 일에 제가 끼어들게 되면 제 커리어는 끝입니다. 가빈 씨야 이혼하고 나면 해외를 나가든 뭘 하든 자유로워지겠지만 저는 아니잖습니까. 만약 남편분이 저한테 복수라도 하려고 들면 저는 정말...” “그럼 대안을 내봐요.” “혹시 저 말고 아는 변호사가 또 없습니까? 믿을 만하고 이번 일에 엮어도 탈이 없을 그런 사람이요.” 송가빈은 그 말에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탈이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와 박동진의 이혼을 간절하게 원하는 변호사라면 주위에 딱 한 명 있었다. ... 오후 3시, 카페. 송가빈의 약속 상대는 2시간이나 지난 뒤에야 느긋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이네요. 그간 잘 지내셨죠? 정 변호사님.” 송가빈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녀가 정 변호사라고 부른 남자의 이름은 정찬수로 박동진과는 어릴 때부터 친했던 친구다. 성남 정씨 가문의 셋째인 그는 첫째와 둘째가 재산을 가지고 다툼을 벌이고 있을 때, 관심이 없다는 듯 착실하게 로스쿨을 졸업하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으로 와 변호사가 되었다. 키도 크고 워낙 잘생긴 얼굴이라 그는 박동진 못지않게 인기가 많았다. 그런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는 송가빈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다. 적대감을 보인 시기는 정확히 그녀가 박동진과 연애를 시작하고 나고부터였다. 박동진의 다른 지인들은 모두 그녀를 형수님 또는 제수씨라고 불렀는데 정찬수만은 늘 ‘송가빈 씨’라고 딱딱하게 불렀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나를 다 부르셨을까? 송가빈 씨와 내가 카페에서 화기애애하게 얘기를 나눌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축하한다는 말을 해주려고 불렀어요.” 정찬수가 눈썹을 끌어올렸다. “뭘 축하한다는 거죠?” “소원을 드디어 이루셨더라고요.” 송가빈은 그렇게 말하며 가방에서 한 묶음의 사진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박동진과 임수연이 다정한 모습으로 찍혀있는 이 사진들은 모두 사설탐정이 그녀에게 보내준 것들이었다. 손을 잡는 것부터 시작해 끌어안고 있는 모습, 그리고 입을 맞추고 있는 모습까지 전부 다 찍혀있었다. 정찬수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보더니 갑자기 큰소리로 웃었다. “동진이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네요. 다소 늦기는 했지만 뭐가 됐든 다른 여자랑 끌어안고 있는 걸 보니 기분이 좋네요.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것 같아요.” 정찬수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자가 박동진의 아내라는 것도 잊은 건지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송가빈은 그의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심호흡을 한번 하며 꾹 참았다. 지금은 그녀를 도와줄 사람이 눈앞에 있는 이 남자밖에 없었으니까. 정찬수는 카페가 떠나가라 실컷 웃다가 갑자기 어느 순간 웃음을 뚝 그치더니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혹시 내가 동진이를 설득해 주길 바라서 나를 여기까지 부른 겁니까? 그런 거면 사람을 잘못 찾았네요. 나는 두 사람이 이혼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라.” “알아요.” 송가빈이 말했다. “이번만큼은 정 변호사님과 제 목표가 일치하거든요.” “무슨 말이죠?” 정찬수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물었다. “박동진이 대리인 위임장에 사인하도록 할 거예요. 업무를 대신 해주는 변호사 이름에는 정찬수 씨의 이름을 적을 거고요. 그거로 나랑 같이 이혼하러 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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