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그럼 이혼합의서는 집에 가서 잘 작성해 주세요.”
송가빈의 말에 정찬수가 눈썹을 끌어올렸다.
“지금 축객령을 내린 겁니까?”
“급하게 가 봐야 할 곳이 있어요.”
“설마 송가빈 씨도 밖에 따로 애인을 만들어 둔 건 아니죠?”
송가빈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가방을 꺼내 들었다.
“재밌는 구경 하러 가는 거예요.”
“그런 거면 같이 가죠. 나도 보고 싶으니까.”
송가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안 된다고 말을 하려는데 정찬수가 멋대로 컴퓨터를 끄며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그러고는 차에 시동을 켜며 그녀에게 빨리 타라고 재촉했다.
“...”
잠시 고민하던 송가빈은 결국 조수석에 올라탔다. 어차피 언젠가는 만나게 될 사람일 테니까.
30분 후, 정찬수의 차량이 백화점 앞에 도착했다.
정찬수가 주차하는 동안 송가빈은 홀로 안으로 들어갔다. 코너를 막 돌고 나니 매장 안에 있는 임수연의 모습이 보였다.
단정한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임수연이 콧노래를 부르며 막 도착한 신상품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때 송가빈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박동진이었다.
송가빈은 차갑게 웃더니 곧장 전화를 받았다.
“왜?”
“어디야? 왜 집에 없어? 나 지금 집에 도착했는데.”
송가빈이 모르는 척 물었다.
“야근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벌써 끝난 거야?”
“너 보고 싶어서 빨리 끝내고 왔지. 그래서 지금 어디야?”
송가빈은 그의 말이 가소롭기 그지없었다.
“너 야근해야 한다고 해서 유정이네 집에 놀러 왔어.”
양유정은 그녀의 절친한 친구로 배우 일에 종사하고 있다.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배우라 쉽게 얼굴을 드러낼 수 없었기에 항상 집이 아니면 다 늦은 저녁 시간에 송가빈을 불러 놀았다.
박동진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유정 씨 어제 우천에서 촬영한다고 하지 않았어? 언제 돌아온 거야?”
“오늘 아침에 모든 촬영이 다 끝났대.”
“그래? 그럼 재밌게 놀아. 내일 아침에 유정 씨네 집으로 데리러 갈게.”
“괜찮아. 유정이네 집 기사님이 알아서 집까지 데려다줄 거야.”
전화를 끊은 후 송가빈은 천천히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임수연은 그녀를 보더니 활짝 웃으며 맞이했다.
“오셨어요? 어떤 것부터...”
그때 임수연의 휴대폰이 울려댔다.
“죄송합니다. 잠시 전화 좀 받아도 될까요?”
“그렇게 해요.”
송가빈은 흔쾌히 알겠다고 하며 매장 소파에 앉아 잡지를 보았다.
주변이 매우 조용했던 터라 임수연의 목소리가 아주 잘 들려왔다.
“삐지지 마. 나도 어쩔 수 없었단 말이야. 언제 돌아올 수 있냐고? 그거야 사모님 마음이지. 내가 어떻게 재촉을 해. 혼자 두고 온 건 정말 미안해. 내가 내일 제대로 보상해 줄게. 응? 그러니까 화 풀어. 알겠지? 그럼 끊는다.”
임수연의 얼굴은 어느새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보고 싶다는 등의 달콤한 말을 한가득 들은 모양이었다.
“죄송해요. 급하게 받아야 하는 전화라서...”
임수연은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앞으로 가 신상품을 진열해 주었다.
“사모님이랑 어울릴 만한 디자인으로 한번 추려봤어요. 어떤 게 마음에 드세요? 일단 착용해 보시고 이 중에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 없으시면 제가 다른 것도 가지고 올게요.”
송가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임수연의 손은 여전히 너무 예뻤다. 고작 귀걸이 하나 집는데도 마치 광고의 한 장면 같았다.
“방금 통화한 사람이 바로 그 남자 친구예요?”
송가빈이 다 들었을 줄은 몰랐는지 임수연의 얼굴이 더 빨갛게 변해버렸다.
“네, 남자 친구도 저도 최근에 많이 바빠졌거든요. 그래서 타이밍이 안 맞으면 방금처럼 자꾸 삐져요.”
“앞으로는 지겹도록 붙어있게 될 거예요.”
송가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박동진이 나랑 이혼하면 그때는 박동진의 모든 시간이 다 네 거일 테니까.’
임수연은 수줍게 웃더니 귀걸이를 들어 그녀의 귓가로 다가갔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될까 봐 솔직히 조금 겁나기도 해요. 지금도 엄청 달라붙거든요.”
“그래요? 두 사람은 어떻게 만나게 됐어요?”
“남자 친구가 이곳 매장에 자주 방문했었어요. 선물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하면서. 그렇게 손님이랑 고객으로 지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저를 좋아한다면서 고백을 해왔어요.”
임수연은 부끄러운지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어떤 걸 사 갔어요?”
“귀걸이도 있고 목걸이도 있고... 여기 매장에 있는 건 거의 종류별로 하나씩 다 사 갔어요.”
그 말에 송가빈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이곳 매장은 여성용 액세서리밖에 없지 않나요? 혹시 구매해서 다른 여자한테 준 건 아니에요?”
귀걸이를 걸어주려던 임수연이 손이 삐끗하고 말았다.
“아!”
하얀 귀에서 피가 뚝뚝 흘러나왔다.
“어머!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임수연이 얼른 티슈를 꺼내 들며 피를 닦아주려고 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그런데 그때, 분노에 찬 외침과 함께 누군가가 다가와 임수연을 옆으로 확 밀쳐버렸다. 퍽 소리가 나게 넘어진 것이 상당히 아파 보였다.
송가빈이 고개를 돌려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려는데 뜨거운 남자의 손이 그녀의 귓가에 닿았다.
“괜찮아요?”
목소리의 주인을 돌아본 송가빈은 곧장 미간부터 찌푸렸다.
“왜 따라왔어요?”
정찬수는 잔뜩 굳어진 얼굴로 그녀의 상처를 가리켰다.
“재밌는 구경 하러 간다더니 대가를 치러야지만 볼 수 있는 거였나 보죠?”
송가빈은 액체가 떨어지는 느낌에 티슈를 뽑아 얼른 닦아냈다.
흰색 티슈가 금세 빨간색으로 물들어버렸다.
임수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연신 그녀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사모님을 다치게 할 생각은 정말 없었는데... 제가 지금 당장 알코올 솜을 사와 소독해드릴게요.”
“됐습니다.”
정찬수가 차가운 목소리로 거절했다.
“바로 병원으로 데려갈 테니까 비켜요.”
말을 마친 정찬수는 송가빈의 손을 잡더니 그대로 백화점을 벗어났다.
병원으로 가는 길, 송가빈은 그의 난폭한 운전에 엉덩이가 반쯤 공중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변호사 그만두고 레이싱 선수나 준비하지 그래요? 천직일 것 같은데.”
그녀의 말에 정찬수가 미간을 찌푸리며 노려보았다.
“피가 철철 흐르는데 농담할 기운은 아직 남아 있나 보죠?”
“뭘 또 철철 흘러요. 거의 멎었구만.”
병원.
의사는 크게 문제 될 건 없다면서 간단한 처치를 해준 후 바르는 약을 처방해 주었다.
정찬수는 잔뜩 굳은 얼굴로 옆에서 지켜보다가 의사가 이만 가봐도 된다는 말을 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
“파상풍 주사는 맞지 않아도 됩니까?”
“금으로 된 귀걸이라 파상풍 주사를 맞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 공기 중에 파상풍에 걸리기 쉬운 균 같은 것들이 있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파상풍 주사도 놔주세요.”
“그런 논리면 광견병 바이러스도 공기 중에 둥둥 떠다닐 텐데 광견병 주사도 놔달라고 하지 그래요?”
송가빈이 눈썹을 끌어올리며 그의 말에 반박했다.
“쿵짝이 잘 맞는 부부네요. 같이 있으면 심심할 틈이 없으시겠어요.”
의사가 소리 내 웃었다.
병원에서 나온 후, 송가빈은 홀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정찬수가 바래다주겠다고 했지만 송가빈이 완곡하게 거절해 버렸다.
박동진은 여전히 그녀와 정찬수를 만나면 싸워대는 앙숙이라고 생각하고 있기에 지금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것이 좋았다.
송가빈이 집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새벽이었다.
그녀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후 곧장 2층으로 향했다. 모든 게 다 깜깜한 와중에 안방에만 불이 켜져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것뿐만이 아니라 현관에 익숙한 여자의 신발도 놓여 있었다.
1시간 전에 주얼리 매장에서 본 임수연의 하이힐이었다.