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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정찬수가 다시 등을 떼며 물었다. “솔직히 이해가 안 가네요. 15년을 함께 했잖아요. 전에 동진이한테 듣기로 임신 준비도 하고 있다던데 그런 사람이 갑자기 이혼하겠다고요?” “도와줄 건지 말 건지만 얘기해주세요.” 정찬수는 아무 말 없이 송가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진심이 뭔지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눈빛이었다. “거절 안 하셨으니까 도와주는 거로 알면 되죠?” 송가빈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때, 하필이면 커피를 들고 지나가던 직원과 부딪혀버렸고 중심을 잃은 송가빈의 몸이 그대로 정찬수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그 순간, 창밖의 누군가가 빠르게 셔터를 누르며 두 사람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플래시를 눈치챈 정찬수가 미간을 찌푸리며 조금 거칠게 송가빈을 일으켜 세웠다. “최근에 미행당한 적 있습니까?” 송가빈은 손에 튄 커피를 닦아내며 말했다. “아니요.” “방금 누가 우리 둘이 붙어있는 사진을 찍었어요.” 정찬수의 목소리가 조금 다급해졌다. “불가피한 상황 때문에 위험한 사람을 건드린 적은요? 그런 적은 없습니까? 만약 방금 사진이 뿌려지게 되면 일이 복잡해질 겁니다.” 송가빈은 그 말에 가볍게 웃었다. “우리 둘 다 떳떳한데 뭐가 걱정이에요?” “...” 송가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를 뒤로하고 자신의 물건을 다시 가방에 넣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정 변호사님도 저희 이혼을 바라셨으니까 도와줄 거라고 믿어요. 저를 도와주실 거면 메일로 위임장을 작성해 보내주세요. 사인은 어떻게든 하게 만들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일단 알겠어요.” 송가빈은 말을 마친 후 카페를 나와 택시에 올라탔다. 차량에 시동이 걸리자마자 그녀의 휴대폰으로 여러 장의 사진이 전송됐다. 사진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그와 정찬수로 절묘한 각도로 인해 꼭 정찬수가 그녀를 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내 사진 기술 어때?] 메시지를 보낸 건 그녀의 친구인 주한별이었다. 주한별은 베테랑 웨딩 스냅 작가였다. 즉, 사진 퀄리티는 보장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잘 나왔는데? 역시 사진작가는 달라. 수고했어.] [그런데 이런 사진은 왜 찍으라고 하는 거야? 이제 와서 질투 작전이라도 쓰게?] [내가 그런 수고를 왜 해?] [그럼 뭣 때문인데?] 송가빈은 정찬수의 얼굴을 확대해 보다가 다시금 손을 움직였다. [정찬수 이 인간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간이라 이렇게 약점을 쥐고 일을 시작하는 게 내 마음이 편해.] 주한별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정찬수가 갑자기 마음을 바꿀까 봐 그래? 그런데 그럴 일은 없지 않나? 너랑 박동진이 헤어지길 누구보다 바랐던 사람이잖아.] [그 사람은 나랑 박동진 일에만 열을 내는 게 아니라 내가 하는 말은 거의 다 반박하고 보는 인간이야.] 가끔 보면 정찬수는 그녀와 대척점에 서고 그녀의 말을 반박하는 게 세상의 낙인 것 같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 송가빈은 뭐라도 쥐고 있어야 했다. 갑자기 마음을 바꾼 정찬수가 그녀에게 또 어떤 태클을 걸어올지 모르니까. 송가빈은 주한별과의 대화를 마친 후 잠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은 지 3초도 안 돼 갑자기 급브레이크가 걸리며 차량이 멈춰 섰다. 그 탓에 그녀의 몸은 그대로 앞으로 쏠려버렸다. “횡단보도도 아닌데 왜 뛰어들어? 죽고 싶어 환장했어?!” 택시 기사가 차창을 열고 미친 듯이 욕을 쏟아냈다. 송가빈은 부딪쳤던 어깨를 어루만지며 미간을 찌푸린 채 앞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남녀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주운 남자가 옆에 서 있는 여자에게 건넸다. 그리고 여자는 눈물을 글썽이며 감동한 듯 남자를 꼭 끌어안았다. 갑자기 길 한복판에서 애정 행각을 벌이고 있는 커플 때문에 차량 열 대가 긴급 브레이크를 밟아야만 했다. 그때 옆에 멈춰 선 검은색 승용차에서 남자 한 명이 내렸다. “지금 길 한복판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사고 날 뻔했잖아! 당신들만 끌어안고 좋으면 다야?” 박동진은 품에 안긴 여자를 꼭 끌어안은 채 차주에게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여자 친구의 팔찌가 떨어져서요. 그걸 줍다 보니 의도치 않게 폐를 끼치게 됐네요.” “그럼 차량이 다 지나가고 나서 줍든가 해야지! 만약 사고라고 났으면 우리가 보상해 줘야 하잖아? 그리고 나 지금 늦었는데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어?!” 박동진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죄송합니다. 보상은 당연히 해드릴 겁니다. 저쪽에 있는 제 비서한테 연락하시면 견적의 세 배를 보상해 줄 겁니다.” 세 배라는 말에 승용차 차주와 택시 기사들의 표정이 단번에 밝아졌다. “손님, 잠깐만 기다려주실래요? 저 사람 비서의 전화번호만 받고 금방 다시 돌아올게요.” 송가빈이 탄 택시의 기사도 눈을 반짝이며 금방이라도 안전벨트를 풀려고 했다. “50만 원 줄 테니까 지금 당장 출발해 주세요.” 송가빈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 아, 네! 알겠습니다.” 30만 원 정도 받을 생각이었던 택시 기사로서는 반가운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송가빈은 다시 한번 돈의 대단함을 느끼며 피식 웃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임수연의 마음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잘생기고 돈 많은 남자가 매일 같이 매장으로 찾아와 선 넘는 요구도 하지 않고 고작 액세서리나 사 가는데 어떻게 설레지 않을 수 있을까. 게다가 임수연은 집안 사정이 좋은 편이 아니었기에 박동진이 부자라는 게 큰 매력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보다 아까 그 여자는 좋겠네요. 남자 친구가 잘생긴 것뿐만이 아니라 위험도 무릅쓰고 팔찌까지 주워줬잖아요.” 택시 기사의 말에 송가빈은 침묵으로 답했다. “그런데 딱 봐도 부자인 것 같은데 굳이 팔찌를 다시 주워줄 필요가 있었나? 더 비싸고 좋은 것으로 사주는 게 여자한테는 더 좋을 것 같은데. 안 그래요? 위험하잖아요.” 맞는 말이었다. 로맨스가 아무리 중요해도 목숨보다는 아니니까. 송가빈은 문득 박동진과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 생각했다. 그때도 오늘과 비슷한 광경이었다. 당시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던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모퉁이에서 상처를 입은 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했다. 송가빈은 망설임 없이 고양이를 품에 안아 들고 근처 동물 병원으로 뛰어갔다. 그런데 횡단보도를 건너던 중에 갑자기 고양이가 품에서 빠져나와 차량 쪽으로 달려갔다. 게다가 하필이면 그때 보행자 신호가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송가빈은 몇 번이나 깔릴 뻔한 고양이를 보며 발을 동동 구르다 사람이 뛰어들면 차량도 멈춰 서겠지 싶어 얼른 뛰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맞은편에서 웬 남학생이 빠르게 달려가 고양이를 품에 낚아챘다. 그러고는 차량을 피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 고양이 네 거야?” 남학생은 흰색 농구 유니폼에 흰색 밴드를 머리에 두르고 있었다. 금방 한게임 뛰다 온 건지 땀방울이 볼을 따고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무리 네 고양이라도 그렇지 아무런 대책도 없이 뛰어들면 어떡해? 다칠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 남학생은 송가빈과 고양이를 안전한 곳으로 끌고 오더니 마치 선생님처럼 설교하기 시작했다. 키가 컸던 탓에 송가빈은 그의 그림자에 완전히 갇혀버렸다.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렇게 모르는 남학생의 설교를 계속 듣고 있는데 남학생과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학생들이 두 사람 쪽으로 다가왔다. “뭐야, 꼬질한 고양이었잖아? 목숨 걸고 달려들려고 하길래 엄청 예쁜 고양이인 줄 알았는데. 얘 말고 예쁜 고양이로 사서 키워. 이건 냄새도 안 빠지겠다.” 친구 중 한 명이 고양이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그러자 박동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친구의 손을 쳐냈다. “만지지 마. 그리고 시끄러우니까 입 닫아.”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못생기고 냄새나는 고양이 맞잖아!” “한마디만 더 하면 더럽고 냄새나는 네 운동화, 길 한복판에 버려버릴 거야.” “야! 종일 땀을 뻘뻘 흘리면서 뛰었는데 그럼 향기가 나냐? 그리고 이건 내가 제일 아끼는 운동화거든? 이름도 있어. 럭키슈라고. 무려 이준재 선수가 선물로 준 거라고.” 박동진은 무서운 미소를 짓더니 친구의 어깨를 꽉 쥐었다. “그래? 내 눈에는 그저 더럽고 냄새나는 운동화로밖에 안 보이는데? 이준재 선수가 줬을 때는 깨끗했을 거 아니야. 더럽고 냄새나는 걸 대신 버려주겠다는데 왜 그래? 그렇게도 이 신발이 좋으면 새 거로 사.” 친구는 그 말에 입을 꾹 닫아버렸다. 박동진은 주위가 조용해지자 다시 고개를 돌려 송가빈을 바라보았다. “멍청한 애라 말을 저딴 식으로밖에 못해. 내가 대신 사과할게. 미안해.” “아니에요. 고맙습니다.” “송가빈? 너도 우리 학교 학생이야?” 박동진이 송가빈의 명찰을 보며 물었다. “네.” “나도 너랑 같은 학교야. 이름은 박동진이고.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지 얘기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는 했지만 박동진이 필요했던 순간은 한 번도 없었기에 송가빈은 단 한 번도 그를 찾지 않았다. 오히려 박동진이 하루가 멀다고 그녀의 반으로 찾아왔다. 그 행동이 계속되자 친구들 사이에서 박동진이 송가빈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송가빈은 그 소문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이제는 박동진이 오는 걸 기대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두 사람의 인연은 그렇게 풋풋했던 학창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송가빈은 눈을 감은 채 시트에 등을 기댔다. 아쉬울 건 없었다. 15년이라는 동안 두 사람은 누구보다 뜨겁게 사랑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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